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로 가는 길
~ 고타이로(五大老), 고부교제(五奉行制)라는 것은 매우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용어이다.
이 다섯명의 타이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다섯 부교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마에다 겐이(前田玄以)로 이뤄져 있다.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생전부터 다섯 타이로가 정권 운영에 참가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섯 타이로는 마에다 토시이에를 제외하면 모두 옛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였으며, 토요토미 가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토자마(外様)에 해당한다. 마에다 토시이에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밑에 있었던 오다 다이묘였지만,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지휘하에 놓여있었기에 역시나 히데요시 입장에서 보자면 토자마였다는 것은 변함없다. 센고쿠 다이묘이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에서든, 토자마가 정권 운영에 관여한 일은 없었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살아있었을 적에는, 다섯 부교를 포함해 토요토미 지키신단(直臣団)에 의해 정권 운영이 이뤄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교묘했던 점은, 나중에 「고타이로」가 되는 다섯 가문과 조카인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들인 코바야카와(小早川) 가문을 「세이가나리(清華成)」 다이묘의 가격(家格)과 나란히 세워, 그들에게 재경(在京)을 명령한 것이다. 센고쿠 다이묘라는 것은, 영지에 머물면서 직접 통치를 담당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귀국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는 명령은 매우 지독한 것이었다. 이것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였다면, 슈고(守護)에게는 재경 원칙 또는 재카마쿠라 지시가 있긴해도, 쿄(京), 카마쿠라(鎌倉)에서 정권 운영을 맡을 지위에 오를지, 아니면 바쿠후, 카마쿠라후(鎌倉府)와 밀착된 정치관계를 쌓아올리는 게 가능했다. 즉, 중앙정계에서 활약할 장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토요토미 정권의 「세이가나리」 다이묘는 달랐다. 재경을 명령받았으면서도 정권 운영을 맡는 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징조도 일절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사정이 달라졌다. 여기서 처음으로 고타이로, 고부교라는 제도가 움직이기 시작해, 고타이로가 정권 운영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히데요시의 유언이 복수 남겨져 있었으며, 게다가 상호 모순되는 내용을 가졌다는 점이다. 또, 일부 문서들 중에는, 근세 초기의 위작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후계자인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간... 히데요시가 어떠한 체제에 의한 정권 운영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를 후시미(伏見)로 보내고, 마에다 토시이에를 히데요리의 모리야쿠(傳役)로 임명해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도 사실은 어렵다. 토요토미 정권의 정청(政庁)은 기본적으로는 후시미였으며, 그렇다고 한다면 이에야스에게 후사를 맡긴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의 토요토미 가문 가독(家督)은 히데요리였기 때문에, 정청은 오오사카로 옮긴 것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케이쵸(慶長) 5년(1600)에는 여러 다이묘들은 저택을 후시미에서 오오사카로 이전시키고 있다. 정치의 중심은 여기서 오오사카로 옮겨진 것이다. 이에야스는 홀로 후시미에 남겨진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으로부터의 철수라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있는 것도 있어서, 히데요시의 죽음이 공표된 것은 케이쵸 3년말의 일이었다. 히데요시 사후의 정국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유명(遺命)을 깨고, 여러 다이묘들과 멋대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 자주 거론된다. 실제로, 이에야스에게 이를 힐문하는 사자가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정치문제로 삼고있긴 했지만, 사실 이 혼의(婚儀)가 진행된 것은 히데요시의 죽음이 진행되기 전이었다. 히데요시가 「제멋대로 혼인」을 맺는 것을 허락해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죽음을 모르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히데요시의 허가를 얻은 것이라고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비상(秘喪)」이라는 타이밍을 제대로 찔렀다는 논조로 자주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인척관계를 구축한 다이묘들이 바로, 이른바 「무단파(武断派)」에 속해있으면서, 조선(朝鮮) 출병을 통해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문치파(文治派)」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던 다이묘였다. 이에야스는, 새로운 파벌을 형성한 다음, 남은 네 사람의 타이로와 다섯 부교로부터의 힐문을 멋지게 모면하는 데에 성공했다.
힐문이 흐지부지된 배경에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석에 누워있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로부터 히데요리의 모리야쿠로 지명되긴 했지만, 그 자신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이쵸 4년(1599) 윤 3월 3일 히데요시의 뒤를 따르기라도하듯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그를 대신해 새롭게 타이로 자리에 앉은 것은 토시이에의 적자인 토시나가(利長)였다.
토시이에가 죽은 다음날에 발발한 것이, 이른바 「칠장 습격 사건(七将襲撃事件)」이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가 거병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배척하려고 군세를 움직였다. 사실상의 군사 쿠데타였다. 이때, 미츠나리는 정적인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달아난다는 기책(奇策)을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카사야 카즈히코(笠谷和比古) 씨가 밝힌대로, 미츠나리가 달아난 것은 후시미 성 안의 지부쇼우마루(治部少輔丸: 지부쇼우는 미츠나리의 관위)였는데, 요컨데 자신의 저택으로 달아났다는 게 정확하다.
다만, 이 사건의 재정(裁定)에 타이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나섰고, 미츠나리에게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 시가 현 히코네 시) 칩거를 명령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꽤 어렵다. 토요토미 정권의 정책 기조(基調)는 「시센 금지(私戦禁止)」였기에, 벌을 받아야할 이는 습격을 감행한 「칠장(七将)」이 아니어선 안 된다. 하지만, 처벌받은 것은 미츠나리 뿐이었다. 이 일로 인해, 미츠나리는 정계로부터 은퇴에 내몰리게 된다.
◇ 정권 탈취의 포석을 깐 이에야스(家康)
~ 최종적으로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붕괴하여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성립한다는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토요토미 가문 멸망을 향한 포석(布石)을 착실히 깔아두고 있었다... 라는 역사 파악에는 반대로 신중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결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할 정도로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며, 거기에는 수많은 위험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점의 이에야스는 정권 탈취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앞에서 말한대로, 토요토미 정권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을 부교닌(奉行人)들이 「토리츠기(取次)」로서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전달한다는 시스템이 기능을 하고 있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토리츠기」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최종적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의해 권력을 탈취한 것이라 지적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실각시킨 의의(意義)는 크다. 어째서인가 하면, 미츠나리는 무엇보다 수많은 다이묘들의 「토리츠기」를 담당하고 있던 부교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지금까지 미츠나리의 지도를 받고 있던 여러 다이묘들은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새로운 파이프역을 찾기 위해 분주해질 필요가 생기게 된다. 히데요리(秀頼)가 아직 어린 이상, 「토리츠기」를 이에야스와 그의 입김이 닿고있는 자가 제압해버린다면, 뜻밖에도 정권 탈취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가 중용한 부교닌 중 한 사람이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장인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였다. 오오타니 요시츠구에 대해서는 제 4장에서 상세히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정국(政局)과 관련된 이야기로 한정하겠는데, 이에야스가 눈을 돌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요시츠구가 병으로 인해 케이쵸의 역(慶長の役)에 참전할 수 없어, 이 무렵에야 겨우 정권에 복귀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요시츠구는 행정수완이 뛰어난 「문치파(文治派)」였지만, 케이쵸의 역으로 피폐해진 「무단파(武断派)」의 미움을 사지는 않았다. 중립적인 부교닌이라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또, 요시츠구 자신도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체제를 굳히는 게,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따라서 요시츠구는 토요토미 정권 안에서 이에야스와 가까운 정치가라는 입장을 확립해 갔다.
케이쵸 4년(1599) 8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가 부친인 토시이에(利家)의 유언을 어기고 영지인 카가(加賀)로 돌아가버렸다. 다섯 타이로(大老)는 재경(在京), 재판(在坂)을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히데요시의 명령 그 자체를 어긴 행위였다.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는 즉시 마에다 토시나가, 나아가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에게도 모반 혐의가 있다고 이에야스에게 보고했으며, 힐문을 받은 토시나가는 생모인 호슌인덴(芳春院殿: 오마츠)을 인질로서 에도(江戸)로 보냈다. 타이로에 지나지 않았던 이에야스의 본거지에 인질을 보낸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이다. 이에 당황해서 아사노 나가마사도 가독을 적자인 요시나가(幸長)에게 물려주고 은거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고타이로(五大老), 고부교제(五奉行制)는 빨리도 형해화(形骸化)한 것이다.
같은 해 9월,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오네)의 양보를 얻어, 결국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니시노마루(西の丸)로 입성한다. 여기서 히데요시의 유언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토시나가와 마찬가지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도 8월에 새로운 영지인 아이즈(会津)로 내려갔다. 에치고(越後)에서 영지 교체를 명령받은 카게카츠는 정치에 전념할 예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익 케이쵸 5년에 들어서자, 이에야스로부터 고문승인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를 통해 상경 명령이 당도했다. 여기에 대해,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는 이에야스 측의 요구와 힐문을 일축하는 서장을 보냈다. 이른바 「나오에죠(直江状)」이다.
나오에죠에 대해서는 위작설이 주류이긴 하지만, 필치나 종이의 질을 통해 근세 초기의 것이라 여겨지는 사본이 존재하고 있어, 바탕이 되는 원본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틀림 없다. 지나칠 정도로 달필이라 일컬어지는 부분도 많지만, 필자의 감각으로는 당시의 문장이라 봤을만큼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전사(転写)한 과정에서 가필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대부분은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여기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사이쇼 죠타이가 이에야스가 중용한 부교로서, 마시타 나가모리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지난해 말에 일어난 타이로 우키타(宇喜多) 가문의 집안 소동에 대한 대응으로 이에야스에게 불신감을 품었다고 여겨지지만, 친밀한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에죠의 문면을 본 이에야스는 격노했다. 그렇다기 보다도 격노한 척을 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에야스의 목적은 타이로의 이름 아래에 토요토미군을 움직이는 데에 있었기에, 사실을 말하자면 토시나가가 상대였어도 상관없었다. 호슌인덴의 결단에 의해, 마에다 가문이 즉시 순종할 뜻을 밝혀왔기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이 상대를 바꾼 것 뿐이었다.
케이쵸 5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의 타이로로서 여러 다이묘에게 군사동원을 걸어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노부유키(信幸)에게도 출진 명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