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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59 (1) 2018/11/18 PM 11:56

제 05장 -싸움의 종식

 

 

三. 최후의 승자

 

◇ 각자의 그후

~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의 그후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먼저, 귀경(帰京)한 신제이(信西)의 자식들에 대해 다뤄보자면, 그들은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일어나기 전에는 부친인 신제이의 비호 아래에서 실무 관료나 대국의 즈료(受領)로서 활약하여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이나 니죠 텐노(二条天皇) 쌍방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능한 관료로서 이미 산기(参議)에 올라있던 장남 토시노리(俊憲)는 에치고(越後)로, 차남이자 곤노우츄벤(権右中弁)이었던 사다노리(貞憲)는 토사(土佐)로 각자 유배되었다. 토시노리는 유배를 갈 때에 출가하여 귀경후에는 정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가 닌안(仁安) 2년(1167)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모토아키(基明)는 공경(公卿) 자리에 올라가지 못 했으며, 손자인 노리무네(範宗), 증손자인 노리야스(範保)가 종 3위로 서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지만, 실무 관료의 지위를 얻지 못 해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다노리의 귀경후의 소식은 불명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출가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자손도 실무 관료로서 활약하지는 못 했다. 다만, 자식 중 하나인 죠케이(貞慶)가 코후쿠지(興福寺)에서 개혁파로서 활약하다 카사기야마(笠置山)에서 은둔 한 것으로 유명한 정도이다.

 한편, 키노2위(紀二位)의 자식인 시게노리(成憲)는 시모츠케(下野), 나가노리(脩憲)는 오키(隠岐)로 유배되었다. 그들은 이복형들과 달리 출가하지 않아서, 귀경후에는 모두 이름의 憲자를 範로 고쳐 정계에 머물렀다. 시게노리는 귀경후에 곧바로 자신의 본래 관직에 복귀하였다가 닌안 원년(1166)에 서른세 살의 나이로 종 3위에 서입되어 공경의 지위를 획득, 쥬에이(寿永) 2년(1183)에는 정 2위 츄나곤(中納言)에 도달했다. 또, 나가노리는 죠안(承安) 4년(1174)에 산기로서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가 정 3위 산기로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들의 승진은 모친이 메노토(乳母)였던 관계로 고시라카와인을 가까이서 모신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쇼(治承) 3년(1179) 11월에 일어난 정변으로 고시라카와가 타이라노키요모리에 의해 유폐당했을 때에도 인의 곁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고시라카와의 유일무이한 측근이었지만, 그런 반면에 정치적 역량도 야심도 없어서 키요모리로부터 경계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게노리는 오로지 풍류의 길을 걸었는데, 벚꽃을 사랑하여「사쿠라마치츄나곤(桜町中納言)」이라 불리웠으며,『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의 저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의 화려한 활동은, 부친인 신제이의 비호 아래라 가능했던 것이며, 그들에게는 독자적으로 활동할 만한 역량은 없었다. 시게노리, 나가노리의 자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 했다.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의 그후에 대해서도 다뤄보자. 

 코레카타는 유배를 갈 때에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쟈쿠신(寂信)이라 칭했다. 닌안 원년에 귀경을 허락받았으나, 정계에 복귀하지는 모 하고 오로지 가인(歌人)으로서 활약해,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나 사이교(西行)와 친교를 맺었다. 켄닌(建仁) 원년(1201)에 일흔일곱 살에 우타아와세(歌合)에 출석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 풍류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장수했던 듯 하다.

 형인 미츠요리(光頼)의 계통인 하무로(葉室) 가문이 인(院)의 근신이자 실무 관료로서 크게 발전한 것과는 반대로, 그의 자손은 쇼다이후(諸大夫) 정도의 가격(家格)으로 전락하게 된다. 범죄자의 자손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반해 츠네무네는 자신의 삶도 자손의 존재 형태도 코레카타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츠네무네는 니죠 텐노가 친정(親政)을 확립한 것과 발맞춰 이른 시기인 유배로부터 2년 뒤인 오호(応保) 2년(1162)에는 귀경을 허락받았다. 코레카타와 비교해 관여 정도가 낮다고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2년후인 쵸칸(長寛) 2년(1164)에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에이만(永万) 원년(1165)에 니죠 텐노가 사망한 뒤에도 입장은 변하지 않아, 익년에 사다이진(左大臣)으로 승진하자마자 분지(文治) 5년(1189)에 출가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해 고시라카와인의 인정(院政)을 지탱하는 유능한 사다이진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또, 그의 자식인 요리자네(頼実)는 쇼지(正治) 원년(1199)에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으로 승진하였으며, 츠네무네의 자손인 오오이미카도(大炊御門) 가문은 오오오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한번은 유배형에 처해졌던 공경의 자손으로서는 믿기 힘든 가문의 융성을 보여주게 된다. 

 최대한의 굴욕을 주었을 정도로 츠네무네를 증오한 고시라카와인도, 결국은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요리나가(頼長)의 자식인 모로나가(師長)를 총애하여 다이죠다이진에 기용한 것과 나란히, 고시라카와인은 어떤 의미로 도량이 깊었던 듯 하다. 어찌됐든, 인생이란 게 어떻게 굴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에이랴쿠(永暦) 원년 3월 11일, 츠네무네와 코레카타와 같은 날에 후시미츄나곤(伏見中納言)인 모로나카(師仲), 그리고 요리토모(頼朝), 동복 동생인 마레요시(希義)가 각각 유배지였던 이즈(伊豆), 토사로 내려갔다. 이것으로 헤이지의 난 관계자의 처벌은 모두 끝이 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여파라고도 해야 할 사건이 이 해 6월에 발생한다. 

 미노 겐지(美濃源氏) 출신 무장인 미츠야스(光保)와 자식인 미츠무네(光宗)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에 의해 유배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미츠야스는 사츠마노쿠니(薩摩国) 카와지리(川尻)에서 살해당하기에 이르렀다.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들이 헤이지의 난이 발발한 시점에서 노부요리(信頼), 요시토모(義朝)와 행동을 함께하여 신제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어쩌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 것이리라.

 이리하여, 헤이지의 난 발생에 관여한 공경, 무사는 고시라카와인, 니죠 텐노의 측근을 막론하고 문자 그대로 일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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