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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8 (0) 2016/12/04 PM 01:50

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인척관계 구축

~ 텐분(天文) 20년 7월 25일, 타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는 사쿠 군(佐久郡) 우치야마 성(内山城: 사쿠 시)으로 입성한 가로(家老)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와, 우치야마 성의 성주대리인 오야마다 토라미츠(小山田虎満)에게 토이시쿠즈레(砥石崩れ)로 동요한 사쿠 군의 태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출진 명령을 내렸다. 이에 맞춰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에 대한 전언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키츠나는 어쩌면 이제 막 끝낸 토이시 성에 들어갔으리라 생각된다. 타케다 씨 멸망까지 당번이 되어 지킨다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다. 

 하루노부에게 있어서 유키츠나에 의한 토이시 성 「탈취」는 느닷없는 요행이었다.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려 사쿠 군에서의 세력 확대, 안정시킨다는 목표를 가졌을 것이다. 이 오부 토라마사, 오야마다 토라미츠, 사나다 유키츠나라는 조합은, 이후의 시나노(信濃) 북부 공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系図算要(케이즈산요)』에 따르면, 사나다 유키츠나의 적자인 노부츠나(信綱)의 생모는 오부 토라마사의 딸이었다 한다. 그러나, 노부츠나가 태어난 것은 유키츠나의 타케다 씨 임관 이전이었기 때문에, 사실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듯 하다. 오부 토라마사는 사나다 유키츠나의 사실상의 상사였기 때문에, 자신의 가신인 카와라(河原) 씨의 딸을 측실로 대우하게 하고, 토라마사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토라마사는, 이 시기의 타케다 가문의 필두 가로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중신이었다. 이 일로 인해 유키츠나는 타케다 가문에서의 입장을 굳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다 텐분 22년(1553) 8월 10일, 유키츠나는 자식을 인질로서 코후(甲府)로 보냈다. 이 아이가 바로 셋째 마사유키(昌幸)였으며, 하루노부의 측근으로서 키워지게 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아키와(秋和: 우에다 시)에서 350관문이 주어졌다. 아키와는 본령인 사나다 고(真田郷)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유키츠나는 착실하게 사나다 고 부근에 지반을 쌓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또, 이 문서를 받아서 유키츠나에게 건내준 이는 오야마다 토라미츠였기에, 사나다 유키츠나가 사쿠 군 우치야마 성의 성주대리 오야마다 토라미츠의 관할하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10월 5일에는, 딸을 하루노부의 측근인 나가사카 토라후사(長坂虎房: 쵸칸사이 코켄)의 아들 겐고로 마사쿠니(源五郎昌国)에게 출가시켰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루노부의 허가를 받았거나, 하루노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토라후사는 당시, 시나노 우에하라 성(上原城: 치노 시)의 성주대리로서 스와 군지(諏訪郡司: 군다이)를 겸임한 중신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토라후사의 아들 카츠시게(勝繁)는 하루노부의 적자인 요시노부(義信)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요시노부의 후견인 같은 입장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오부 토라마사였다. 유키츠네는 혼인에 의해 장래의 주군인 타케다 요시노부와의 연결고리를 도모, 타케다 가문에서의 입장을 확실하게 만들려했다.

 다만 이 혼인관계는, 에이로쿠(永禄) 8년(1565) 10월에 타케다 요시노부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발각되었기 때문에(요시노부 사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사건의 책임을 안고 오부 토라마사가 처형 또는 자결했으며, 요시노부는 폐적(廃嫡), 유폐된 끝에 죽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나다 가문에게는 딱히 누를 끼친 흔적은 없다. 그 대신에, 오부 씨, 나가사카 씨와의 혼인관계는, 사다가 가문 공식 역사서인 『真田家御事蹟稿(사나다케고지세키코)』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처음으로 언급이 되었기에, 여기서 『사나다케고지세키코』에 대해 설명해두려 한다. 이 문서는 막말(幕末)의 마츠시로한(松代藩)의 한슈(藩主) 사나다 유키츠라(真田幸貫: 칸세이 개혁을 단행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아들로, 사나다 유키타카의 양자로 들어갔다)의 명령에 의해, 카와하라 츠나노리(河原綱徳)가 편찬한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까지의 역대 당주, 부인에 대한 별전(別伝)이다. 기술 대상은, 정확히 본서의 내용과 겹치며, 본전(本伝)은 유키츠나로부터 노부마사(信政: 노부유키의 차남)까지 이뤄져 있다. 체재는 고문서, 고기록, 군기를 인용, 열기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츠나노리가 간단한 견해를 첨부해둔 것으로, 이미 잃어버린 사료도 다수 수록하고 있다. 본서에서 『○○○殿御事蹟稿』라 기록하는 것은 『사나다케고지세키코』 속의 각 열전을 가르키는 것으로, 유의해 두길 바란다. 노부시게(信繁)도 특별히 입전(立伝)되어 있으며 『左衛門佐君伝記稿』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번거롭기 때문에 『사나다케고지세키코』에 실려있는 인용 사료를 그대로 전거(典拠)로 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 관용을 바란다.   

 

 

 

◇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 오야마다 토라미츠(小山田虎満)는 텐분(天文) 22년(1553)에는 거성인 우치야마 성(内山城)을 벗어나 토이시(砥石)로 입성해 있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토이시 성에는 유키츠나(幸綱)도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타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는 토라미츠에게 이번 출진은 토이시 성 수복 보수를 위함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라 명령을 내린 다음에, 아즈미 군(安曇郡)에서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으로 군세를 전개했다. 요컨데, 기습을 건 것이다.

 압력에 굴복한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는 텐분 22년 3월 9일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葛尾城: 나가노 현 사카키 마치)을 버리고 에치고(越後)로 망명했다. 이 영향은 매우 컸다. 시나노(信濃) 북부의 쿠니슈(国衆)들은 차츰 타케다 씨에게 출사하였고, 하루노부의 우세는 확실해져 있었다. 8월에는 치이사가타 군의 거점 성곽인 시오다 성(塩田城: 우에다 시)이 개성하여 유키츠나의 장인인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가 입성했다. 거기다, 타케다 씨의 세력은 에치고와의 국경 부근으로까지 미쳐, 토라마사는 시나노 북부 일대의 군사지휘를 맡게 된다. 타케다 씨의 시나노 통일은 눈 앞에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에치고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켄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시작으로 하는 시나노 북부의 쿠니슈의 요청을 받아, 시나노로 출진한 것이다. 이후, 타케다, 나가오(우에스기) 두 다이묘는 시나노 북부에서 다섯번에 걸친 공방전... 그 유명한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를 펼치게 된다. 덧붙여, 좁은 의미로서의 카와나카지마는 치쿠마 강(千曲川)과 사이카와(犀川)에 낀 일대(제 4차 전투의 무대가 된 하치만바라가 있는 장소)를 가르키는 지명이지만, 시나노 북부 네개 군(하니시나, 사라시나, 타카이, 미노치)을 가르키는 광역지명으로서도 사용된다.

 하루노부에게 있어서 뼈아팠던 것은, 코지(弘治) 원년(1555)의 제 2차 전투였다. 동맹국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중개로 화친이 성립될 때까지, 대진은 200일에 걸쳐 이어졌다. 타케다 씨는 카와나카지마 방어체제 구축에 몰려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발탁된 이가 오야마다 토라미츠와 사나다 유키츠나였다. 

 코지 2년 8월, 사나다 유키츠나는 오야마다 토라미츠와 함께 카와나카지마의 히가시죠아마가자리 성(東条尼飾城: 나가노 시)을 공격, 재빨리 공략하도록 독촉을 받았다. 이 히가시죠아마가자리 성이, 에이로쿠(永禄) 3년(1560)의 카이즈 성(海津城) 축성까지의 카와나카지마의 타케다 측 거점이 된다. 코지 3년 3월에는 제 3차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시작된다. 정세는 일진일퇴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타케다 씨는 확실하게 카와나카지마의 쿠니슈에 대한 압력을 강화, 항복 혹은 몰락시켜 갔다.

 7월, 하루노부는 오야마다 토라미츠에게 히가시죠(東条) 씨, 와타우치 이노우에(綿内井上) 씨 및 사나다 유키츠나와 연계하여 더욱 더 강한 세력확대를 지시했다. 여기서 유키츠나는 「真田方衆(사나다가 이끄는 집단)」이라 호칭되고 있었기 때문에, 친동생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 등 시게노(滋野) 일족을 지휘하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나가오 카게토라는 9월에 침공을 포기하고 철수, 제 3차 전투는 종료된다.

 이 무렵, 유키츠나는 히가시죠아마가자리 성에 머물렀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10월 27일, 하루노부는 나가오 카게토라가 이이야마 성(飯山城: 이이야마 시)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전해듣고, 히가시죠아마가자리 성의 방어 강화를 지시했다. 에이로쿠 원년(1558) 4월, 하루노부로부터 나가오 카게토라 습격시에 대비한 방어체제가 지시되었다. 유키츠나는, 오야마다 토라미츠와 함께 히가시죠아마가자리 성에서 농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당시, 오야마다 토라미츠는 우치야마 성의 성주대리 겸 사쿠 군지(佐久郡司)라는 입장에서 사쿠 군 키타카타슈(北方衆)를 통솔하에 두고 있었다. 유키츠나도 토라미츠의 지시를 받으며 카와나카지마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허나 의외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나다 씨는 타케다 씨 일변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이로쿠 3년(1560) 11월 13일, 유키츠나는 다른 시나노 쿠니슈와 함께 나가오 카게토라에게 검을 헌상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이는 카게토라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 씨의 가독과 칸토칸레이(関東管領)직의 계승을 쇼군(将軍)으로부터 인정받은 데에 대한 축의라 보인다. 검의 진상자 리스트에는 시나노 북부의 쿠니슈들의 이름이 열거 되어 있으며, 거기에 따르면, 유키츠나는 스스로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 죠에츠 시)으로 간 것(「御太刀持参之衆」)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카게토라는 이때, 칸토로 출진 중이었기 때문에, 직접 면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걸까? 

 즉, 유키츠나 최대의 관심사는 탈환한 사나다 고(真田郷) 유지였지, 타케다 가문의 세력 확대 그 자체가 아니였다. 카게토라가 여러번 시나노 북부로 침공해오는 이상, 타케다 가문이 패배할 경우의 도피처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쿠니슈의 생존방식이었다.

 이해 8월, 카게토라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칸토 침공을 행해,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의 본거지인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오다와라 시)을 포위했다. 카게토라는 무리한 공격은 피하고 카마쿠라(鎌倉)로 군세를 이동했다.

 에이로쿠 4년(1561) 윤 3월, 카게토라는 카마쿠라에서 야마우치 우에스기 씨의 가독과 칸토칸레이직을 물려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때,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로부터 편휘(偏諱)를 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덧붙여, 동년 말에는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로부터 편휘를 받아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고쳤다. 출가하여 후시키안 켄신(不識庵謙信)이라 칭한 것은 겐키(元亀) 원년(1570)이지만, 더 파고들었다가는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라 표기하도록 하겠다.

 켄신은 6월에 에치고로 귀진하긴 하지만, 군세를 쉬게한 것은 아니었다. 8월, 우에스기 세력은 다시 시나노 카와나카지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에이로쿠 원년 12월에 하루노부가 출가)은, 동맹국의 호죠 우지야스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았다. 신겐은 무사시(武蔵) 출병 준비를 보였지만, 결국, 시나노 북부 출병을 선택했다. 직접, 원군을 파견하기 보다도, 켄신의 빈자리를 찌르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켄신의 카와나카지마 출진은, 이에 반격하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매우 유명한 전투지만, 상세한 것은 전혀 알 수 없다. 『甲陽軍鑑(코요군칸)』에 따르면, 에이로쿠 4년 8월말, 신겐은 이미 축성을 끝낸 카와나카지마 지배의 거점이 될 카이즈 성(나가노 시 / 현재의 마츠시로 성)에 들어갔다. 한편, 우에스기 켄신은 사이죠 산(妻女山)에 포진했으리라 여겨진다. 신겐은 군세를 둘로 나눠, 하나는 신겐이 통솔하는 본대, 나머지 하나는 우에스기 세력을 배후에서 공격하는 별동대로 삼았다고 여겨지며, 유키츠나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군기물(軍記物)의 기술이기에, 당일 날씨처럼 진실은 안개 속에 있다. 무엇보다, 유키츠나는 카와나카지마 방어의 중심 인물이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역할이 주어졌을거라 봐도 좋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9월 10일에 두 군세가 격돌했다는 것이다. 타케다군은 신겐의 친동생인 타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 야마모토 칸스케(山本菅助 = 勘助)같은 중신들이 다수 전사했다. 그중에서도 야마모토 칸스케는 카와나카지마 방면의 정보 전달을 담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키츠나와도 관계가 깊었으리라 사료된다.

 이 싸움에서, 신겐은 일절 칸죠(感状: 전공 인정서)를 발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패배했다고 보는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카와나카지마 방어에는 성공했다. 그것은 카이즈 성 축성에 의해, 카와나카지마의 방어체제가 정비되었기 때문이리라. 그후, 에이로쿠 7년(1564)의 제 5차 전투를 끝으로, 카와나카지마에서의 전쟁은 종결된다. 어쨌든 제 4차 전투는, 두 나라에게 있어서 센고쿠 다이묘들끼리의 첫 본격적인 충돌이 되었다. 어쩌면 두 다이묘는, 너무나도 커다란 손해를 본 탓에 크게 놀랐을 것이다. 이 이후, 타케다, 우에스기 두 가문은 전쟁의 무대를 코즈케(上野)로 옮겼지만, 직접 대결을 피하게 된다. 

 

 

 

◇ 코즈케(上野) 서부 침공과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장(城将) 취임

~ 시나노(信濃) 북부 지배를 안정시킨 타케다(武田) 씨가 다음 공략 목표로 삼은 것은 코즈케(上野) 서부였다. 이러한 배경 중 하나로는, 시나노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코즈케 서부를 타케다령(領)으로 만들어 측면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하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에이로쿠(永禄) 4년(1561)에 일어난 아가츠마 군(吾妻郡)의 쿠니슈(国衆) 칸바라(鎌原) 씨와 하네오(羽尾) 씨의 영지분쟁이었다. 타케다 씨는 이 분쟁에 있어서 칸바라 씨를 지원하게 되어, 코즈케 서부 출병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한편, 하네오 씨는 이와시타 성(岩下城: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의 성주 사이토 노리히로(斎藤憲広)가 지원하게 되었다. 사이토 씨의 당시 세력은 구체적인 바는 알 수 없다. 에이로쿠 4년에 작성된 「関東幕注文(칸토마쿠츄몬)」(우에스기 켄신을 따랐던 쿠니슈가 진막에 사용한 가문의 카키아게)에서는 「이와시타슈(岩下衆)」로서 독립된 항목이 만들어져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직후에 낙장이 있다. 다만, 아가츠마 군의 쿠니슈는 오오도 우라노(大戸浦野) 씨, 하네오 씨가 미노와슈(箕輪衆: 미노와 성의 성주인 나가노 나리마사가 이끄는 집단)로 편제되어 있을 뿐이라, 다른 기제는 빠져있다. 따라서, 사이토 씨가 다른 아가츠마 군의 쿠니슈를 통제하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가볍게 볼 수 없는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아가츠마 군 공략에서,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가 맡았던 역할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칸바라 씨와 하네오 씨, 오오도 우라노 씨는 모두 같은 시게노(滋野) 일족이다. 그런 데다, 칸바라 유키사다(鎌原幸定: 쿠나이노쇼우 시게즈미의 조부)는 사나다 유키츠나의 동생이라는 전승이 있다. 유키츠나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을리 없었을 것이다.

 익 에이로쿠 5년 5월, 칸바라 시게즈미(鎌原重澄)가 우라노 나카츠카사노쇼우 신라쿠사이(浦野中務少輔真楽斎)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은 같은 시기에 우에스기(上杉) 편에 서있던 코즈케의 여러 성으로 군세를 움직였다. 이는 적의 수확에 타격을 주기 위함으로, 수확기의 보리를 잘라내고, 수전(水田)의 못자리를 베어넘기며 다녔다. 당연히, 반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운노(海野), 네즈(禰津), 사나다 세 가문에게 교대로 칸바라 성(鎌原城)에 대한 수비를 파견하도록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이 세 가문 모두 시게노 일족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에이로쿠 6년 10월 13일, 이와시타 성의 성주 사이토 노리히로의 조카인 야자부로(弥三郎)와, 운노 나가토노카미 유키미츠(長門守幸光), 노토노카미 테루유키(能登守輝幸) 형제가 모반을 일으켜 타케다 씨를 배신했다. 누마타 한(沼田藩) 사나다 가문의 유신(遺臣)이 기록한 군기물(軍記物) 『加沢記(카자와키)』에 따르면, 이 모반을 유도한 것은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와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의 쿠니슈인 무로가 미츠마사(室賀満正)였다고 한다. 역시나 사나다 씨는 시게노 일족이 전개한 아가츠마 군 공략에 관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아가츠마 군 지배가 사나다 씨에게 맡겨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나다 유키츠나는 에이로쿠 7년 5월 1일에 코즈케 쿠라가노(倉賀野: 군마 현 타카사키 시)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시타 성 공략 이후, 타케다 신겐은 새로운 아가츠마 군 지배의 거점 구축을 진행시켰다. 그것이 이와비츠 성(岩櫃城: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이다. 지리적으로는 근접해 있지만, 규모는 이와시타 성과 비교할 수 없으며, 또 죠카마치(城下町)를 정비하는 것이 가능한 장소였다. 덧붙여 『카자와키』는, 이와시타 성과 이와비츠 성이 다른 성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이와시타 성을 전부 이와비츠 성으로 오기(誤記)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카자와키』는, 누마타 한 사나다 가문의 유신의 저작물이기 때문에,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누마타 한시(藩士)들 중에는 아가츠마 군의 거점 성곽이라 하면 이와비츠 성 밖에 몰랐을 것이다.

 이와비츠 성의 확실한 초견은, 에이로쿠 8년(1565) 3월 13일이다. 이날, 시나노의 쿠니슈 키요노 교부자에몬노죠(清野刑部左衛門尉)가 사나다 잇토쿠사이(一徳斎)의 지도를 받으러 이와비츠 성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덧붙여, 이것이 유키츠나의 재호(斎号)인 잇토쿠사이가 처음 발견되는 사료이며, 이때 이미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년인 에이로쿠 7년 11월에는, 사나다 유키츠나가 밀서로 신겐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것은, 코즈케의 쿠니슈인 안나카 시게시게(安中重繁)가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내통하여 마츠이다 성(松井田城: 안나카 시)을 빼았을 계책을 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키츠나가 코즈케에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 없으며, 이와비츠 성은 에이로쿠 연 중에 축성되고, 사나다 유키츠나가 입성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아직 「真弾」이라 나와있기 때문에(사나다 단죠노츄의 약칭), 유키츠나의 출가는 에이로쿠 7년 11월에서 익년 3월 사이로 압축할 수 있다. 이러한 표기는, 출가한 인물에게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로쿠 8년은, 사나다 잇토쿠사이에게 있어서 아가츠마 군 지배 수완을 시험받는 시기였다. 우라노 나카츠카사노쇼우 신라쿠사이가 타케다 씨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이는 이해 초두에 사이토 야자부로가 배신하고 우에스기 켄신에게 종속, 타케야마 성(嵩山城: 군마 현 나카노죠 쵸)에서 농성을 한 것과 연동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을까? 

 동년 9월 12일, 사나다 잇토쿠사이는 익일에 우라노 씨와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문서는 매우 흥미롭다. 진각(辰刻: 오전 8시경)에 개전을 치른다는 보고를 들은 신겐은, 그건 너무 이르다며 유상각(酉上刻: 오후 5시경)에 개전하라 명했다. 그 이유는, 이 일전은 중요했기 때문에, 저녁 때까지 가능한 한 조략(調略)을 행하고, 그 다음에 출진 시각을 다시 결정하라... 라는 의미였다. 신겐이 지정한 시각은, 아침에 개전을 한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상식으로 따지면 이상할 정도로 늦다. 그만큼 잇토쿠사이의 조략 수완을 높히 사고 있었음과 동시에, 오오도 우라노 씨를 가능한 한 온건하게 항복시키려 했을 것이다. 우라노 씨는, 일찍부터 타케다 씨에 종속된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잇토쿠사이는 승리하리라 봤지만, 우라노 씨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잇토쿠사이는 일단 타케야마의 사이토 씨로 표적을 정하고 가로(家老)인 이케다 사도노카미(池田佐渡守)를 배신케 해 야자부로를 몰락시켰다. 덧붙여, 사도노카미의 아들인 나가토노카미(長門守)는 이 이후에 사나다 씨의 중신이 된다. 실명(実名)은 츠나시게(綱重)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사나다 유키츠나 혹은 노부츠나로부터 편휘(偏諱)를 받았을 것이다.

 11월, 타케다 가문의 중신인 히나타 토라아키(日向虎顕)는 이와비츠 성에 머무를 것을 명령받아, 잇토쿠사이와 함께 오오도 우라노 씨 귀속을 위한 조략을 명령받았다. 켄신의 코즈케 출병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왔기에, 우라노 씨 복속이 급선무였다. 이 이후, 우라노 씨는 타케다 편으로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 조략은 성공했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사나다 씨는 다시 아가츠마 군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잇토쿠사이는 아가츠마 군 지배의 모든것을 맡았던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 권한은 군사지휘권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군사지휘권만을 위임받은 성주를, 행정권이 주어지고 있는 「성주대리」와 구별하기 위해 「성장(城将)」이라 부른다.

 에이로쿠 10년(1567) 3월에 코즈케 시로이 성(白井城: 시부카와 시)을 공략했다. 신겐이 「以不慮之仕合(뜻밖의 경위로)」라 말하고 있을 정도기 때문에, 조략에 의한 공략이었음에 틀림 없다. 이 무렵, 시나노 카이즈 성(海津城)의 성주대리인 카스가 토라츠나(春日虎綱)가 일시적으로 미노와 성에 머물 것을 명령받았다. 신겐은, 자신이 미노와에 도착한 뒤부터 보수나 영지 분할에 관련된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토라츠나와 담합하여 우에스기 편인 누마타의 동정에 대해 보고하도록 잇토쿠사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때의 잇토쿠사이의 소재는 판단할 수 없지만, 공략한 시로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잇토쿠사이는, 그후에도 적자인 노부츠나와 함께 이와비츠 성에서 계속해서 머물렀으며, 신겐을 통해 스루가(駿河) 공략의 상황을 기록한 서장을 보내고 있다. 그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나다 가문의 당주였다고 이해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시로이 성을 함락시킨 에이로쿠 10년 무렵, 가독(家督)을 노부츠나에게 물려주었다.

 그후, 타케다 신겐이 죽은 다음해... 즉, 텐쇼(天正) 2년(1574)에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타케다 가문의 가독을 계승한 카츠요리(勝頼)는 잇토쿠사이의 병상을 배려하여 시의(侍医)인 교코켄 소케이(僥倖軒宗慶: 이타사카 호인)를 파견하여 치료를 받게했다. 한때, 소강상태에 이르긴 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텐쇼 2년 5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예순둘. 법명(法名)은 겟포료신안슈(月峯良心庵主)였다.

 카츠요리는, 5월 28일자로 병상회복을 기뻐하는 답장을 노부츠나에게 보냈지만, 그때는 이미 잇토쿠사이는 죽은 뒤였다. 사나다 가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쵸코쿠지(長谷寺: 우에다 시 사나다 쵸)에 매장되어, 본 사찰의 뒤에 아내인 카와라(河原) 씨와 나란히 묘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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