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를 향한 정치 동향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는 어렵다.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성립이라는 미래도에서 거슬러 올라가보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병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의 다이묘(大名)로 발탁되었다고는 해도, 코쿠다카(石高)는 19만 4천석으로 결코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다, 칩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와 맞설 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에야스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토요토미(豊臣)의 정규군이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는, 정규군의 지휘를 맡는 것 만으로 충분한 정치적 이미가 있었다. 그것은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군권 대행자라는 것을 여러 다이묘에게 알리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이후의 경위는 상정 밖이었다 생각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먼저,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중용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설득에 성공했다. 그리고 모리(毛利) 씨의 외교승인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를 끌어들여 타이로(大老)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오오사카(大坂)로 입성시켰다. 이 일로 인해, 히데요리라는 「옥(玉)」은 미츠나리의 수중에 떨어졌다. 케이쵸(慶長) 5년(1600) 7월 17일의 일이다. 같은 날, 타이로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부교(奉行)인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의 손에 의해 「나이후치카이노죠죠(内府ちかいの条々)」라 불리우는 탄핵문이 작성되었다. 이 결과, 토요토미 정권의 정규군 지휘관이라는 지위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모리 테루모토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5일전인 12일, 마시타 나가모리는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병에 의해 행군을 멈추었다는 것, 그리고 이시다 미츠나리 출진에 관한 소문을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나가이 나오카츠(永井直勝)에게 전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이른 단계에서 미츠나리, 요시츠구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마시타 나가모리는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에 따르면 인맥적으로 이에야스와 가까웠기 때문에,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사태가 진전되고 있는 카미가타(上方)의 정세에 휩쓸려가면서도, 이에야스와 내통하는 것에 의해 보험을 들었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요시츠구의 모반을 여러 다이묘들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타이로 모리 테루모토의 존재를 경시했다는 것이리라.
이러한 경과를 정리해보면,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것은 결국 토요토미 정권의 정규군들끼리의 충돌임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이른바 동군에 붙든, 서군에 붙든, 어느쪽이든 정당성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타이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토벌을 따르기 위해 아이즈(会津)를 향해 출발했다. 거기서 7월 17일자로, 이에야스의 위약을 비난하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외한 세 부교의 연서장이 날아들었다. 오오사카에서의 거병과 타이로 모리 테루모토, 부교인 이시다 쪽(이른바 서군) 참가를 요청한 것이다. 답장은 21일자로, 그것을 미츠나리가 받은 게 27일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즉각 답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답장 속에서 마사유키는, 사전에 상담이 없었던 것을 미츠나리에게 나무랐던 듯 하기 때문에, 평소에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마사유키의 딸인 쵸슈인덴(趙州院殿)을 아내로 맞이한 우다 요리츠구(宇多頼次)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친인 마사츠구(正継)의 양자가 되어 있었다. 즉, 이시다 미츠나리는 마사유키의 「토리츠기(取次)」였을 뿐만 아니라, 인척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사유키의 답장을 받은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들의 거취를 판단할 수 없는 단계에서는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 대해서는 걱정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거병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서는 당신에게만 털어놔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고 간절하게 변명하고 있다.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마사유키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로의 연락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미츠나리가 제시한 조건은, 코모로(小諸), 후카시(深志: 마츠모토 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스와(諏訪)를 준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시나노(信濃) 북부의 절반을 주는 것에 가까웠다. 그후, 미츠나리는 모리 테루모토 들과 협의하여 카이(甲斐), 시나노 두 지역으로 조건을 올렸다.
마사유키의 서군 가담의 이유는 다양한 추측이 가능한데, 자신과 미츠나리, 우에스기 카게카츠, 차남인 노부시게(信繁)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인간관계가 크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 영지를 확대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7월 24일까지 귀진했다. 한편, 적자인 노부유키(信幸)는 이에야스의 편이 되어 사나다 부자의 거취는 나뉘게 된다. 시모츠케(下野) 이누부시(犬伏: 사노 시)에서 부자간의 밀담이 이뤄졌다고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이누부시의 작별(犬伏の別れ)」이라 일컷는다. 이 점은 사나다 가문과 관련된 군기물류보다도, 다른 다이묘들의 가보(家譜)류를 보는 쪽이 객관적일 것이다. 『森家先代実録(모리케센다이지츠로쿠)』는 「이누부시 마을(犬伏之町)」에서 되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改撰仙石家譜(카이센센고쿠카후)』는 코즈케(上野) 이타하나(板鼻: 안나카 시)를 경유해 사노가와(佐野川)에 도착했다가 은밀히 되돌아갔다고 한다. 사노가와가 사노(佐野)를 가르키는 것이라면 이누부시라 봐도 좋을 것이다. 덧붙여 7월 말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마사유키에게 서장을 보내어 사나다 씨의 처자식을 보호하고 있음을 전했다.
8월 24일, 이에야스는 적자인 히데타다(秀忠)에게 대군을 맡겨, 토산도(東山道)를 진군케 했다. 시나노에서 유일하게 이시다 편에 선 사나다 마사유키 토벌을 위함이었다.
9월 3일, 치이사가타(小県)로 밀고 들어온 히데타다군에게, 마사유키가 적자인 노부유키를 통해 항복을 신청했기 때문에, 히데타다는 이를 받아들였다. 마사유키는 5일이 되어서야 겨우 토이시 성(砥石城)을 넘겨주었다. 히데타다는 토이시로 그곳 지리에 밝은 노부유키를 들여보낸 뒤, 안심하고 서쪽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직후, 마사유키는 앞에 했던 말을 뒤집어 우에다(上田)에서 농성하기 시작했다. 항복신청은 방비를 굳히기 위한 시간벌이었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시간적으로 봐서 우에다 농성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히데타다를 도발해, 오히려 우에다 성(上田城)을 공격하게 하기 위한 책략이 아니었을까? 분노한 히데타다는 공격을 가했지만, 공략에 실패한다. 애당초 공성에는 시간이 걸리는 게 통례였기 때문에, 즉시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게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이에야스로부터 급시 상경하라는 명령이 도달해 히데타다는 8일, 우에다 성 공략을 단념한다.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는 『三河物語(미카와모노가타리)』 에서,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혼다 마사노부(本田正信)가 젊은 히데타다의 신임을 독점해 전투를 주도한 것이 우에다 성 공략에 실패한 원인이라 매도하고 있다.
히데타다 쪽의 사정이 있었다고는 해도, 또 다시 마사유키는 토쿠가와군을 쫓아냈다. 이것이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이다. 이 전투도 있어서인지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에 늦게 당도해버리고말아, 이에야스의 분노를 샀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히데타다는 당초의 예정대로, 우에다 공격을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이에야스 자신이 상황을 잘 못본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쪽이 패배했기 때문에, 마사유키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근년에 들어, 세키가하라 전투 연구는 급속도로 진전했다. 시라미네 쥰(白峰旬) 씨에 따르면, 서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신이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은 사실이라 해도, 히데아키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배신을 단행했다고 한다. 통설에서는 히데아키는 동군으로부터 텟포(鉄砲) 쏘는 소리에 동요하여 겨우 배신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의 히데아키는 개전 직후에 배신해 오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를 무찔렀으며, 서군은 즉시 총붕괴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제부터라도 검증을 해볼 필요가 있는 논의이긴 하지만, 간단하게 다뤄둔다.
세키가하라의 패전 소식을 듣고, 마사유키와 노부시게 부자는 우에다 성을 토쿠가와 쪽에게 인도했다. 우에다 성에는, 약속대로 노부유키가 들어갔다.
◇ 코야 산(高野山) 유배와 죽음
~ 항복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와 노부시게(信繁) 부자는, 노부유키(信幸) 및 노부유키의 장인인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의 주선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만, 코야 산(高野山)으로의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로 처형당한 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라는... 이른바 주모자로 한정되었다.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발을 묶었을 뿐인 마사유키를 처형하는 게 기정노선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요컨데, 그렇게까지 거물인가... 라는 것이다.
마사유키, 노부시게 부자는 불과 열여섯명의 가신만을 데리고 12월 13일에 코야 산에 올랐다. 산 안에서는 사나다 가문의 보다이쇼(菩提所)인 렌게죠인(蓮華定院)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쿠보슈(供奉衆)의 필두는 가로(家老)인 이케다 츠나시게(池田綱重)였기에, 가까운 가신만을 데리고 왔던 것은 아니었다. 또, 이 쿠보슈는 그후에도 전원이 마사유키 부자를 따랐던 게 아니다. 이이지마 니치노죠(飯島市之丞)는 케이쵸(慶長) 6년(1601) 8월에 우에다(上田)로 귀환하여 노부유키(信之: 이때는 信幸에서 信之로 개명)를 모셨다. 덧붙여 「사나다 가문 문서」에서 전하는 열여섯명이라는 인원수는, 아직 진지로(甚次郎)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이케다 츠나시게를 나가토노카미(長門守)라 쓰고 있다. 나중에서야 만들어진 각서(覚書)라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그후, 산기슭의 쿠도야마(九度山: 와카야마 현 쿠도야마 쵸)에서 사는 게 허락되었다. 마사유키의 정실(正室)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는 우에다에 남겨졌지만, 측실(側室)은 그를 따라갔던 듯 하며, 마사유키는 쿠도야마에서 딸을 얻었다. 노부시게도 정실인 치쿠린인덴(竹林院殿: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 이하의 여성을 동반했다. 코야 산은 여성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이었기 때문에, 데리고 온 여성들은 모두 산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런 점이 고려되었던걸까? 어쨌든,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것 보다도, 사나다 부자의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마사유키는 이곳에서 카오(花押)를 타케다(武田) 가신 시절의 것으로 되돌렸다.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카오를 모방한 카오를 사용하는 것에 의해, 지난날을 떠올리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치는 움직이고 있었으며, 케이쵸 8년 2월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관하여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케이쵸 10년에 일찍부터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천하인의 지위가 토쿠가와 가문으로 옮겨갔음을 명시했다. 이 일로 인해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처우가 어찌될지가 여러 다이묘들의 관심사가 되어 갔다. 쿠도야마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시대에 뒤쳐진 듯한 상황에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사유키는 가만히 칩거만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케이쵸 8년 3월엔 재빠르게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를 통해 사면운동을 전개하였고, 그에 대한 기대를 형인 노부츠나(信綱)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신코지(信綱寺)의 주지에게 전했다. 하지만, 상황은 마사유키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혼다 마사노부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쿠도야마에서의 생활은 지독했다. 국가의 허가를 얻어 지원을 받고있다고는 해도, 이쪽 저쪽에 빚을 지고 있었다. 마사유키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셋째 아들인 쿠로도 마사치카(蔵人昌親)에게 40냥의 융통을 의뢰했다. 40냥이면 당시로선 꽤 큰돈이다. 마사치카는 급한대로 20냥을 마련해 사나다 가문의 가로인 하라 마사사다(原昌貞)를 통해 마사유키에게 보냈지만, 마사유키는 답장에서 남은 20냥을 보내라고 제촉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20냥을 융통해줘도, 쿠도야마에서 얻은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서둘러 금년의 보조금(合力金)을 보내도록 요구했다. 이 서장의 날짜는 해가 막 바뀐 시점인 정월 5일자로 되어있기에 빚 갚는 데에 얼마나 초조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때, 이케다 츠나시게와 담합하여 보내어줬으면 한다고 말하고 있기에, 츠나시게는 일시적으로 귀국해 있었던 듯 하다. 이때, 통칭이 진지로에서 나가토노카미로 바뀌었기 때문에, 귀국했을 때에 노부유키로부터 나가토노카미라는 칸도(官途)를 받았을 것이다.
케이쵸 12년(1607) 9월 21일, 마사유키는 렌게죠인에 자신과 정실인 야마노테도노의 생전 공양을 의뢰했다. 이때, 이치오칸세츠코지(一翁干雪居士)라는 계명(戒名)이 생겼다. 야마노테도노는 호게츠묘칸신뇨(宝月妙鑑信女)였다. 어쩌면 이 무렵에는 건강이 나빠졌을지도 모르겠다. 노부유키에게 보낸 서장에는 「작년에 병이 들었을 때처럼 올해도 성가시게 굴어 미안해 하고 있음을 생각해주길 바라오. 이미 십년이 넘게 지났으니 한번은 직접 만나고 싶다 생각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소」라는 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또, 만년의 서장은 노부시게가 대필해주어 「이제는 나이가 들다보니, 끈기가 부족해졌나보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케이쵸 16년(1611) 6월 4일, 「신겐의 두 눈」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라 칭송받았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유배지인 쿠도야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예순다섯. 쵸고쿠지덴이치오칸세츠코지(長国寺一翁干雪居士)라 한다. 쿠도야마 신덴안(真田庵) 및 보다이지인 쵸코쿠지(長谷寺: 우에다 시 사나다 쵸)에 묘가 있다.
마사유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혼다 마사노부는 마사유키를 「公儀憚りの仁」라 인식하고 있었다. 즉, 마사유키를 사면해줄 것 같은 공기는 바쿠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장례를 치러도 괜찮을지 바쿠후 측에 넌지시 물어보라고 노부유키에게 충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