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토요토미(豊臣) 정권 아래에서의 사나다(真田) 씨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 토요토미(豊臣) 정권은 여러 다이묘(大名)들을 통제하는 데에 있어서 히데요시(秀吉) 측근인 부교슈(奉行衆)를 「토리츠기(取次)」로 삼아 중개를 담당하게 했다. 토리츠기라는 것은 보통명사로, 일반적으로 손님이나 아랫사람이 방문했을 때에 주인에 대한 중개를 해주는 인물을 가르킨다.
하지만, 토요토미 정권의 「토리츠기」는, 그저 단순하게 히데요시의 명령을 다이묘에게 전한다거나, 다이묘의 요망을 히데요시에게 아뢰는 것 만이 아니었다. 다이묘의 영토 문제를 지원해준다거나, 다이묘가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행동하도록 조언한다고 하는... 상당히 중효한 역할을 맡은 존재로서, 다이묘마다 설정된 히데요시의 측근 가신이었다. 이렇듯 「토리츠기」라는 조언자, 후견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는 「토요토미 다이묘(豊臣大名)」라는... 어느정도의 균질한 존재로 이행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토리츠기」의 존재가 히데요시의 독재의 증좌라 주장하는 논자도 있지만, 「토리츠기」의 전신은 센고쿠 다이묘가 종속 쿠니슈(国衆)마다 붙여둔 토리츠기인 「시난(指南)」이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특이성에 지나치게 구애받는 데에는 찬성할 수 없다. 또, 「토리츠기」의 조언에는 강제력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균질화」가 철저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도 주목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으며, 다이묘 측의 판단에 따랐다. 예를 들자면 사나다(真田) 가문에서는 앞에서 말한대로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면서도 코쿠다카제(石高制)를 채용하지 않고 칸다카제(貫高制)를 사용했다. 즉, 토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타이코검지(太閤検地)」에 의한 코쿠다카제로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나다 가문의 경우, 토요토미 정권과의 최초의 연락역을 담당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토리츠기」를 맡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나가 가문 앞으로 발급한 히데요시 주인장(朱印状)을 담당했던 게 이시다 미츠나리였기 때문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사나다 가문을 이어준 서장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와 관계된 것을 제외하면 사실 노부유키(信幸) 앞으로 된 것만이 남겨져 있지만(이는 제 5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는 사나다 가문 전체의 「토리츠기」가 미츠나리였기 때문이다.
분로쿠 3년(1594) 4월 7일,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사나다 마사유키를 쇼다이부(諸大夫)로 임명할 뜻을 전했다(『駒井日記』). 쇼다이부라는 것은, 조정의 위계에서는 4위, 5위에 봉해진 자를 가르키며, 「쇼다이부나리(諸大夫成)」라는 것은 종 5위하에 봉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는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로부터 받은 통칭인 아와노카미(安房守)를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공인받았으며, 종 5위하라는 위계에 자리잡게 된다. 이어서 동년 11월 2일에는 노부유키, 노부시게(信繁) 형제가 종 5위하 이즈노카미(伊豆守), 종 5위하 사에몬노스케(左衛門佐)로 임관한다. 노부유키의 것은 쿠젠안(口宣案)이 「사나다 가문 문서」에 남겨져 있으며, 노부시게는 『柳原家記録(야나기와라케키로쿠)』에 쿠젠안의 부본(控え)이 기록되어 있다.
토요토미 정권은 여러 다이묘들을 조정의 관위에 따라 서열화하여 통제를 도모하려 했다. 그 서열은, 종래에 있어왔던 셋칸케(摂関家), 세이가케(清華家), 우린케(羽林家), 메이카(名家)와 똑같은 게 아니었다. 고셋케(五摂家)에 토요토미케(豊臣家)를 더해 셋칸케를 격이 다른 것으로 둔 다음에, 서열의 TOP은 「세이가나리(清華成: 부케 세이가케)」였으며, 세이가케와 마찬가지로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코노에타이쇼(近衛大将)가 될 자격을 가진 가격(家格)이다. 다음이 「쿠게나리(公家成)」로 조정의 위계에서 3위 이상이 될 수 있는 자, 그 아래가 「쇼다이부나리」로 4위, 5위의 위계를 얻을 수 있는 자였다. 마사유키는 「쇼다이부나리」를 통탈받고, 노부유키, 노부시게는 종 5위하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나다 가문은 「쇼다이부나리」 다이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덧붙여 서위임관(叙位任官)에 맞춰서는 토요토미 카바네(姓)가 주어졌다. 사나다 일족은 종래의 시게노(滋野) 카바네에서 토요토미 카바네로 바꾸는 형태로, 토요토미 정권에 포섭되어 갔던 것이다. 이 「우지(氏)」는 토요토미 정권이 붕괴된 뒤 시게노로 되돌리게 된다.
◇ 조선(朝鮮) 출병 속의 사나다(真田) 씨
~ 그런데,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텐쇼(天正) 13년(1585)까지는 중국(中国)의 명(明) 정복 계획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른바 「카라이리(唐入り)」이다. 사실 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시절에 구상되었던 것으로, 히데요시가 독창한 게 아니다(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이 배경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천하통일이 된 뒤, 활약의 장을 잃게 된 「병력」들에게 전장을 준비한다는 측면이 지적받고 있다.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의 군대는 촌락을 통해 고용한 「용병(傭兵)」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이는 히데요시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히데요시가 「카타나가리(刀狩り: 칼사냥)」 등에 의해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추진했다고 여겨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카타나가리를 예로 들면, 촌락의 무장해제라 이해되겠지만, 이는 초기의 극히 일부 사례로 한정된다.
중세사회에서는, 카타나(刀)와 와키자시(脇指)를 차고다니는 게 성인 남자라는 증표였다. 촌락에서도 남자의 성인식 때에 「카타나자시(刀指し)」라는 의식을 행했으며, 그가 정규 촌락 구성원임을 보여주었다. 즉, 중세는 백성들도 카타나나 와키자시를 소유하고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기를 차고다니는 것이 당연했다.
히데요시는 그러한 촌락에 무기 제출을 명령했지만, 「카타나, 와키자시, 야리(鑓), 텟포(鉄砲)」라 기록된 법령의 문면과는 달리, 실제로 모인 것은 대부분 카타나와 와키자시로 한정되었으며, 그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주력 무기는 야리, 활, 텟포였는데, 이러한 무기들은 대부분 몰수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카타나와 와키자시와 야리, 활, 텟포의 차이를 또 하나 생각해 보면, 일상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가의 유무이다. 히데요시는 일상적으로 몸에 휴대하는 카타나, 와키자시를 촌락으로부터 빼앗는 것으로 인해, 중세사회의 상식이었던 무력에 의한 분쟁 해결(자력 구제)을 금지함과 동시에, 시각적으로 무사와 백성을 구별시킬 것을 의도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것은 어디까지 정책지향이라는 것이기에, 철저하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근세 촌락에는 대량의 무구(武具)가 남겨지게 된다.
병농분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문제이다.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군대는, 병농분리를 달성한 전업무사에 의한 군대라 여겨지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정책지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군대의 구성원도, 다른 센고쿠 다이묘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 병농분리라는 것은, 에도시대(江戸時代)의 학자가 「센고쿠시대에는 병농미분(兵農未分)이었음에 틀림 없다」고 생각해, 옛날처럼 무사를 재촌(在村)시킨다면 저자거리에 무사를 집주시키는 것 보다는 한(藩)의 재정에 절약이 된다고 주장한 것에서 발단한 것이다.
실제로 병농분리가 이뤄진 것은, 전란의 시대가 종결을 맞이하면서 촌락으로부터 고용된 「용병」을 해고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센고쿠 다이묘와 노부나가, 히데요시는 가신의 저자거리 집주를 지향했지만, 이는 병농분리를 목적으로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른바 근무처에 거주지를 갖게 하는 한편, 처자식을 인질로 받아들이고자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확립한 결과, 「비정규 고용」이었던 촌락의 「용병」은 모두 해고되었으며, 「정규 고용」인 무사가 근무처인 저자마을에 집주하게 되었다. 즉, 병농분리라는 것은, 정책이 아닌 평화의 달성에 따른 결과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야기를 원래대로 되돌려보자. 히데요시는 「카라이리」를 의도하여, 일본 주변 여러 나라에게 복속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소부지(惣無事)」를, 해외로 수출한 것이기도 했다. 즉, 국내전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히데요시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부족이 드러난다. 복속명령은 고산국(高山国: 대만) 등에도 닿긴했지만, 이 시기의 대만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던 상태라, 누구에게 주인장(朱印状)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조선이었다.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에 복속의례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진 「화이질서(華夷秩序)」로 명왕조가 정해놓은 조공무역제도(朝貢貿易制度)에 기반한 것으로, 중국의 황제(華)는 동아시아 여러나라(夷)의 군주를 「국왕(国王)」에 임명하여(책봉), 조공을 하게 하고 무역을 허가한다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일본에게 있어서는, 같은 동아시아라도 바다를 건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의한 「화이질서」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경위를 무시하고, 히데요시는 자신이 중국 황제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조선에게 복속을 요구한 것이다. 복속교섭을 맡은 이는, 조선과의 교역으로 번영한 츠시마(対馬)의 다이묘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였다. 온건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싶었던 요시토시는 조선에는 열도 통일 축하사절을 파견해달라 요구를 했고, 그것을 히데요시에게는 복속의 뜻을 전할 사절단이라 설명했다. 이를 받아들여,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중국 출병의 선진을 명령했는데, 요시토시는 일본군 통과 요청에 대한 요구를 바꿔서 교섭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할 의사 따윈 논외였으며, 군대 통과 따윈 인정할리 없었다. 여기서 「카라이리」는, 당면한 목적이 「조선 출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분로쿠・케이쵸의 역(文禄・慶長の役)의 시작이다.
사나다 씨는 분로쿠의 역 때에, 텐쇼 19년(1591)에 7백여기를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사가 현 카라츠 시)에 재진했다. 여기서는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부자(真田安房守昌幸 同父子)」라 나와있어, 자식인 노부유키(信幸)의 군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나다 가문의 가로(家老)이자 마사유키의 사위가 된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의 가문에서 전래된 각서(覚書)에는 「五百人 真田安房守」라 나와있다. 다만, 분로쿠케이쵸의 역에서 조선 도해를 명령받은 것은 기본적으로 사이고쿠(西国)의 다이묘들이었다. 토고쿠(東国)의 다이묘들은 예비병력이라는 형태로 나고야에 재진하였으며, 분로쿠 2년(1593)에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들이 도해하는 것에 그쳤다.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는 절반 정도의 병력을 보내는 데에 그쳤으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도해는 없었다. 따라서, 사나다 가문도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또, 동원 인력도 사나다 가문의 코쿠다카(石高)를 감안하면 매우 적다. 토요토미 정권의 군역(軍役)은 100석당 다섯명이 본역(本役)이었기 때문에 부자가 합쳐 6만5천석을 영유한 사나다 가문에게 부과된 군역은 3250명이 된다. 그것을 감안하면 1/5정도만 부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나고야까지라고는 해도, 출진을 명령받은 것임에는 틀림 없다. 노부유키는 가신에게 「카라이리」 군역에 응해준 데에 대한 상을 주기도 했다.
분로쿠의 역은 일본측의 우세로 진행되었으며,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략, 평양(平壌)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코니시군은 명의 원군을 얻은 조선 측의 반격을 받고서 전선을 축소하여 명과 강화교섭에 들어갔다. 이 사이의 군사(軍事), 외교에 관한 견해 차이나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코니시 유키나가와,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들 사이에서 매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 갔다.
그러던 중, 분로쿠 연간(1592~96)에 들어서면서,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새로운 정청(政庁)인 후시미 성(伏見城: 쿄토 시 후시미 구) 보수역을 명받았다. 이 보수역은 연년부과되었던 듯 해서 복수의 명령서가 남겨져 있지만, 연차 비정은 어렵다. 가장 큰 보수역을 분담받았을 때에는, 부자 세 사람이서 100석당 2명분의 본역을 맡았으며, 또 국허(国許)에 따라 자재용 목재 150바리 분량의 운송을 명령받은 해도 있었다. 후시미 성 보수역에 대해서는, 노부시게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 4장에서도 후술하겠다.
분로쿠 5년 명의 사자가 히데요시를 찾아와 화친 조건을 전했다.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 책봉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의 공식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사카이(堺)에서의 사자 접대가 있었을 때, 명 측이 코니시 유키나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새롭게 「조선으로부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서장을 덧붙이는 것으로 인해 사태가 급변한다.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명 측이 항복하는 형태에서의 강화라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서의 영토 할양은 대전제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격노했으며, 재차 출병이 결정되었다. 이것이 케이쵸의 역(慶長の役)이다.
이 사이인 케이쵸 2년(1597) 10월, 시모츠케(下野)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가 개역(改易)당했다. 「토리츠기」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에 의한 개혁지도가 오히려 우츠노미야 씨의 중신들의 반발을 사고말아, 가신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게 원인이라 여겨지고 있다. 마사유키는 아사노 나가마사와 함께 사후처리를 맡아, 백성들로부터 연공을 거둬들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나다 가문이 토요토미 정권에서 적지 않았다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케이쵸의 역 도중인 케이쵸 3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사후처리를 맡은 다섯명의 타이로(大老)와 다섯명의 부교(奉行)는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