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토쿠가와(徳川) 가문을 따르다...
~ 카와나카지마(川中島) 공략에 실패한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는, 이번에는 카이(甲斐)를 목표로 남진책으로 전환한다. 이 일로 인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카와나카지마 4개 군(郡) 지배를 굳히는 데에 성공한다. 카이즈(海津)에는, 아라토 성(荒砥城: 치쿠마 시)을 거점으로 삼은 쿠니슈(国衆) 야시로 히데마사(屋代秀正)를 입부시키고 있다. 카게카츠는 야시로 히데마사에게 치이사가타 우라노(小県浦野) 씨의 영지를 주었다. 덧붙여, 치이사가타 우라노 씨는 당주인 겐이치로(源一郎)가 타케다(武田) 씨 멸망 때에 전사했기에, 이후의 동정은 불명확하다. 아무래도, 본가 혈통에 해당하는 네즈 죠안(禰津常安)을 따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종속, 이에야스의 칸토(関東) 입부(入部)에 따라 코즈케(上野) 토요오카(豊岡: 후지오카 시)로 들어갔던 듯 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시기는 호죠 씨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호죠세력의 카이 전진(転進), 치이사가타 군 부재라는 사태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를 자극하게 된다. 역시나 사료적 가치에는 문제가 있지만, 『関八州古戦録(칸하츠슈코센로쿠)』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이미 이에야스가 타케다의 옛 가신인 소네 마사타다(曾禰昌世),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를 기용해 카이의 인심을 장악했음을 지적하며, 호죠 우지나오의 카이 침공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우지나오는, 자신은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외손자이기에, 그것을 무기로 타케다의 옛 가신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해 간언을 뿌리쳤다고 여겨진다. 이게 사실이라 한다면, 마사유키는 당초에 호죠 우지나오에게 속해 있으면서 영지 방어를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우지나오의 카이 진출 실시에 의해 사정이 달라졌다.
한편,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카이, 시나노 쌍방에 군사를 보내고 있었다. 카이 남서부의 카와치(河内)령의 쿠니슈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을 때 이에야스와 함께 사카이(堺: 사카이 시)에 머물고 있었다. 본국으로의 도피행... 이른바 「신쿤 이가고에(神君伊賀越え)」가 있었을 때에는, 이에야스와 별도의 행동을 취해 거듭되는 백성들의 습격을 받아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후계자인 카츠치요(勝千代)는 어렸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아나야마의 영토를 사실상 보호하에 두는 형태로 코후(甲府)로 들어갔다. 그때, 타케다의 옛 가신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이다.
시나노에는 필두 가로(家老)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를 진군시켰다. 타다츠구는 이나 군(伊那郡)의 쿠니슈를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로부터 빼았은 치쿠마(筑摩), 아즈미 군(安曇郡) 공략에 나섰다. 그때 기용했던 이가 오가사와라 사다요시(小笠原貞慶)였다. 사다요시는 일찍이 타케다 신겐에게 쫓겨난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의 아들이기에, 옛 가신의 지지를 얻어 후카시 성(深志城: 마츠모토 시)로 들어갔다. 이후, 우에스기와 키소 두 씨족을 배척하기 위해 양군의 제압을 목표로 하게 된다. 덧붙여 스와 군(諏訪郡)은 타케다 씨 아래에서 스와 타이샤(諏訪大社)의 카미샤 오오호리(上社大祝)가 된 스와 요리타다(諏方頼忠)가 제압, 부케(武家)로서의 가문 재흥을 달성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된 토쿠가와 씨의 시나노 공략이었지만, 7월 후반에 상황이 바뀌었다. 문제는, 사카이 타다츠구의 자만심에 있었던 것 같다. 타다츠구는 시나노는 자신에게 주어진 땅이라 이해해, 쿠니슈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대했던 듯 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었던 스와 요리타다는, 토쿠가와 씨와의 종속 교섭을 중단, 오가사와라 사다요시와 함께 호죠 우지나오에게 종속한다(『当代記』 외).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호죠 우지나오의 카이 전진이 시작된다.
8월 6일, 호죠 우지나오는 카이로 진군하여 와카미코(若神子: 호쿠토 시)에 포진했다. 이미 코후를 제압하고 있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신푸 성(新府城: 니라사키 시)을 수축하여 입성, 맞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미 호죠 씨는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의 옛 영지인 카이 츠루 군(都留郡: 군나이)을 제압, 미사카 성(御坂城: 후에후키 시)을 쌓고 코후 분지(甲府盆地)를 동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런데다, 우지나오의 본대만으로 토쿠가와 세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숫자면에서 우세한 호죠 세력이 동서에서 이에야스를 협공하는 태세를 구축했던 것이다. 우지나오가 취한 수단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코즈케로 망명해 있던 호시나 마사나오(保科正直)를 파견해 옛 영지인 타카토오(高遠: 이나 시)를 탈환케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이나 군의 토쿠가와 세력은 시모이나(下伊那)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우지나오의 자신감은 근거 없이 나온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몇 안 되는 병력을 멋지게 활용하여 호죠세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궁지에 몰릴 게 뻔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나노에서는 가까스로 키소 요시마사를 호죠 씨로부터 빼내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는 요시마사가 오가사와라 사다요시에게 패퇴를 계속해서 맛봤던 데다, 지원을 요청하고 있던 오다(織田) 정권으로부터 이에야스의 편에 서줄 것을 요청받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키소 요시마사는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로부터 빼았은 사쿠(佐久), 치이사가타의 쿠니슈들의 인질들 중 일부를 이따금 이에야스에게 인도해 토쿠가와 씨에 종속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현상 타개가 멀기만 했다.
여기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사쿠 군의 쿠니슈인 아시다 요다 노부시게(蘆田依田信蕃)였다. 노부시게는 타케다 씨 멸망 당시, 이에야스의 조언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 이후에 카스가 성(春日城: 사쿠 시)으로 귀국, 사쿠 군의 쿠니슈를 토쿠가와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쿠, 치이사가타 군으로 침입한 호죠 우지나오의 대군을 앞두고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거성인 카스가 성을 버리고 산간부에 있는 미사와고야(三沢古屋)로 철수하기까지 내몰려 있었다. 노부시게는 이에야스로부터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카이, 시나노에서의 호죠 씨의 공세가 강해지고 있던 중에 기사회생의 책략에 나섰다.
노부시게의 책략이라는 것은, 북쪽인 치이사가타 군의 유력자인 사나다 마사유키를 토쿠가와 쪽으로 배신시킨 것이었다. 사쿠 군은 코모로 성(小諸城: 코모로 시)을 거점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호죠 쪽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제대로만 된다면 요다 세력과 사나다 세력으로 협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사유키와 토쿠가와 가문과의 교섭은, 요다 노부시게와 소네 마사타다를 중개로 치러졌다. 모두 타케다시절의 동료였으며, 특히 소네 마사타다는 함께 「신겐의 두 눈」이라 불리운 사이였다. 하지만, 마사유키를 밀어준 것은 친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의 진언이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마사하루의 활약에 대해 「万事園」라 말하고 있어, 마사하루는 형인 마사유키와는 다른 행동을 취하면서 토쿠가와 가문에 임하고 있었던 듯 하다.
9월 28일에 이에야스가 제시한 조건은 코즈케 나가노(長野) 씨의 옛 영지, 카이에서의 2000관문의 영지, 및 시나노 스와 군이라는 대가였다. 나가노 씨의 옛 영지라는 것은 미노와(箕輪)령(타카사키 시)을 가르키고 있으며, 타케다 시절에는 코즈케 서부 지배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요컨데, 코즈케 지배를 맡아달라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다. 스와 군은 호죠 쪽으로 돌아선 스와 요리타다의 영지였기 때문에, 이것도 완전히 공수표였다. 다만, 카이 2000관문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이 토쿠가와 영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행되었던 듯 하다. 익년인 텐쇼(天正) 11년(1583), 마사유키는 카이에서 받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상으로 내려주었다.
포인트가 되는 것은 요다 노부시게와의 연계였다. 호죠 가문의 사쿠 군에서의 거점이 되어 있던 코모로, 마에야마(前山: 사쿠 시) 두 성은 북쪽에서 사나다 마사유키, 남쪽에서 요다 노부시게에게 협공당하게 되었다. 이는 호죠 우지나오 본대의 보급로를 끊어놓은 것을 의미했다. 우지마사(氏政)는 10월 1일자로 된 서장에서 사쿠 군의 쿠니슈로부터 인질을 다시 징수할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태세를 바로 잡아 사나다에게 모여든 쿠니슈들을 흩어놓으라 명령했지만, 사태는 예측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숨죽여 지내고 있던 요다 노부시게가 맹렬한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노부시게에게 계속해서 원군을 증파했던 것도 컸다. 여기서 호죠 씨의 제압 직전까지 몰려있던 사쿠 군의 정세는 일변한다.
10월 19일, 먼저 마사유키는 호죠 측인 치이사가타 군의 쿠니슈 네즈 마사츠나(禰津昌綱)를 공격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후에도 치이사가타 군 남부로부터 사쿠 군을 계속해서 넘보게 된다.
당연히, 호죠 우지나오도 재빠르게 대응, 사쿠 군으로는 원군으로서 역전의 명장인 호죠 도칸 츠나시게(北条道感綱成)를 파견했다. 군세 5천을 이끌게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였다. 한편, 사나다 씨의 거점인 코즈케 아가츠마 군(吾妻郡)에 대해서는, 10월 22일, 호죠 측의 쿠니슈인 오오도 우라노 신라쿠사이(大戸浦野真楽斎)에게 사나다령 공격을 명령했다. 또 25일, 타케다 시절의 사쿠 군 지배 거점이었던 우치야마 성(内山城: 사쿠 시)에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의 가로인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를 보내, 사쿠 군의 방비를 굳히게 했다. 거기다 코모로에는 호죠 가문의 가로인 다이도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가 입성해 있었다.
마사유키 측도 호죠 씨의 반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당연히 각오하고 있었다. 치이사가타는 당분간 안전했기에, 우려되는 것은 코즈케였다. 따라서 마사유키는 누마타(沼田), 이와비츠(岩櫃)의 방비를 강화했다. 특히 아가츠마 군에 대해서는, 사나다 씨의 가로가 된 토호 유모토 사부로우에몬노죠(湯本三郎右衛門尉)가 중심이 되어 지휘를 맡았다. 그 공적을 높이 사 마사유키는 10월 13일, 운노(海野) 중 와카사노카미(若狭守) 분 50관문 등을 유모토에게 주었고, 익 14일에 하네오 성(羽根尾城: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의 성주대리로 임명해 재성료(在城料)를 지급했다. 이 운노 중의 와카사노카미 분이라는 것은, 운노 씨의 가로인 오구사노 와카사노카미 타카요시(小草野若狭守隆吉)의 지행분을 가르키는 것이라 사료되며, 이 당시까지 마사유키가 운노령을 병합했음이 밝혀지게 된다. 덧붙여, 타카요시의 동생의 계통이, 사나다 가문에 임관하고 있었음이 확인 가능하다(사나다 씨 소장 『御家中系図』). 거기다 마사유키는 코즈케 군마 군(群馬郡) 시츠타카(尻高: 군마 현 타카야마무라)령도 확보하고 있어, 19일에 오리타 군뵤에(折田軍兵衛)에게 지행을 주었다. 시츠타카 성은 나카야마 성(中山城: 타카야마무라) 서쪽에 위치해 있어, 누마타와 이와비츠를 잇는 요지에 있었다. 즉, 마사유키는 토네(利根: 누마타령), 아가츠마(이와비츠령) 양 군을 확실히 굳힌 뒤에 호죠 씨를 배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0월 13일, 호죠 우지쿠니가 코즈케의 가신에게 시나노로부터 슷파(透破: 닌쟈) 500명 정도가 성을 빼았으려 공격해 온다는 소문을 전해, 조심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닌쟈(忍)가 500명이라는 것은 이상한 광경이기에, 이는 게릴라전을 특기로 하는 아시가루(足軽)를 슷파로 기록했을 것이다. 서장 속의 다른 개소에서는, 아시가루라 명기하고 있다. 우지쿠니는 추운 계절이기 때문에 야습은 달이 뜬 밤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리라는 견해도 첨부했다. 시기적으로 마사유키의 활약이라 생각해도 차질이 없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단순히 코즈케의 방비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27일에는, 누마타슈에게 세타 군(勢多郡) 츠쿠다 성(津久田城: 시부카와 시 아카시로 쵸)을 공격케 했다. 츠쿠다 성은, 호죠 쪽의 거점인 시로이 성(白井城: 시부카와 시)의 지성(支城)이다. 오래전부터 우에스기, 타케다, 호죠 세 가문은 시로이 성을 둘러싸고 항쟁을 펼치고 있어, 그런 과정에서 쌓은 성곽이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 호죠 씨에게 격퇴당하고만다.
◇ 토쿠가와(徳川) 씨와 호죠(北条) 씨의 화친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의 종결
~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은 어쩌면 당사자 각각이 놓여진 입장에 따라 시점이 상당히 달라진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입장에서 보자면,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는 대군을 이끌고 있는 위협이었다. 그런데다, 딱 이런 타이밍에 카미가타(上方)에서 「오다(織田) 정권」이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진영과,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진영으로 분열되는 것으로 인해(「上方総劇」), 당초에 예정되어 있었던 원군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는 두 진영으로부터 호죠 씨와의 화친을 권고받게 되었다. 물론, 두 진영의 목적은 반대로 이에야스로부터 원군을 빌렸으면 하는 데에 있었다. 즉, 이에야스는 단독으로 호죠 씨와 계속해서 싸우는 데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전쟁을 장기화시키는 것은 득이 아니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호죠 우지나오 입장에서 보자면,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전황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카이 와카미코(若神子)에서 발이 묶여버린 것은 뼈아픈 타격이었다. 미사카 성(御坂城)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렸던 군세도 간단하게 격퇴당해버렸다. 우지나오는 대군을 이끌고는 있었지만, 반드시 군사적 승리를 쌓아 왔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이반과,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의 분전의 영향도 컸다. 사쿠 군(佐久郡)의 쿠니슈(国衆)들이 차례차례로 토쿠가와 족으로 배신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타카토오(高遠)를 점령당한 호시나 마사나오(保科正直)까지 토쿠가와 쪽으로 돌아서버렸다. 호죠 씨의 시나노에 있어서의 세력은 크게 후퇴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쿠 군의 급격한 정세 악화는, 우지나오 본대의 퇴로를 차단시켜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카이, 시나노에 있어서의 영지 확대에 얽메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진을 계속하는 게 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자인 사나다 마사유키가 누마타(沼田), 이와비츠(岩櫃)를 영유하는 코즈케 제압에 전념, 비원하던 칸토(関東) 통일에 매진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호죠 씨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 다이묘(大名)의 기대는 일치하게 되었다.
텐쇼(天正) 10년(1582) 10월 29일, 카이 와카미코에서 대진하고 있던 호죠 우지나오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화친이 성립되었다.
이 화친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있어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았을 것이다.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다이묘들끼리의 화친, 동맹에는 「쿠니와케(国分け)」라 불리우는 국경의 재획정(再画定)이 반드시 따라 붙는다. 이 화친에서는, 카이, 시나노가 토쿠가와령, 코즈케가 호죠령이라 정해졌다. 호죠 우지나오가 시나노 사쿠 군(佐久郡), 카이 츠루 군(都留郡)에서 철수하는 대신에,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속하고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의 누마타, 이와비츠령 할양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조약에 따라, 호죠 쪽의 사쿠 군 쿠니슈는 코즈케로 퇴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여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누마타, 이와비츠는 이에야스로부터 주어진 영지가 아니니 멋대로 할양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사유키는, 이에야스를 따르고 있었으면서도 결코 누마타, 이와비츠를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의 도화선이 된 「누마타령 문제」(이와비츠령도 포함해서)가 발생하게 된다.
호죠, 토쿠가와 사이의 쿠니와케 협정은, 빼앗기 나름(실력에 의한 영지 확장의 용인)이라는 것이었던 듯 하다. 따라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누마타령 인도를 권고하긴 했지만, 마사유키가 따르지 않을 경우 호죠 씨가 무력에 의해 빼앗을 수 있다... 라는 뜻이 된다. 또, 성의 청취 자체가 군세를 파견하여 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나다 씨가 성곽 인도를 거절, 성을 떠나지 않으면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화친 교섭 도중인 텐쇼 10년 10월 27일, 사나다세가 호죠 쪽인 코즈케 츠쿠다 성(津久田城)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하고만다. 28일,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는 반격에 나서서 모리시타(森下: 군마 현 쇼와무라)에서 사나다세를 무찔렀다. 호죠, 토쿠가와 사이의 화친과는 별개로, 코즈케에서는 전투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윤 12월(이즈의 미지마 타이샤가 작성해 토고쿠에서 유통된 미시마고요미에 의한다. 쿄력으로는 텐쇼 11년 정월), 호죠 우지쿠니는 나카야마 성(中山城)으로 몰려갔다. 14일, 밤 중에 나카야마 성을 공략한다는 전망을 말하며, 그후에는 즉시 누마타로 공격해 들어간다는 예정이었던 듯 하다. 모리 호죠 호린(毛利北条芳林)이 우에스기(上杉) 이치몬(一門)인 죠죠 기쥰(上条宜順)에게 보낸 서장에 따르면, 우지마사(氏政)와 우지나오 부자는 시로이 성(白井城)을 거점으로 삼아 나카야마 성을 공격, 계책에 의해 이 성을 공략했다고 한다. 호린의 서장에서는 11월의 사건이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윤 12월이었던 듯 하다. 사나다 씨는 나카야마 성을 잃고서 누마타와 이와비츠 사이의 연락에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호죠 씨는 나카야마 성에 아카미 야마시로노카미(赤見山城守)를 들여보냈다 한다. 여기에 대항하여, 사나다 마사유키도 시모카와다 성(下川田城: 누마타 시)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카미카와다 성(上川田城: 누마타 시)에는 와타나베 사콘노죠(渡辺左近丞)가 들어가 있었다 말하고 있기 때문에, 와타나베 사콘노죠도 결국, 마사유키를 따랐다고 봐야한다(『加沢記』). 하지만, 누마타슈들 중에는 호죠 쪽으로 가버린 자들도 적지 않아서, 우지나오는 그들을 나카야마 성에 배치했다. 덧붙여, 이 때 호죠 호린은 우지나오로부터 종군을 명령받게 되는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고 호죠세와 싸웠다 한다.
또, 우지쿠니는 누마타 공략에 전념하기 위해, 츠쿠다 성 관할권을 형인 우지테루(氏照)에게 양도했다. 호죠세는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여 누마타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누마타 성을 호죠 씨로부터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
호죠 우지나오는, 익 텐쇼 11년(1583) 2월, 숙부인 우지쿠니를 미노와 성(箕輪城: 타카사키 시)로 들여보내어 누마타형 공략을 우지쿠니의 손에 맡겼다. 3월, 우지쿠니는 무사시(武蔵), 코즈케 서부의 군세를 모아 누마타로 출진한다는 진구성에 나서서 4월에 출진했다. 거기다 5월, 호죠세는 아가츠마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이마저 이겨내는 데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