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인질신분에서의 출세
~ 텐분(天文) 22년(1553) 8월 10일,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는 자식을 인질로 코후(甲府)로 보냈다. 이 소년이 바로 사나다 겐고로(真田源五郎)... 후의 마사유키(昌幸)였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마사유키는 텐분 16년(1547)에 출생했기 때문에, 세는 나이로 불과 일곱살. 유감스럽게도 아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타케다(武田) 가문에 있어서는 킨쥬(近習)로서 신겐(信玄)을 모셨던 듯 하다. 초진(初陣)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甲陽軍鑑(코요군칸)』은 에이로쿠(永禄) 4년(1561)의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에서 본진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열다섯살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타당한 선이었으리라.
『코요군칸』을 보면, 소네 마사타다(曾禰昌世), 사이구사 마사사다(三枝昌貞)와 함께 셋이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에 츠치야 마사츠구(土屋昌続)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신겐의 훈도(薫陶) 아래에서 장래의 타케다 가문을 짊어질 존재로서 육성되었다 할 수 있다. 특히 마사유키와 소네 마사타다, 사이구사 마사사다는 「신겐의 두 눈」이라 불리웠으며, 신겐 자신이 그 자리에 가지 않아도,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처럼 상황분석의 재료를 적확하게 보고했다고 칭찬하고 있다(『甲陽軍鑑』).
이 네 사람은 각각 타케다 가문 중신들의 가명을 이었다. 소네 마사타다는 본래 소네 씨의 서류(庶流) 가문이었다 여겨지는데, 적류(嫡流) 가문으로서 대우를 받았던 듯 하다. 사이구사 마사사다는, 요리오야(寄親: 전쟁이 일어날 시에 배속되는 상사)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로부터 「야마가타」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아 야마가타 젠에몬노죠(山県善右衛門尉)로 개명했다. 야마가타 씨는 타케다 가문의 슈쿠로(宿老) 가문이며, 마사카게는 신겐의 오른팔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츠치야 마사츠구는 본래 카네마루 마사츠구(金丸昌続)였는데, 역시나 타케다 가문의 중신인 「츠치야」 성을 계승하고 있다.
특필할 만한 이는 사나다 마사유키로, 타케다의 신루이슈(親類衆: 서류 가문)인 무토(武藤) 가문을 잇고 있다. 무토 가문은 명문이긴 했으나 잦은 단절 때문에 그럴 때마다 카이(甲斐) 니시코오리(西郡)의 쿠니슈(国衆) 오오이(大井) 가문으로부터 양자를 들였었다. 오오이 가문은 신겐의 모친 쪽 가문으로, 타케다 신루이슈로서의 가격(家格)은 무토 가문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 오오이 일문을 눌러버리는 형태로, 마사유키는 무토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무토 키효에노죠 마사유키(武藤喜兵衛尉昌幸)를 칭했다. 신겐이 마사유키에게 건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마사유키가 센보슈(先方衆: 토자마계 쿠니슈)의 자식이 아니라, 타케다 가문의 후다이(譜代) 가신으로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는 타케다 가문의 행정기구로 들어갔으며, 부교닌(奉行人: 이른바 고급 관료)으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부친인 유키츠나나 형인 노부츠나(信綱)와 달리, 타케다 가문의 주인장(朱印状)의 봉자(奉者)로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타케다 가문의 발급 문서는, 용주인장(龍朱印状)을 기본으로 한다. 그 용주인장에 「誰々奉之(이를 받들겠사옵니다)」라며 담당자(봉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봉서식 주인장(奉書式朱印状)이라 부른다. 봉서라는 것은, 주군의 명령을 가신이 대신 전달하는 문서 양식을 가르킨다. 주인장은 다이묘(大名)인 신겐, 카츠요리(勝頼)가 발급하는 것이지만, 담당자의 기재가 있기 때문에, 가신이 다이묘의 명령을 전한다는 의미로 「봉서식」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 봉서식 주인장에 마사유키의 이름이 발견되는 게 무토 가문을 상속한 이후의 일이었다. 신겐 만년 무렵의 진용(陣容)을 보여준 것이라 여겨지는 『코요군칸』 「甲州武田法性院信玄公御代惣人物数事」에도 「신슈 센보슈(信州先方衆)」인 형 노부츠나, 마사테루(昌輝)와는 별도로, 「오하타모토아시가루타이쇼슈(御旗本足軽大将衆)」로서 기재되어 있다.
텐쇼(天正) 3년(1575) 5월,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형인 노부츠나와 마사테루가 전사했다. 노부츠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던 듯 하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는 무토 가문을 떠나, 사나다 가문의 가독(家督)을 잇게 된다. 사나다 키효에노죠 마사유키의 탄생이다. 노부츠나, 마사테루의 남겨진 영지 1만5천관문을 상속했다고 한다. 가독 상속 이후의 마사유키의 행동을 보면, 코즈케(上野) 시라이 성(白井城)의 성주대리를 맡았던 듯 한데,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장(城将)이라는 지위도 계승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마사유키의 가독 상속은, 사나다 가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게 된다. 사나다 유키츠나, 노부츠나 시대의 사나다 가문은, 타케다 가문에게 있어서 센보슈(토자마 쿠니슈)였다. 하지만, 새롭게 가독을 상속한 마사유키는 타케다 신루이슈인 무토 가문을 이었기에, 후다이 가신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사나다 가문 그 자체가 센보슈에서 후다이 가신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버렸다.
이는 타케다 가문 안에서 토자마(外様)에서 후다이 가신으로 변모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사유키는 타케다 가문 가로(家老)로서의 길을 걸어나가게 된다. 종래에 「토자마」인 사나다 가문에게 맡겨졌던 것은 군사 지위권에 지나지 않았지만, 후다이 구성원에 들어간 뒤부터는 행정권도 위양받았을 가능성이 나오게 된다. 시로이령을 「성주대리」로서 맡았던 게 그 일례이다.
이 영향은 동생인 겐지로 마사하루(源次郎昌春)에게도 미쳤다. 마사하루는 에이로쿠 12년(1569) 11월, 스루가(駿河) 후쿠자와 성(深沢城: 고텐바 시) 공격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이 성을 수비하고 있던 호죠 츠나시게(北条綱成)는, 호죠 가문에서도 특필할만한 명장이었지만, 타케다 씨의 공세를 앞에 두고 성을 버려둔 채 퇴각했다. 이 싸움에서, 겐지로 마사하루는 큰 공을 세웠던 듯 하다. 패주하는 츠나시게가 떨어뜨린 키하치만(黄八幡: 황색 바탕에 「八幡」이라 검은 묵으로 써넣은 깃발) 깃발을 받았다. 마사하루의 가문이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단절되었기 때문인지, 이 깃발은 사나다 본가(마츠시로 한 사나다 가문)에서 전해지게 되었고, 현재는 사나다 보물관(나가노 시)에서 소장하고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카즈노 이치에몬노죠(加津野市右衛門尉)가 전사한 뒤, 타케다 카츠요리의 명령으로 마사하루의 아들 데와(出羽)가 카즈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카이즈 가문도 타케다 신루이슈였기 때문에, 이것만 해도 놀라운 처우였다. 그런데다, 데와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의 일시적 처치로서 마사하루가 카즈노 마사하루를 칭하게 되면서 카즈노 가문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인물을 두고 「진다이(陣代)」 혹은 「묘다이(名代)」라 한다. 카츠요리 역시, 사나다 형제에게 눈을 돌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나다 마사하루... 즉, 카즈노 마사하루도 이 이후에 봉서식 주인장의 봉자를 맡게 되었다.
◇ 정실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의 출신
~ 마사유키(昌幸)의 정실(正室)은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 칸쇼인덴)라 불리운다. 출신은 확실하지 않으며, 사나다(真田) 가문의 정사(正史)인 『寒松院殿御事蹟稿(칸쇼인덴고지세키코)』에서도 다양한 설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① 쿠게(公家)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晴季)의 딸(『滋野世紀』 『真武内伝』의 일설, 『取捨録』 『樋口系図』), ② 쿠게 오오기마치 사네히코(正親町実彦)의 조카딸이자 키쿠테이 씨의 양녀(『滋野世紀』의 일설), ③ 오오기마치 씨의 딸이자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양녀(『綱徳家記』), ④ 우다 요리타다(宇多頼忠)의 딸이자 이시나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처제(『真武内伝』의 일설, 『諸家高名記』), ⑤ 우다 요리츠구(宇多頼次)의 딸(『真田秘伝記』), ⑥ 타케다 가문의 가신인 토오야마 우마노스케(遠山右馬亮)의 딸(『沼田記』 『続武家閑談』)이 된다.
대략적으로, 키쿠테이 하루스에 또는 오오기마치 씨의 딸(①~③), 우다 씨의 딸(④, ⑤), 타케다 가문의 가신인 토오야마 우마노스케의 딸(⑥)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혼인 시기이다. 마사유키의 적자인 노부유키(信幸: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로 개명)의 탄생은 에이로쿠(永禄) 9년(1566)이고, 생모는 야마노테도노였다. 또 노부유키의 누이인 무라마츠도노(村松殿)에 대해 『加沢記(카자와키)』는 텐쇼(天正) 10년(1582)에 열여덟살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에이로쿠 8년생이 된다. 무라마츠도노도 야마노테도노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에이로쿠 7년 무렵까지는 결혼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해 마사유키의 나이는 열여덟살이기 때문에, 당시의 결혼 연령으로 보자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타케다 신겐의 킨쥬(近習)에게 쿄토(京都)의 쿠게의 딸이 시집을 갈 수 있을까?
이 점을 검토해보기 전에, 먼저 우다 씨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명백하게 와전(誤伝)된 것이다. 이야기는 사실 정 반대라, 사나다 마사유키의 딸인 쵸슈인덴(趙州院殿)이 우다 요리타다의 아들인 요리츠구에게 시집을 갔다(『石田系図』 『滝川十次郎家記』). 우다 요리타다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친인 마사츠구(正継)의 양자(猶子: 양육 유무와 관계 없이 정략 결혼이나 정치적 관계 강화를 위해 유사적으로 친자관계를 맺은 양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시다 교부노쇼우(石田刑部少輔)라 칭한적도 있었다 한다. 쵸슈인덴은 케이쵸(慶長) 5년(1600)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이시다 씨가 멸망한 뒤, 하타모토(旗本)인 타키가와 카즈아츠(滝川一積: 카즈마스의 손자)에게 재가했다(『長国寺殿御事蹟稿』). 그리고 우다 요리타다의 딸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출가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일련의 인척관계가 오해를 받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토오야마 우마노스케는 『甲陽軍鑑(코요군칸)』에 아시가루타이쇼(足軽大将)로 이름이 발견되는 무사로,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사유키와 가장 가깝다. 하지만 『滋野世紀(시게노세이키)』는, 유키츠나(幸綱)의 딸(즉, 마사유키의 여자 형제)이 「토오야마 사마노스케(遠山左馬介: 우마노스케의 오기일지도)」에게 출가했다고 나와있다. 또, 『真田軍功家伝記(사나다군코케덴키)』는, 마사유키의 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의 딸이 토오야마 우마노스케에게 출가했다고 하는 설을 기록하고 있다. 『코요군칸』에서의 토오야마 우마노스케(나중에 탄바노카미를 칭하게 된다)의 활약을 통해서 보면, 유키츠나의 딸이 우마노스케에게 출가했다는 것이 사실이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①②③이다. 일찍부터 지적받아왔던 것 처럼, 텐쇼 8년(1580)에 죽은 사나다 유키츠나의 아내 오키타(於北)에 대한 기재가 있다는 것 등의 상황 때문에, 텐쇼 6~7년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나다 씨의 검지장(検地帳)이 존재한다. 종래에는 『小県郡御図帳(치이사가타군미즈쵸)』라 불리운 사본이 알려져 있었고, 근년에 『真田氏給人知行地検地帳(사나다시큐닌치교지켄치쵸)』라고 하는... 보다 원본에 가까운 사본이 발견되었다(유감스럽게도, 종이의 질이나 필적을 통해서 보면 원본이 아니다). 거기에 「京之御前様(쿄의 고젠사마)」라는 기재가 있는데, 이것은 확실히 야마노테도노를 가르키고 있다.
이렇게 나와있는 이상, 야마노테도노는 쿄에서 온 여성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각색이 있었던지간에 쿄 출신 여성임은 확실할 것이다. 타케다 씨 멸망 이후에 쿄 출신의 여성이라 각색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나다시큐닌치교치켄지쵸』의 성립이 텐쇼 6~7년 무렵인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키쿠테이 하루스에의 딸이나 오오기마치 씨의 딸처럼 쿠게 출신인 여성이 신겐의 킨쥬이자 쿠니슈(国衆)의 셋째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던 에이로쿠 시기의 마사유키에게 출가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애당초 키쿠테이 하루스에는 마사유키가 봤을 때 여덟 살 연장자, 오오기마치 사네히코는 한 살 연하이기에, 요컨데 마사유키와는 비슷한 세대이다. 따라서, 타케다 신겐의 정실(正室)인 산죠(三条) 씨의 관계자 등... 쿠게와 연관된 시녀를 아내로 삼았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
덧붙여, 사료상에서 키쿠테이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많이 기록된 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딸이 키쿠테이 하루스에에게 출가했기 때문에, 타케다 가문과 키쿠테이 가문이 친척사이였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카이(甲斐)에서 추방당한 타케다 노부토라가 상경하여 에이로쿠 3년(1560)에 막내딸을 하루스에에게 출가시킨 결과였지, 마사유키가 아내를 맞이했던 당시의 타케다 시겐과 키쿠테이 가문의 연결고리가 깊었다고 보기는 꽤 수상쩍다.
또 하나, 렌게죠인(蓮華定院) 『真田御一家過去帳(사나다고잇케카코쵸)』에 따르면, 야마노테도노는 「武田信玄公養子(타케다 신겐의 양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타케다 씨 멸망 이후에 사나다 마사유키가 자신을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로 자리잡게 하기 위한 선전 공작이었을 것이다. 신루이슈(親類衆) 무토(武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는 해도, 마사유키가 신겐의 데릴사위로서 대우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덧붙여, 쿠게의 딸이라면 신겐의 양녀 대우로 마사유키에게 시집갈리가 없어(바꿔 말하면 가격이 내려가버린다), 수많은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마사유키의 정실인 야마노테도노는 쿠게의 시녀 출신일 개연성이 높으며, 타케다 씨 멸망 이후에 신겐의 양녀로 각색되었으리라 생각해 두고 싶다. 『사나다시큐닌치교지켄치쵸』 에는 지행지로서 147관 2백문이 기록되어 있다. 덧붙여 『칸쇼인덴고지세키코』는, 인문(印文) 「조동(調銅)」 주인(朱印)을 야마노테도노의 것이라 하는데, 이는 마사유키가 사용한 주인이었을 것이다. 다만, 야마노테도노의 시녀라 여겨지는 인물이 주인장의 봉자(奉者)가 되어 있는 사례가 있어, 문서 발급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있다. 야마노테도노는 케이쵸 18년(1613) 6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법명(法名)은 칸쇼인덴호게츠묘칸다이시(寒松院殿宝月妙鑑大姉)이다. 어떤 인연이었는지, 마사유키의 3주기 전날의 사망이었다.
덧붙여 『사나다고잇케카코쵸』는, 칸에이(寛永) 11년(1634) 2월 7일에 죽었다고 기록하지만, 신용하기 어렵다. 청서(清書)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물과 혼동했을 것이다. 야마노테도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다이린지(大林寺: 나가노 시)의 묘석에는 케이쵸 18년에 죽었다고 새겨져 있어, 사나다 씨의 마츠시로(松代) 전봉(転封) 때에 그녀가 발원개기(発願開基)한 다이린지(大輪寺: 우에다 시)로부터 묘를 이장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