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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62(完) (1) 2018/11/21 PM 10:10

제 06장 -무사들의 세상의 도래

 

 

◇ 무사 정권으로 가는 길

~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는 정당한 왕권과 결합하여, 그 아래에서 여러 나라의 군사(軍事), 경찰권(警察権)을 장악해 왕권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다.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이후에 격화한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 인정파(院政派)와 니죠 텐노(二条天皇) 친정파(親政派)의 대립 속에서,『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키요모리는 신중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오호(応保) 원년(1162), 처제인 지시(滋子)가 고시라카와인의 황자인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을 출산하였고, 동생인 노리모리(教盛), 처남인 토키타다(時忠)들이 그의 옹립을 꾀하여 니죠 텐노를 저주하려는 행동을 보이던 중에도 키요모리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오호 2년에 오시코지(押小路)에 조영(造営)된 니죠 텐노의 사토다이리(里内裏)를 경호한다거나, 정무에 관한 자문을 돕는다거나 하며 정치적으로는 니죠 텐노의 친정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다. 쵸칸(長寛) 2년(1164)에 칸파쿠(関白) 모토자네(基実)를 사위로 삼은 것도, 장원 관리를 위한 무력을 필요로 한 셋칸케(摂関家)의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모토자네가 텐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과 관계있다. 정당한 왕권과 결합하여, 명령을 받아 행동한다는 키요모리의 자세가 명확화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니죠 텐노는 에이만(永万) 원년(1165)에 세상을 떠났고, 니죠 텐노의 남겨진 아들 로쿠죠 텐노(六条天皇)를 옹립하여 섭정(摂政)의 자리를 맡은 모토자네도 익년에 급사해버렸다. 이리하여, 키요모리는 조카뻘에 해당하는 노리히토 친왕의 옹립을 목표로 하여, 고시라카와 죠코(上皇)와 처음으로 제휴하게 된다. 

 고시라카와는 모토자네가 죽은 뒤의 셋칸케령(領)을 모토자네의 미망인이자 키요모리의 딸이었던 세이시(盛子)가 관리 할 것을 용인했다. 키요모리는 실질적으로 셋칸케령을 압령(押領)한 것이다. 거기다, 키요모리에게 인의 근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오오오미(大臣)의 지위가 주어졌다. 당시의 오오오미는, 셋칸케와 오오오미 가문의 자식이 아니면 외척이나 황자에게만 허락된 지위였다. 아직 텐노의 외척이 되지 않은 키요모리가 오오오미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시라카와인의 자식임을 공인시키기 위함이나 다름 없었다. 키요모리는, 닌안(仁安) 원년(1166)에 나이다이진(内大臣), 그리고 익년에는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으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양자는 닌안 3년에 노리히토 친왕을 타카쿠라 텐노(高倉天皇)로서 즉위, 3년 후에는 키요모리의 딸인 토쿠시(徳子)가 입궐, 중궁(中宮)으로 책립(冊立)된다. 이리하여 고시라카와인은 키요모리를 자신의 왕권에 편입시켜 약체화 한 왕권의 강화를 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의 눈에 띄는 대두는 고시라카와인의 근신들의 강한 불만을 초래했다. 과거의 신제이(信西) 이치몬의 대두가 헤이지의 난을 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고시라카와인과 키요모리는 정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고, 안겐(安元) 3년(1177)에 일어난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으로 양자는 결국 충돌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는, 헤이지의 난에도 등장한 인의 근신인 나리치카(成親), 사이코(西光)가 살해당했는데, 고시라카와인 자신의 공격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정파들과 친밀했던 시게모리(重盛)의 존재와, 대체할 인이 없었다는 조건에 의한다. 

 그 익년, 타카쿠라 텐노와 토쿠시 사이에서 토키히토 친왕(言仁親王)... 훗날의 안토쿠 텐노(安徳天皇)가 태어났고, 그 다음해인 지쇼(治承) 3년에는 시게모리가 세상을 떠나자, 고시라카와인의 도발을 받은 키요모리는 결국에 거병, 고시라카와인을 토바(鳥羽)에 유폐시켜 인정을 정지, 익년에는 외손자인 안토쿠를 즉위시켜 사실상의 키요모리 독재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유력한 귀족과 무사의 일체화(一体化)라는 움직임은, 토바인(鳥羽院)이 죽은 뒤, 왕권의 분열도 있어서 왕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와 요리나가(頼長) 부자의 무력(武力)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에 의해 괴멸되고, 노부요리(信頼)가 헤이지의 난으로 멸망하자, 그 뒤를 잇기라도 하듯 키요모리가 등장했다. 그는, 출신 자체는 무사였으면서도 황가의 후예로 공인받은 상류 귀족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국가적 무력의 통솔자가 되었다. 왕권과 밀착하여 무사를 동원시킬 수 밖에 없었던 키요모리는, 왕권과 대립하자마자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는 왕권으로 개변(改変)시켜버렸던 것이다. 

 무력에 의한 왕권의 개변, 종속은 나중에 일어날 죠큐의 난(承久の乱)의 선례라고 해야 할 법한 대담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말한다면, 단시일에 붕괴하긴했지만, 무력으로 고시라카와인을 유폐시킨 노부요리의 봉기도, 키요모리의 선례로서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어찌됐든, 키요모리는 자기 밑으로 왕권을 종속시키고, 전국의 무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으며, 셋칸케 이하의 장원의 관리를 동점적으로 행하여 전 일본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이치몬의 지행국(知行国)으로 삼아 관아(国衙)의 무력도 지배하에 두었다. 헤이지의 난의 승리로부터 20년... 정통 왕권인 니죠의 죽음, 모토자네의 죽음과 셋칸케령의 압령, 고시라카와인과의 제휴와 왕권의 기수로의 변모, 그리고 고시라카와인 타도. 다양한 행운도 뒤따라줘서 키요모리가 모든것을 독식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헤이지의 난이 일어난 단계에서, 키요모리는 무사들 중 에서는 일인자이긴 했지만, 여러 나라의 무사들 중 태반은 텐노나 인의 명령에 의존해서 동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정통 왕권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니죠나 모토자네가 단명하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키요모리와는 정반대로 왕권을 상대화(相対化) 한 무사들도 있었다. 적도(賊徒)가 되어 전투에는 졌어도 토고쿠(東国) 탈출을 시도한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이하의 토고쿠 무사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력구제(自力救済)의 세상 속에서 싸워나가고 살아남은 존재였다. 따라서, 자신의 영지 보전과 확대를 최우선시해 그것을 위해서라면 조정의 권위조차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지쇼 3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헤이시 이치몬의 지행국이 된 나라들에서는 헤이시의 케닌(家人)이 모쿠다이(目代)나 새로운 재청관인(在庁官人)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토고쿠에서는 카즈사(上総)나 사가미(相模)가 여기에 해당했다. 모치히토왕(以仁王)의 거병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의 지행국인 이즈(伊豆)도 마찬가지였다. 구석에 내몰린 非헤이시 케닌 무사들은 헤이시 타도를 외치며 무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쇼 4년(1180) 8월, 이즈노쿠니(伊豆国)에서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가 거병하자마자 반란의 불씨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 토고쿠와 자력구제를 기반으로 한 또 하나의 무사 정권이 태동하게 된다.「독식」한 강대한 권력은, 무력을 가진 유력 귀족도, 사원 권문(寺院権門)도, 재경(在京) 무사단(武士団)도 아닌... 당시까지와는 전혀 다른 권력의 도전을 받게 된다. 

 5년에 걸친 겐페이 쟁란(源平争乱) 끝에, 헤이시 정권은 멸망하고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라는 상상도 못 한 새로운 권력이 토고쿠에서 창출되었다.

 호겐, 헤이지의 난은, 인과 셋칸케라는 양대 권문에 의한 인정기적인 정치 구조의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중앙에서의 자력구제를 발발시킨 병란이었다. 그것은 귀족의 무문화(武門化)라는 움직임을 좌절시켰고, 헤이시 정권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됨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지방 무사들도 말려들게 한 대규모 내란의 서곡(序曲)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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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겐페이 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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