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나구루미 성 사건(名胡桃城事件)
~ 하지만, 정확히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가 미노와(箕輪)령에서 지행 분할을 시작한 텐쇼(天正) 17년 11월 3일,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나구루미 성(名胡桃城)을 급습해 이 성을 공략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여러 문서에 따르면, 나구루미 성의 성주대리인 스즈키 몬도(鈴木主水)에게 마사유키(昌幸)로부터의 소환명령이 닿았다. 이를 믿은 몬도가 성을 비웠을 때, 실은 이 명령은 호죠(北条) 측의 보낸 가짜였다. 거짓 명령을 전한 것은 몬도의 매형인 나카야마 큐뵤에(中山久兵衛)라 여겨진다. 이런 일을 당한 스즈키 몬도는 성아래에 있는 쇼카쿠지(正覚寺: 누마타 시)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요는, 스즈키 몬도와 나카야마 큐뵤에의 확집이 원인이다. 덧붙여, 쇼카쿠지에는 스즈키 몬도의 묘라 전해지는 묘석이 있는데, 현재는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안내판이 내려가 있다.
그런데, 이노마타 쿠니노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센고쿠시대(戦国時代)라면 당연한... 분쟁 때에 당사자인 한쪽으로부터 지원을 요구받으면 군세를 움직여 보호한다고 하는 행동에 나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대가 달라졌다. 이노마타의 행동은 명확하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행한 시센(私戦) 금지, 다이묘(大名)들끼리의 분쟁 정지 정책... 즉, 「소부지령(惣無事令)」 위반이 되어버린다. 히데요시는 텐쇼 16년말까지는 호죠 씨의 군사 행동을 묵인하고 있었지만, 정권에 종속한 이상, 호죠 씨는 「소부지령」을 따를 의무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사태를 알게 된 사나다 노부유키는 즉시 요리오야(寄親)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호죠 씨의 불법을 호소했다. 이에야스는 11월 10일, 노부유키에 대해,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 위한 답서를 썼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호죠 가문 토벌을 결의하게 된다. 11월 21일,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에게 「스스로 출마하여 호죠 씨의 목을 꺾어버려라」라는 주인장(朱印状)을 주었다. 그리고 24일, 히데요시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의 잘못을 줄줄이 써서 「테기레노잇사츠(手切れの一札)」(동맹, 종속 관계 파기 통고서)를 다수 작성하여 호죠 가문 뿐만 아니라 종속한 여러 다이묘에게 배포했다. 당연히, 당사자인 사나다 가문에게도 배포되었으며, 현재 「사나다 가문 문서」로서 사나다 보물관에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는 이 문서를 배포하는 것에 의해, 호죠 씨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어필,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의 시작
~ 텐쇼(天正) 18년(1590),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을 개시한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따라 호쿠리쿠(北陸)에서 토산도(東山道: 근세에 들어서면서 나카산도라 불리우게 된다)로 들어가는 군세에 가세하게 되었다. 지리적 관계 때문에, 요리오야(寄親)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는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출진은 2월말인가 3월초두였던 듯 하다. 토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다이묘(大名)는 100석당 7명의 군역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부자가 모두 4550명을 이끌었지 않았을까?
홋코쿠(北国)군(토산도군)은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넘어 마츠이다 성(松井田城: 안나카 시)을 목표로 했다. 성주대리는 호죠(北条) 씨의 중신인 다이도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였다. 『滋野世紀(시게노세이키)』 등을 보는 한, 이것이 마사유키의 차남인 노부시게(信繁) 출진의 첫 발견이다. 대규모 전투로는 첫 참전이었던걸까?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가 일어났을 때에, 호죠 씨는 영내 각지에 있는 지성(支城)의 성주나 성주대리를 오다와라로 모아 사실상의 인질로 삼는 정책을 취했는데, 중요 거점인 마츠이다에는 성주대리인 다이도지 마사시게가 있었다. 다이도지 씨는, 초대인 이세 소즈이(伊勢宗瑞: 이른바 호죠 소운) 이래의 가로(家老)였다.
『真武内伝(신부나이덴)』에 따르면, 다이도지 마사시게는 우스이 고개에 군세를 파견하는 것에 의해 전투가 되었다.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의 감사장을 통해, 3월 15일임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마사시게는 우스이 고개 봉쇄에 실패한 듯 하며, 그보다 앞서서 홋코쿠군이 고개를 제압해버렸던 듯 하다. 이걸로 승부는 난 것 같았다. 다이도지 마사시게는 항복, 성을 내주었다. 마사유키가 마츠이다의 네고야(根小屋)를 격파하고 성 바로 앞까지 압박했다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에게 보고한 것은 4월 7일의 일이다. 21일, 마사시게는 성을 내어주고 항복했다.
일견 어이없는 함락처럼 보이겠지만, 우스이 고개를 넘은 게 3월 15일임을 감안하면, 공성전은 한달에 걸쳐 치러지고 있었다. 마츠이다 성의 규모는 상당했기 때문에, 공성에 시간이 걸렸을 게 당연했을 것이다. 이후, 다이도지 마사시게는 홋코쿠군의 안내역을 맡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마사시게의 양자인 나오히데(直英)가 농성하고 있던 다이도지 씨의 본거지인 무사시(武蔵) 카와고에 성(河越城: 카와고에 시)은 간단하게 개성하고 말았다. 홋코쿠군은 이어서 코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타카사키 시)으로 진군, 4월 24일까지 성주대리인 하가 시나노노카미(垪和信濃守)를 패주시켜 이 성을 공략했다. 미노와 공략은 마사유키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성의 공략은 사나다군이 주력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이 이전에 마야바시 성(厩橋城: 마에바시 시)도 함락, 누마타 성(沼田城)도 공략당했던 듯 하다. 여기서 홋코쿠군은 코즈케의 주요부를 장악했다.
이 단계에서,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 포위를 개시했다. 4월 29일, 마사유키는 히데요시로부터 「토고쿠(東国)의 관습」인 여자들의 「란도리(乱取り: 인간 사냥)」을 엄격하게 금지하라는 통달을 받았다. 무엇보다, 란도리는 큐슈(九州)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토고쿠에서만 행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발언은 어떤류의 방편으로, 이제부터 토요토미 정권의 영지가 될 호죠령의 황폐화를 최저한으로 줄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군세의 난폭한 행동을 금하는 금제(禁制)를 대량으로 각 촌락 앞으로 발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