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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61 (0) 2018/11/20 PM 11:57

제 06장 -무사들의 세상의 도래

 

 

◇ 호겐・헤이지의 난을 회고하며...

~『愚管抄(구칸쇼)』의 저자인 지엔(慈円)은 호겐의 난(保元の乱)을 계기로「ムサ」... 즉, 무사(武者)의 세상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확실히, 호겐의 난으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 발생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은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의 무력(武力)이 야기하였다가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무력이 평정한 사건이었다. 무사의 힘으로 정치가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키요모리가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는, 지쇼(治承) 3년(1179)에 일어난 정변(政変)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호겐, 헤이지의 난이란 대체 어떤 사건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회고 해 보고 싶다.

 호겐의 난은, 전제 권력(専制権力)을 휘두른 치천의 군주(治天の君) 아래에 왕가(王家), 셋칸케(摂関家)라는 양대 권문(権門)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온 인정기(院政期) 안에서 발생한 정치구조의 모순 때문에 발발한 사건이었다. 즉, 정당한 황위계승자인 코노에 텐노(近衛天皇), 치천의 군주 토바인(鳥羽院)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왕가, 셋칸케 쌍방의 분열로 정계는 크게 동요하였으며, 결국에 셋칸케의 주력이 반란으로 인해 괴멸된 것이다. 이 결과, 인정기의 정치구조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 배경에는 왕권을 부계(父系), 모계(母系) 쌍방이 지탱하고, 아버지 인(院), 모후(母后), 외척(外戚) 등이 공동으로 정치를 행하는 미우치 정치(身内政治)가 붕괴하고, 아버지 인이 치천의 군주로서 독재를 함과 동시에, 단독으로 황위를 결정하게 된 것과 관계있다. 스토쿠(崇徳)를 기피하여 코노에, 고시라카와(後白河)를 즉위시켰듯이, 아버지 인인 토바인의 자의(恣意)에 의해 항상 정당성, 권위가 충분하지 않은 텐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인의 죽음에 의해 황위는 현저하게 불안정해졌고, 과거의 모후처럼 대체할 수 있는 조정자도 없어 결국에 무력 충돌이 야기된 것이다.

 거기다, 종래의 국가적인 조직이나 기구를 대신해 개인적인 주종관계가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 것도 관계있다. 권문사원(権門寺院)의 강소(強訴)에 대한 방어나 지방의 적도(賊徒) 토벌을 목적으로, 시라카와인(白河院)이 둔 호쿠멘 무사(北面武士)는 점차 비대해져 쿄(京)의 치안을 유지하는 중심적 무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토바인과의 개인적인 주종관계에 의해 동원되는 성격이 강해져 있었다. 이 때문에, 토바인이 죽은 뒤,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 즉위까지의 중간다리로서 즉위한 고시라카와 텐노 밑에서 그들의 동향은 불안정해지게 된다. 

 한편, 독자적으로 수많은 장원(荘園)을 집적(集積)하고 있던 셋칸케에서도, 큰어르신이 된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가 장원 관리 등을 위해 무사단을 조직하게 된다. 그 무력은 정당한 후계자인 요리나가(頼長)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무력의 존재가, 아버지 인의 사망 이후의 정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때마침 요리나가와 대립하던 인의 근신 세력은 토바인의 죽음에 의해 셋칸케로부터 커다란 위협을 받았다. 이리하여, 토바인의 죽음을 계기로 후지와라노요리나가는 다양한 도발을 받았고, 스토쿠와 함께 반란자로 내몰린 것이다. 여기에, 9세기의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가 일으킨 난 이래의 무력에 의한 병란이 발발한 원인이 존재했다.

 호겐의 난은, 중세에 대응한 귀족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가져다 준... 필연적인 내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들도 중세에 맞춰 자기변용(自己変容)을 하고 있었고, 요리나가와 무사단처럼 귀족이 무사를 조직하여 일체화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성격은, 인의 근신인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에게 계승된다. 

 호겐의 난이 일어난 결과, 셋칸케의 주력은 괴멸되었다. 요리나가의 형인 타다미치(忠通)가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인의 근신에게 종속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아 무력화(無力化)를 여의치 못 했다. 왕가도, 대립하는 스토쿠의 황통(皇統)을 배제시키긴 했지만, 권위가 없는 고시라카와, 아직 어린 모리히토 친왕으로는 구심력이 저하하여 권문으로서의 일체성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왕가, 셋칸케의 분열과 해체를 계기로 정계의 중심에 뛰어든 게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노부요리,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 같은 옛 토바인의 근신들이다. 왕권과 밀착하여 타고난 유능함으로 정무의 실권을 장악한 신제이,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무력을 배경으로 신제이와 대항한 노부요리, 그리고 모리히토 친왕의 외척인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와 손을 잡고, 또 왕권과도 결합하여 신제이 배척을 꾀한 코레카타가 격렬한 대립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른바 치천의 군주 밑에서 인, 셋칸케를 중심으로 정무가 수행되던 구조의 붕괴를 동반해, 약소한 인의 근신들이 정치적으로 자립하여, 상호간에 항쟁을 개시하게 된다. 

 이리하여 헤이지 원년 12월, 노부요리와 코레카타, 츠네무네가 연계하여 신제이를 타도하고 고시라카와인의 인정을 정지시켰다. 하지만, 신제이 타도 이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노부요리와 츠네무네, 코레카타가 대립, 후자가 중립파과 제휴하여 왕권을 독점하였으며, 키요모리의 무력으로 노부요리와 그의 무력인 요시토모를 타도했다. 이것이 헤이지의 난이다. 이른바, 호겐의 난에 의해 커다란 구조가 붕괴된 뒤의 혼란이 야기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권위 없는 군소세력의 항쟁인 만큼, 무력이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사가 대두하여 귀족 정권에 대항한 결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귀족 정권의 내분의 결과였다. 요시토모는 노부요리에게 종속되어 행동하였고, 키요모리도 정국(政局) 밖에서 불려와 결과적으로 승자가 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확실히 키요모리는 승리하였고, 승리의 성과는 키요모리의 것이 되었다. 그는 공경(公卿)의 지위를 얻었고, 국가적인 군사, 경찰권을 사실상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정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한 건 아니었으며, 하물며 정권을 수립한 것도 아니었다. 무사 정권으로 가는 길은 20년을 더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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