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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60 (0) 2018/11/20 AM 12:18

제 05장 -싸움의 종식

 

 

三. 최후의 승자

 

◇ 키요모리(清盛)의 승리

~ 왕가와 셋칸케(摂関家)라는 양대 권문(権門)으로 구성되어 온 인정기적(院政期的) 정치구조는 호겐의 난(保元の乱)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후의 정치는 자립했던 과거의 인(院)의 근신들이 상극하는 혼미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발생한 것이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었던 것이다. 난 도중에 신제이(信西),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들이 연달아 권력을 빼앗으면서 하나 둘 죽임을 당하거나 실각했다. 최종 단계에서 그 혼미를 극복하여 승리의 성과를 독점한 이가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였다.

 키요모리는 나이다이진(内大臣)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의 알선으로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들과 손을 잡고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를 무력(武力)으로 진압했으며, 이어서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명령을 받고서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를 추포했다. 反신제이파의 주모자 전원을 키요모리가 진압, 추포했다는 뜻이다. 이 결과, 그가 정치적 지위를 크게 상승시켰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키요모리는,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가 유배된 직후인 에이랴쿠(永暦) 원년 6월 20일, 로쿠하라(六波羅) 행행(行幸)에 대한 상으로 정 3위의 위계(位階)를 받아 공경(公卿)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부친인 타다모리(忠盛)가 염원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 했던 공경 승진을 그는 마흔세 살에 실현한 것이다. 덧붙여, 이 일정을 생각해보면, 미츠야스의 실각이 헤이지의 난의 최종 결착과 관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키요모리가 정 4위하에서 종 3위를 넘어 단번에 정 3위로 서임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 4위하에서 정 4위상으로 바로 오를 수 있는 경우는 통상적인 예였으나, 정 3위로까지 승진하는 것은 그 예가 없었다. 그의 공적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공로자라 한다면, 무사인 키요모리와는 반대로, 쿠게(公家)에서는 나이다이진 킨노리가 최고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는 이질에 걸려 에이랴쿠 원년 7월 9일에 급사해버렸다. 향년 쉰여덟 살. 부친인 전다이죠다이진 사네유키(実行)는 여든한 살로 아직 건재했다. 이 킨노리의 급사도 키요모리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어서 그의 공적을 더욱 더 눈에 띄게 했다. 

 킨노리가 죽고 1개월 뒤인 8월 11일, 지모쿠(除目)에서 키요모리는 산기(参議)로 승진, 9월에는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를 겸임하기에 이르렀다. 거기다, 익년에는 케비이시 벳토(検非違使別当)를 겸임하였고, 이어서 곤노츄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이 너무 빠른 승진이나 그가 취임한 역직(役職)은 과거의 노부요리와 같았다. 역시나 최대의 무문(武門)에 대한 대우로서 공통성이 있었던 게 아닐까? 

 무엇보다,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켰다고는 해도, 그는 무문인 만큼 신제이와는 달리 직접 정무에 개입하고자 움직이지는 않았다. 난이 수습된 직후에 잠시간 재발한 고시라카와인과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두 계파의 대립에서도 키요모리는 신중하게 움직이며 적극적인 개입을 회피했는데, 이것도 정치력의 한계를 이야기 해준다. 공경 승진 등... 정치적 지위의 상승은 그의 입장을 크게 바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은 대립하던 무문이 소멸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토고쿠(東国) 무사를 조직화하여 부케(武家)의 동량(棟梁)으로서 급속도로 대두했던 요시토모, 위계로는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미츠야스가 차례차례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호겐의 난에서는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의 이단아인 숙부 타다마사(忠正),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주류였던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의 일족,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방류(傍流) 출신인 타이라노마사히로(平正弘) 일족이 헤이지의 난에서는 요시토모, 미츠야스 이외에 미나모토노미츠마사류(源満政流) 출신인 시게나리(重成),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출신인 스에자네(季実)들이 멸족해갔다. 인정기에 쿄(京)의 치안, 경찰 활동을 담당하여 지방의 반란이나 분쟁을 진압함과 동시에, 장원 관리의 총아가 된 군사 귀족들... 즉, 쿄무샤(京武者)가 거의 전멸해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 지방 반란의 진압, 쿄의 치안 유지, 장원의 관리 같은 역할은 키요모리의 통솔하에 있던 헤이시 이치몬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국가적 군사, 경찰권을 키요모리는 장악한 것이다. 이미 에이랴쿠 원년 5월, 키요모리는 히젠(肥前)의 휴가 미치요시(日向通良)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전국의 병란에 키요모리가 대처했다. 또, 쵸칸(長寛) 2년(1164), 노부요리의 누이동생과 결혼했으면서도 노부요리의 실각으로 장원 관리자로서의 무력을 상실한 칸파쿠(関白) 모토자네(基実)는 키요모리의 딸인 세이시(盛子)를 정실(正室)로서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장원의 영주가 키요모리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키요모리의 입장을 통해, 난 이후에 이미 헤이시 정권이 성립되었다는 식의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키요모리에게는 커다란 제약이 있었다. 하나는 선술한 정치력의 한계, 그리고 또 하나는 정작 자신이 가진 무력의 한계였다. 키요모리의 직속 무력은, 이가(伊賀)와 이세(伊勢)의 본령(本領)을 중심으로, 해적 토벌 등으로 얻은 한정된 지방 무사에 지나지 않았다. 대규모 반란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명령으로 관아(国衙) 등에서 조직된 지방 무사의 동원을 여의치 못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본령을 중심으로 한 무력에 의존해, 극히 한정적인 지방 무사만 통합한 인정기의 군사 귀족 -쿄무샤- 의 모습을 비대화시킨 것이었다. 광범위한 토고쿠의 무사를 조직하려 한 요시토모 쪽이 오히려 무력의 조직형태로는 참신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경쟁하는 부케의 동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독자적인 무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려 하지 않았다. 국가적인 군사, 경찰권을 장악한 이상, 인이나 텐노의 명령을 이용하는 것으로 지방 무사는 쉽게 동원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왕권과 결합하여, 의존한 헤이시의 모습이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키요모리가 왕권을 종속시키고 독재정권을 쌓은 것은 20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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