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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4 (0) 2016/12/07 PM 01:54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타케다(武田) 가문 멸망

~ 텐쇼(天正) 10년(1852) 정월,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의 배신을 계기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군세가 드디어 시나노(信濃) 침공을 개시했다.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는 요시마사 토벌을 위해 스와(諏訪)로 출진하지만, 센슈(先衆: 선봉)가 토리이 고개(鳥居峠)에서 패주했을 뿐만 아니라, 스루가(駿河) 방어를 맡겨놓았던 고이치몬슈(御一門衆) 아나야마 바이세츠 노부키미(穴山梅雪信君) 모반이라는 경악할 보고를 듣고 신푸 성(新府城)으로 귀환한다.

 오다군을 지휘하던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기세는 대단해서, 시나노 남부의 성곽들은 대부분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개성, 항복했다. 시나노에서는, 2월 2일에 카츠요리의 동생인 니시나 노부모리(仁科信盛)가 타카토오 성(高遠城: 이나 시)에서 오다 노부타다와 맞서 싸웠던 게 유일한 조직적 저항이었다. 그런 타카토오 성도 불과 하루만에 함락, 타케다 가문은 오다세력의 카이(甲斐) 침공을 기다리기만 하는 상황에 몰렸다. 

 하지만, 신푸 성은 아직 미완성(『코요군칸』은 「절반만 완성」이라 기록한다)이었기에 농성에 견딜 수도 없었다. 그러던 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자신의 거성인 이와비츠 성(岩櫃城)으로의 피난을 카츠요리에게 제안했다고 한다(『甲陽軍鑑』). 카츠요리는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노신인 나가사카 코켄(長坂光堅: 쵸칸사이)이 「사나다는 아직 후다이(譜代)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사옵니다」라고 진언했기 때문에 중지,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가 가진 성인 이와도노 성(岩殿城: 오오즈키 시)으로의 피난이 결정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오야마다 노부시게도 모반하여 사사고 고개(笹子峠)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카츠요리는 3월 11일에 타노(田野: 코슈 시)에서 자결, 타케다 가문은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실제로, 마사유키가 이런 제안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거기다 『加沢記(카자와키)』는, 마사유키의 진언을 뿌리친 것을 마음 아파한 카츠요리가 인질이 되어 있던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를 불러 귀국을 허락했다고 한다. 다만 성립이 텐쇼 10년 8월로 빠른, 비교적 신빙성 높은 군기물(軍記物) 『甲乱記(코란키)』에는, 마사유키의 진언에 대한 기재가 없다는 점은 부기(付記)해 둔다.

 3월 6일, 마사유키는 숙부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에게 거성의 방비를 강화하라 지시했다. 성이 있던 영역인 「우스네(臼根: 누마타 시)」를 자유롭게 분배하고 공을 세운 자를 불러 모으라... 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요리츠나가 있었던 곳은 누마타였을 것이다. 이 뿐만이라면 이와비츠 농성에 대비해 움직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카츠요리가 자결한 다음날인 3월 12일, 마사유키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의 숙부인 우지쿠니(氏邦)로부터 서장을 받았다. 사실 마사유키는 이미, 시라이 나가오 노리카게(白井長尾憲景)를 통해 호죠 씨에게 종속을 타진하고 있었으며, 본격적인 교섭으로 이행한 것이 본 서장이었다. 따라서, 마사유키는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기 전에, 새로운 종속처를 모색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타케다 가문 멸망의 때에는, 키소 요시마사, 아나야마 노부키미, 오야마다 노부시게와 쿠니슈(国衆)의 모반이 연이어졌는데, 이것을 「배신」이라 평가하는 것은 단면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적국으로부터 보호하는 군사력을 타케다 가문에게 기대할 수 없게 된 이상, 그들 쿠니슈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가문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 마사유키도 쿠니슈로서 최종적으로는 타케다 가문을 따르는 것 만으로는 자신의 가문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호죠 가문의 지원을 얻어 카츠요리를 지지하려고 모색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점의 호죠 가문은 이미 오다 정권에 종속을 표명하고 있었기에, 호죠 가문의 지원에 의해 노부나가에 대항하려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코요군칸』의 묘사처럼, 아름다운 주종관계는 환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코요군칸』이 완성된 겐나(元和) 7년(1621)에 다이묘(大名)가 되어 있던 사나다 가문을 배려한 기술로 이뤄졌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사나다 가문은 시라이 나가오 씨와 전쟁을 펼친 경위가 있었기에, 마사유키가 나가오 노리카게를 통해 호죠 씨에게 종속을 타신했다는 점은 기묘하게 비친다. 어쩌면 시라이 성(白井城) 함락 당시의 개성 교섭 등을 통해서, 파이프가 되는 인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또, 시라이 나가오 씨에게 있어서는, 숙적인 사나다 씨를 항복시키는 것은, 호죠 씨에 대한 커다란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오다(織田) 정권으로의 종속

~ 텐쇼(天正) 13년(1585) 8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히라이와 치카요시(平岩親吉)를 타이쇼(大将)로 삼아 사나다(真田)령 우에다(上田)로 군세를 파견한다. 칸가와 전투(神川の合戦: 일명 제 1차 우에다 전투)이다. 이하, 동시대 사료와, 이 전투에 참진한 무로가 미츠토시(室賀満俊)의 『室賀満俊覚書(무로가미츠토시카쿠쇼)』,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의 『三河物語(미카와모노가타리)』, 그리고 『寛永諸家系図伝(칸에이쇼케케이즈덴)』을 사용해 서술해 보고 싶다. 덧붙여, 일부 『上田軍記(우에다군키)』의 기술을 출전(出典)을 명기한 다음에 보충하도록 하겠다. 이 군기(軍記)의 성립 연대는 불명확하지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차남의 실명을 정확하게 「노부시게(信繁)」라 기록하고 있어, 성립이 일렀던 듯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소개해 둔다.

 마사유키가 재빠르게 네즈(禰津: 토미 시)에서 군세를 일으켰기 때문에, 토쿠가와세는 네즈 주변에 포진했다. 보고를 받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시나노(信濃) 북부의 쿠니슈(国衆)에게 진을 정비할 것을 명령, 통상적으로는 동원대상이 될 수 없는 열다섯살 이하의 소년과 예순살 이하까지였기 때문에, 꽤 이례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정확히 이때, 카게카츠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호응하여 엣츄(越中)의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어, 시나노 북부의 쿠니슈의 군세는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처치를 취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원군은, 카이즈 성(海津城)의 성주대리 스다 미츠치카(須田満親)의 명령에 의해 8월말에는 마가리오(曲尾: 우에다 시 사나다 쵸)로 들어갔다.  

 기세가 오른 토쿠가와 측은 우에다 성(上田城)을 급습, 니노쿠루와(二の曲輪)까지 돌입했다. 『真田家御事蹟稿(사나다케고지세키코)』에 첨부된 「上田城古図(우에다죠코즈)」의 기술을 믿어본다면, 당시의 우에다 성에는 산노쿠루와(三の曲輪)는 없었기 때문에, 성문을 돌파하면 바로 니노쿠루와가 나오게 된다. 남은 것은 혼마루(本丸) 뿐이었기에, 누구의 눈에도 토쿠가와 쪽의 승리로 보였다. 하지만 『우에다군키』 등의 군기물류에 따르면, 이는 마사유키의 함정이었다 한다. 

 니노쿠루와까지 공격해 온 토쿠가와세였지만, 거기서 언쟁이 벌어졌다. 오오쿠보 타다요의 동생인 타다타카가 성에 불을 지르려하자, 시바타 야스타다(芝田康忠)가 성안으로 들어간 아군들까지 위험해진다며 각하한 것이다. 토쿠가와군은 일단 물러나 태세를 정비하려했지만, 그때 혼마루로부터 사나다군이 치고 나왔다. 타다타카는 『미카와모노가타리』에서 「(혼마루의 문에) 불을 질렀다면 적은 나오지 못했을 것을」하며 애석해하고 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우에다군키』에 따르면, 성 밖으로 달아난 토쿠가와군에게는 마사유키가 걸어둔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먼저 죠카마치(城下町: 저자마을)에는 서로 방향이 다른 방책이 배치되어 있어, 토쿠가와군은 즉시 퇴각하지 못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해 혼란해 있는 틈을 노려, 마사유키는 죠카마치에 스스로 불을 질렀다. 거기다 주변 산으로 피신시킨 백성들에게 종이로 만든 깃발을 세우게 해, 함성소리를 울려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착각하게 만들어 패닉상태로 내몰았다 한다. 이 『우에다군키』의 기술이 어디까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사유키가 백성들을 동원하여 「총력전(総力戦)」이라는 대응을 했던 것 만큼은 사실이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퇴각에 성공한 토리이 모토타다의 옆을 토이시 성(砥石城)에서 출격한 군세가 급습했다. 이 결과, 토쿠가와군은 치쿠마 강(千曲川)의 지류(支流)인 칸가와(神川)까지 내몰렸다.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 마사유키의 적자)가 윤 8월 2일에 코쿠분지(国分寺)에서 충돌, 토쿠가와 쪽 1300여기를 토벌하며 대승을 거뒀다는 것은 이 전투였을 것이다. 근세의 군기물류에서는, 토이시 성에서 출진한 것은 사나다 노부유키라 여겨지고 있다. 토쿠가와 쪽의 피해에 대해 『미카와모노가타리』는 300여기라 한다. 쌍방이 주장하는 전사자의 수에 차이가 나는 것은 자주 있는 경우이긴 하지만, 『우에다군키』는 참진한 토쿠가와군을 7000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노부유키의 서장은 상당한 과장이 있었을 것이다. 오오쿠보 타다타카는 「술이 약한 자에게 술을 강요하는 듯한 한심한 모양이었다」며 자군의 한심스러움을 혹평하고 있다. 

 패주하는 토쿠가와군을 더욱 더 큰 불운이 엄습한다. 칸가와를 건너려하자, 갑자기 수량이 늘어 모조리 휩쓸려버린 것이다(『上田軍記』). 이는 『真武内伝(신부나이덴)』 등의 다른 군기물에서는, 마사유키가 사전공작을 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어서, 마사유키는 오노산 성(尾野山城: 우에다 시)에 포진한다. 일찍이 운노타이라 전투(海野平の戦い)에서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가 거점으로 삼았던 성곽이다. 이 땅에서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다. 한편, 토쿠가와군은 익 3일에 마루코 성(丸子城: 우에다 시 마루코)을 공격했지만, 이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토쿠가와군은 그대로 마루코 성에 당번부대를 붙였다.

 윤 8월 20일,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는 반격에 나서, 토쿠가와군이 진을 친 마루코 성을 급습했지만, 이번에는 선발부대를 이끄는 오카베 나가모리(岡部長盛: 타케다의 옛 가신, 스루가슈)에 의해 격퇴당한다. 제 1차 우에다 전투에서의 토쿠가와 측의 유일한 승리였다. 같은 날, 이에야스는 이나 군(伊那郡)의 쿠니슈에게, 사나다를 「네기리(根切り)」... 즉, 근절을 위한 출진을 명령했다. 토쿠가와군은 코모로 성(小諸城: 코모로 시)으로 물러났지만, 재출병은 시간 문제였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 마사유키는 정보전으로 대항했다. 9월에 들어서자,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원군이 파견되었던 것, 그리고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차남인 류호(龍芳)와 그의 아들인 켄료 도카이(顕了道快)를 카이(甲斐)로 입부시킬 것이라는 소문을 선전하도록 했다. 실제로 류호는 타케다 씨 멸망 당시에 자결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미카와모노가타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이 돌아다녔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포시킨 인물은, 마사유키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를 원군으로 파견했지만, 이는 아무래도 안전한 철수를 하기 위한 준비였던 듯 하다(『寛永諸家系図伝』).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언제 본격적인 원군을 파견할지 알 수 없어, 철수전을 신중하게 치르려 했으리라 보인다.

 이 철수는 마사유키를 오히려 당혹스럽게 만들었는데, 실은 토쿠가와 가문을 뒤흔든 대사건이 배경에 있었다. 11월 13일, 이에야스의 중신인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数正: 야스테루)가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 망명한 것이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와 함께 이에야스의 오른팔로서 영지 지배를 맡아왔던 인물로, 이 시기는 미카와(三河) 오카자키 성(岡崎城: 오카자키 시)의 성주대리를 맡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은, 일찍이 이에야스의 본거지로, 미카와 서부 지배의 거점이었다.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돌아서버린 요인으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관계 악화들 들 수 있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히데요시에 대한 토리츠기(取次: 교섭 책임자)로서 관계 개선에 힘을 쓰고 있었지만, 토쿠가와 가신단의 생각은 히데요시와의 결전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카즈마사는 토쿠가와 가문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시난(指南: 쿠니슈에 대한 토리츠기역)」으로서 통제하에 두고 있던 시나노의 쿠니슈 오가사와라 사다요시(小笠原貞慶)가 히데요시와 내통했다. 이 일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 안에서의 카즈마사의 입장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그래서 카즈마사는 히데요시의 꼬임에 넘어가 오가사와라 사다요시의 인질을 데리고 히데요시에게 망명할 것을 선택한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사실상, 토쿠가와 가문 넘버3라는 지위에 있어, 그의 망명은 상당한 기밀이 히데요시에게 그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일단 전선을 축소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철수 명령이 내려진 배경이었다. 덧붙여, 이에야스는 이를 기회로, 군제(軍制)를 타케다식으로 개편했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카즈마사 망명의 영향력은 컸다. 

 11월 후반, 토쿠가와군은 코모로 성에서 철수, 토토우미(遠江)로 귀국했다. 그 배경에 이시카와 카즈마사의 망명이라는 요행이 있었다고는 해도, 사나다 마사유키는 거의 혼자힘으로 토쿠가와군에게 완승했다. 덧붙여, 앞에서 말한 『우에다군키』를 시작으로, 근세의 군기물류는 모두 이 전투에 노부시게(信繁)도 참진했다고 하지만, 동시대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에치고(越後)에 인질로 가있던 노부시게가 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상쩍다. 다만, 텐쇼 14년에 마사유키의 정실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가 인질로서 카이즈(海津)로 갔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노부시게가 우에다로 돌아왔고, 그를 대신해 야마노테도노가 인질로 보내진 것이라 보는 설도 있다. 

 그런데, 우에다에서 생각지도 못한 고전을 맛봐야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누마타를 공격해줬으면 한다고 거즙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여, 텐쇼 13년 9월 초두까지는 호죠군이 세타 군(勢多郡) 모리시타 성(森下城: 군마 현 쇼와무라)을 즉시 공략, 누마타로 군세를 진군시켰다. 호죠군은 에치고와의 국경까지 진군하여 각지에 방화를 놓으며 돌아다녔다. 10일에는 아가츠마 군 오오도 성(大戸城: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으로 텟포슈(鉄砲衆)를 원군으로 파견해, 우지쿠니(氏邦)의 지휘하에 두었기 때문에, 아가츠마 군에서도 군사행동을 보였던 듯 하다. 한편으로, 호죠 씨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는 선수를 쳐서 윤 8월 24일에 츠쿠다 성(津久田城: 시부카와 시 아카기 쵸)을 공격했지만,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 시모누마타 부젠노카미(下沼田豊前守)가 포로가 되는 실태를 보였다. 9월 후반에는 누마타 성(沼田城) 아래의 카미토바리(上戸張)에서 호죠 우지쿠니군과 사나다군이 충돌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사나다 씨는 누마타 성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5월에 시모우사(下総)의 쿠니슈 치바 쿠니타네(千葉邦胤)가 비명횡사한 것을 계기로 시모우사에 대한 징계를 우선시 하고 싶었다는 호죠 씨 측의 사정도 있었다. 이때의 호죠 씨에게는, 누마타 공략에 전념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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