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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9 (0) 2016/12/09 PM 11:45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토요토미(豊臣) 정권으로의 복속

~ 그런데, 전혀 출사할 자세를 보여주지 않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에 대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자세도 변화한다. 히데요시의 정치 과제는 어디까지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복속이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사나다령 공격 용인을 표명한 것이다.

 7월 17일, 이에야스는 사나다 공략을 위해 슨푸(駿府)로 들어갔다. 이 보고를 들은 히데요시는 8월 3일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사나다 씨에 대한 지원을 금했다. 히데요시가 마사유키를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라 평가한 것은, 이 때의 일이다. 이표(裏表)가 있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뉘앙스였을 것이다.

 8월 7일,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사나다 공략 지연을 전했지만, 9일에 스스로 출마하여 사나다 씨를 토벌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야스의 출진도 재차 인정해주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원군이 지키고 있던 성은, 히데요시가 인도해주었기 때문에 토쿠가와군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다. 토쿠가와, 우에스기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배려였다. 

 마사유키는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되지만, 9월 25일에 사나다 공략은 중지되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탄원이 그 배경에 있었던 듯 한데, 그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토요토미 정권」에 복속할 의사를 표명한 것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에야스의 상경이 토쿠가와 가문 내에서 결정된 것은, 사나다 공략 중지가 결정된 다음날인 9월 26일이었다(『家忠日記』). 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사나다 공략을 전할 때에 이는 이에야스를 위해 행한 것이었으며, 사나다 공략이 끝나면 상경하라는 뜻이었다. 즉, 사나다 토벌 역시, 이에야스에게 상경, 출사를 결심케하는 재료 중 하나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마사유키가 멸망의 위기에 내몰린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텐쇼(天正) 14년 11월 21일, 히데요시는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사면을 통달, 재차 상경을 명령했다.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도 마사유키에게 사면을 전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명령을 받은 마사유키가 상경한 것은 텐쇼 15년 3월의 일로,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가 동석했다. 이는 생각지 못한 부산물을 낳았다.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와 직접 교섭을 가졌기 때문에,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우에스기 씨를 따르는 쿠니슈(国衆)로서 대우받은 게 아니라, 중앙 정권에 직접 임관하는 토요토미 다이묘가 된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과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대등한 것으로 변화했다. 그렇게 한 다음, 이에야스의 요리키 다이묘(与力大名)라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요시 직속 다이묘이긴 했지만,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이에야스의 지휘하에 배속된다는 대우였다. 

 거기다,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히데요시가 일단 「누마타령 문제」를 보류할 것을 승인했던 것 같다는 데에 있다. 이 일로 인해, 코즈케(上野) 누마타(沼田)에는 적자인 노부유키(信幸)가 들어갔다. 사나다 씨는 나중에 「누마타령 문제」 재정(裁定)에서, 누마타령의 2/3를 호죠(北条) 쪽에게 인도해 주게 된다. 그때, 2/3 카에치(替地)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준비했다. 즉, 노부유키를 보호할 책임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토쿠가와 씨는 이 이후, 동맹국인 호죠 씨의 토요토미 정권 복속 교섭에 종사하게 된다. 그때, 이에야스가 노부유키의 이른바 「후견인」이라는 입장에 서있었다는 것은 사나다 씨에게 있어서 생각지 못한 요행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일방적으로 호죠 측의 주장을 낼름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사유키가 기피한 토쿠가와 요리키 다이묘라는 입장이, 오히려 사나다 가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여기서 마사유키는 우에다(上田)령 3만 8천석, 적자인 노부유키는 누마타령 2만 7천석의 토요토미 다이묘로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된다. 부자가 합계 6만 5천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텐쇼 17년(1587) 9월,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에게 측실들의 재경(在京)을 명령했다(『多聞院日記』). 텐쇼 15년에 완성된 토요토미 정권의 정청(政庁)인 쥬라쿠테이(聚楽第: 쥬라쿠 성, 쿄토 시 카미쿄 구)에서 사후(伺候)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도 쿄에 저택을 갖추고서 정실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는 쿄로 들어갔으리라 여겨진다. 마사유키는 토요토미 정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갔다. 

 

 

 

◇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의 「소부지(惣無事)」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종속한 이상,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다음 정치 과제는, 칸토(関東)를 다스리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의 복속이었다. 이미 히데요시(秀吉)는 텐쇼(天正) 11년(1583)에 이에야스를 통해 「칸토 소부지(関東惣無事)」를 호죠 씨에게 전달한 채였다.

 「소부지(惣無事)」라는 것은, 「전부 무사(無事)」라는 글자 뜻 그대로, 넓은 지역에 걸친 정전 상태(停戦状態)를 가르키는 말이다. 정전을 명령한 것이기 때문에 「소부지령(惣無事令)」이라 부르고 있으며, 토요토미 정권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잡아왔다. 히데요시는 중앙 정권을 주재(主宰)하는 「천하인(天下人)」으로서, 각지의 다이묘(大名), 쿠니슈(国衆)에게 「소부지」를 명령했다. 여러 다이묘들 사이의 전쟁을 「시센(私戦: 사사로운 이유로 제멋대로 치르는 전투)」이라 인정하고 이를 금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세를 파견하여 처벌한다는 의미였다. 다만, 이 텐쇼 11년의 「소부지」는, 오다(織田) 가문의 슈쿠로(宿老)인 히데요시가, 이치몬(一門) 대우를 받고있던 오다 다이묘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달을 의뢰, 오다 정권에게 모반을 일으킨 호죠 우지나오에게 귀순을 요구한 것이었기에, 후년의 히데요시 「소부지령」과는 단계가 다르다.

 덧붙여, 현재는 「소부지」를 법령으로 보는 데에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되어 있지만, 필자는 중세법의 일환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戦国大名の「外交」(센고쿠 다이묘의 「외교」)』(講談社選書メチェ) 마지막 장에서 견해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소부지령」의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센고쿠시대에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쇼군(将軍)에 의한 다이묘끼리의 분쟁의 정전령으로 닿게 된다. 하지만, 센고쿠시대의 바쿠후는 키나이 정권(畿内政権)으로 변해있었기에, 그 명령에는 일정한 경의(敬意)가 담겨있긴 했어도, 센고쿠 다이묘에 대한 강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역대 쇼군들은 주변 여러 다이묘에게 「츄닌(中人)」이 되라고 명령하는 것에 의해, 강제력을 확보하려 했다. 「츄닌」이라는 것은, 중세사회의 분쟁 해결에 있어서 근린해 있는 제 3자로부터 간택된 조정자를 가르킨다. 

 확실히 이웃 영지의 다이묘가 쇼군의 명령을 따라 「츄닌」이 되어 화친 중재에 나선다면, 당사자가 받아들이는 방식도 변화가 오게 된다. 분쟁 당사자가 화친을 거절한다면, 「츄닌」이 된 다이묘와 적대관계에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 「츄닌」이 사이에 끼어들어가 맺은 화친을 부주의하게 파기하게 된다면, 「츄닌」의 체면을 짓밟는 행위라 간주되고, 역시나 그 다이묘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센고쿠시대의 무로마치 바쿠후의 쇼군은 이 점을 노렸지만, 그 성과는 그다지 없었다. 

 무로마치 바쿠후가 멸망한 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천하인」으로서 중앙 정권 뿐만 아니라, 열도 전체로 승인되게 된다. 노부나가도, 역시나 다이묘들끼리의 전쟁에 정전을 명령했다. 그리고 만년에는, 그 영향력을 아직 완전하게 지배하에 두지 않은 칸토나 큐슈(九州)에도 미치게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노부나가가 가진 압도적인 군사력이었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노부나가의 정전령은 관계자들로부터 「소부지」라 불리우게 된다. 즉, 히데요시가 주장한 「소부지」라는 것은, 노부나가의 발상을 전국전개시킨 것이 었다는 말이다. 이 「소부지」 역시 「츄닌」을 활용한 것이었다는 것은, 노부나가 정권으로부터의 연속성을 상징하고 있다.   

 

 

 

◇ 히데요시(秀吉)의 「소부지령(惣無事令)」과 「누마타(沼田)령 문제」의 재정(裁定)

~ 오다(織田) 씨를 대신해 천하인이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각지의 지역 권력에 「소부지(惣無事)」를 호소하는 것에 의해, 정권에 대한 복속을 압박해 갔다. 그 논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여러 다이묘(大名)의 전쟁을 「시센(私戦)」이라 인정해 이를 금지시켰으며, 중앙 정권이 되는 토요토미 정권에 복속하라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마찬가지로 강대한 군사력이었다. 즉 「소부지령(惣無事令)」이라는 것은, 군사력을 배경에 둔 강제적 정전령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덧붙여, 「소부지령」은 「토요토미 평화령(豊臣平和令)」이라는 일련의 정책 속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화」라는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길을 선택한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평화」였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소부지령」에 군사적 강제력이 미치지 않는 먼곳의 다이묘가 따른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중 한명이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였다. 호죠 씨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아래에서 칸토(関東) 지배를 위임받았던 코가 쿠보(古河公方: 과거의 카마쿠라 쿠보의 후예)를 봉재(奉載)하였으며, 그 아래에서 「칸토칸레이(関東管領)」가 되는 것으로 인해 칸토지방을 통일하려하는 이데올로기를 갖고있었다. 호죠 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의 화친 때에 칸토칸레이직을 반환하게 되는데, 그후에도 코가 쿠보 아래에서의 칸토 통일이라는 구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 종결 당시에는 카이(甲斐), 시나노(信濃)를 방치하면서까지 코즈케(上野) 제압에 얽메이고 있었던 것이다.

 텐쇼 연간(1573~92)에 들어서면서, 칸토 북부에서는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가 센고쿠 다이묘화하면서 히타치, 시모츠케(下野), 시모우사(下総)의 쿠니슈(国衆)의 맹주로서 호죠 씨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사타케 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히데요시의 「소부지령」은 마침가락이었다. 사타케 씨를 중심으로 하는 칸토 북부의 쿠니슈는, 히데요시와 손을 잡고 호죠 씨와 대항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거듭해 갔다. 

 당연하게도, 호죠 씨가 「소부지령」에 응한 것은 아니었다. 코즈케에서는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가 누마타(沼田)령 침공을 반복하고 있었다. 텐쇼 15년(1587)에는, 히데요시 침공에 대비해 동원령이 내려졌다 이 해, 우지쿠니는 자신을 대신해서 가로(家老)인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를 미노와 성(箕輪城)의 성주대리로 임명, 또 오오도 성(大戸城: 히가시아가츠마 쵸)의 성주대리로 가로인 사이토 사다모리(斎藤定盛)를 배치해 두어 누마타 공격 태세의 재편을 도모했다. 7월, 호죠 우지쿠니의 군세가 군마 군(群馬郡) 이와이도 성(岩井堂城: 시부카와 시)을 공략, 이와비츠(岩櫃)로 몰려갔다. 반대로 12월에는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가 누마타에서 군세를 보내어 시로이(白井)령을 침공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어디까지나 호죠 씨에게 복속을 요구하기 위해 군사 압력을 강화해 갔다. 텐쇼 16년(1588) 8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강한 권고 결과,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 우지마사의 동생)의 상경이 실현되었다. 인선(人選)은, 우지노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소꿉친구였던 데다, 호죠 가문 안에서 이에야스와의 외교를 담당한 인연에서 기인한다. 호죠 씨는 텐쇼 14년, 동맹국의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정권에 복속한 것에 강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히데요시 및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사타케 요시시게와 대항하려던 전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야스가 동맹 파기할 뜻을 언뜻 내비치면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의 이에야스는 「츄닌(中人)」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교섭 성립에는 자신의 체면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호죠 씨도 토요토미 정권으로의 복속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텐쇼 진고의 난」 종결 당시의 코즈케 = 호죠령이라는 토쿠가와, 호죠 사이의 쿠니와케(国分け) 협정이 주목받게 된다. 호죠 우지나오가 복속 조건으로 「누마타령」 인도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지노리 상경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도중인 텐쇼 16년 4월, 호죠 우지쿠니는 가로인 이노마타 쿠니노리에게 명령하여, 곤겐야마 성(権現山城: 타카야마 무라, 미나카미 쵸)을 축성한다. 나구루미 성(名胡桃城) 공략의 발판이었다. 5월, 이노마타 쿠니노리는 곤겐야마 성의 방비를 강화하여 재성하고 있던 이들에게 사나다령 나구루미에서의 지행(知行)을 상으로 줄 것을 약속했다. 윤 5월 23일에는, 곤겐야마 성을 거점으로 한 누마타 공략이 시행되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도 4월 26일에 요코오 하치만 성(横尾八幡城: 군마 현 나카노죠 쵸) 재성과 보수에 대해, 2교대로 행하도록 정하고, 누마타와 나란히 거점인 이와비츠 성(岩櫃城) 수비를 강고히 했다. 

 즉, 호죠 씨는 히데요시와의 화평 교섭을 진행시키면서 누마타 공략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죠 씨 내부에서는,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종속에 신중한 「고인쿄사마(御隠居様)」... 즉, 우지마사(氏政)와,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던 당주 우지나오 우지노리의 대립이다. 우지마사는 동년 11월에 「(이미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몸이지만)다시 은거하겠다」라는 말을 꺼내고 틀어박히는 행동에 나섰다. 요컨데, 지금까지는 은거라고는 해도 호죠 가문의 정치 운영은 담당해왔지만, 이젠 완전하게 은퇴한 늙은이가 되겠다... 뒤는 멋대로 해라... 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종속 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우지노리는 대응에 고심하고 있었다. 

 덧붙여, 이 텐쇼 16년 5월에는, 야자와 요리츠나에게 누마타에서 보유하고 있던 영지의 카에치(替地)가 시나노로 주어지고 있다. 이 무렵이 되면, 마사유키는 누마타령 할양에 내몰릴 가능성을 생각해 내지 않았을까? 

 한편, 호죠 우지쿠니의 군사 행동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9월 4일에 누마타령으로 침공해 25일까지 아조 성(阿曽城: 군마 현 쇼와 무라)을 공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히데요시가 「누마타령 문제」 재정(裁定)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7월 10일, 히데요시는 죠시(上使)로서 츠다 세이게츠(津田盛月), 토미타 잇파쿠(富田一白)를 파견해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에게 이와비츠에서 누마타로의 텐마(伝馬)를 수배하라 명령했다. 목적은 「칸토 8주, 데와(出羽) 무츠(陸奥)의 면면」의 사카이메(境目: 국경)을 획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한다. 즉, 「소부지령」을 실행으로 옮겨 칸토, 토호쿠(東北)의 다이묘와 쿠니슈의 영지를 획정시키려는 장대한 구상이 있었기에, 「누마타령 문제」 재정은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제에는, 호죠 우지노리의 상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호죠 우지노리는 11월 말일에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에게 보낸 서장에서, 히데요시의 죠시 츠다 세이게츠, 토미타 잇파쿠에 대해, 누마타와 관련된 것으로 낭보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호죠 우지쿠니가 12월 11일자로 보낸 서장에서 밝혀지게 된다. 거기에 따르면 「쿄토(京都)에서 사자가 온다. 누마타, 아가츠마(吾妻: 이와비츠) 모두 당사자에게 인도되게 되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쿄토에서 억류되어 있으니, 이걸로 야도메(矢留: 정전)하기로 결정되었다」라고 말한다. 우지쿠니는 코즈케에 있는 사나다령이 전면 할양될 것이라 낙관시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호죠 우지나오에게 「누마타령 문제」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우지나오는 이를 흔쾌히 승낙, 이타베오카 코셋사이(板部岡江雪斎)를 상경시켜 일의 경위를 보고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호죠 씨에게 있어서 의외의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누마타령의 1/3이 사나다령, 2/3가 호죠령이라 재정했다. 즉, 사나다 씨는 코즈케의 영지의 전면 할양을 면제받았다. 텐쇼 17년(1589) 봄 무렵이라 여겨진다.

 이는, 코즈케를 호죠령으로 정한다는 화친 조항이 「누마타령」을 이에야스가 양도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호죠 씨가 실력으로 코즈케를 제압하는 것(이른바 「키리토리하기 나름」)을 이에야스가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호죠 씨가 누마타령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트집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목적은 호죠 씨의 완전한 복속에 있었다. 그래서 호죠 우지나오의 요청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사나다 씨도 배려한다는 분할안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加沢記(카자와키)』에 사나다령으로서 기록된 성곽의 분포와,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코쿠다카(石高)를 통해서 보면, 이는 사나다 가문에게 아가츠마 군(吾妻郡)을 남기는 한편, 누마타가 있는 토네 군(利根郡)은 호죠 씨에게 인도하라는 명령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미 호죠 측의 거점이 되어 있던 오오도 성을 사나다 씨의 소유물로 하는 등, 『카자와키』의 기술은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아가츠마 군은 마사유키의 부친인 유키츠나(幸綱)가 경략하고 20년 정도가 경과한 데다, 사나다 씨의 동족인 시게노(滋野) 일족이 할거하고 있던 땅이다. 한편, 누마타 성은 마사유키가 공략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 누마타 성은 기본적으로 우에스기(上杉) 씨의 성곽이었는데, 호죠 씨가 영유하고 있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경위를 통해서 봐도 타당한 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재정에 대해 마사유키는 토네 군 나구루미에는 「선조의 묘가 있기 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나다 가문의 정사(正史) 『真田家御事蹟稿(사나다케고지세키코)』의 편찬자 카와하라 츠나노리(河原綱徳)가 놀랄만큼 명확한 거짓말이다. 마사유키는 누마타 성과 지근거리에 있는 군사적 요충인 나구루미 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확보해 두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히데요시도 호죠 가문 종속을 우선시해서 사나다 가문에게 무리를 요구하는 할양 문제였기 때문에 마사유키의 요구에 뜻을 꺾은 듯 했다. 나구루미는 사나다령이 되었고, 그 카에치가 아가츠마 군 안에서 호죠 가문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나중에 호죠 우지나오가 변명한 부분에 따르면, 사나다 마사유키는 백성들을 촌락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은 다음에 아가츠마 군에서의 카에치를 호죠 우지나오에게 인도했던 듯 하다. 거기다 나카노죠(中之条: 군마 현 나카노죠 쵸)에 이르러서는, 인도 자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 땅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사나다령으로 둘러싸인 땅이 되어 있다. 따라서, 마사유키는 과감하게도 인도하기 곤란한 땅을 리스트에 올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사유키가 명백한 「장난질」을 쳤고, 호죠 씨의 인내심을 시험받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우지마사도 납득해 누마타령 할양의 조건으로서 제시된 상경에 동의하고 그 준비를 진행하게 된다. 

 텐쇼 17년(1589) 7월 21일, 히데요시의 가신인 츠다 세이게츠, 토미타 잇파쿠가 켄시(検使)로서 누마타로 파견되었으며,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의 지시 아래에서, 누마타 성이 호죠 쪽으로 인도되었다. 우지나오는 이 성을 누마타 공략을 담당하고 있던 호죠 우지쿠니의 관할하에 둘 것을 결정, 우지쿠니의 가로인 이노마타 쿠니노리가 입성했다. 사나다 노부유키는 켄시로 온 두 사람의 접대와 안내를 히데요시로부터 명령받았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토네, 아가츠마 양군(누마타령) 지배를 적자인 노부유키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유키의 요리오야(寄親)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시나노 이나 군(伊那郡) 미노와(箕輪)령(나가노 현 미노와 쵸)에서 카에치를 주기로 정해졌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재정은, 사나다령의 감지(減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교통의 요충지인 누마타와 비교할 것이 못되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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