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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5 (0) 2016/12/16 PM 05:28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토요토미(豊臣) 정권과 장인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부친인 마사유키(昌幸)가 토요토미(豊臣) 정권에 종속된 뒤, 이번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곁으로 인질로 보내지게 되었다. 하지만, 텐쇼(天正) 17년(1589)에 여러 다이묘(大名)들의 아내나 측실이 재경(在京)을 명령받았으며(『多聞院日記』), 케이쵸(慶長) 5년(1600)에는 생모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가 오오사카 성(大坂城) 아래에 있는 사나다 저택에 들어간 게 확인된다. 따라서, 노부시게가 인질로서 대우받았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실은,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에서 노부시게는 마사유키, 노부유키(信幸)와 마찬가지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참진하고 있었다. 그때의 신분은 「우마마와리(馬廻)」라 기록되어 있다(『大鋒院殿御事跡稿』). 즉, 노부시게는 인질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지키산슈(直参衆: 직속 가신)였던 것이다.

 분로쿠 3년(1594) 11월 2일, 형인 노부유키와 동시에 종 5위하 사에몬노스케(左衛門佐)로 임명되었다. 토요토미 다이묘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으로서, 착실하게 기반를 굳히고 있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연차(年次)는 알 수 없지만, 정실(正室)로서 토요토미 정권의 부교닌(奉行人)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当代記』 『左衛門佐君伝記稿』).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출신은 분고(豊後)설, 오우미(近江)설 등 다양한 설이 있었는데, 근년의 연구에 의해, 쇼렌인몬제키보칸 타이친(青蓮院門跡坊官泰珍)의 자식으로, 모친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오네)를 모셨던 뇨보(女房) 「히가시도노(東殿)」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요시츠구(吉継)의 「吉」도 히데요시로부터의 편휘(偏諱)였을 것이다. 즉, 요시츠구는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셨던 가신이었던 것이다. 텐쇼 17년 12월이라는 이른 단계에서,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을 받았다는 게 그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중요 인물의 딸을 노부시게는 정실로 맞이한 것이다. 물론 이는 히데요시의 허가를 얻었을 것이기에, 노부시게가 히데요시의 눈에 들었음을 엿볼 수 있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라 하면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분전한 무인으로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본령(本領)은 행정 수완에 있었으며, 경력을 보더라도 무공은 적다. 호죠(北条) 씨를 멸망시킨 다음에 데와(出羽)에서 검지(検地)와 카타나가리(刀狩り)를 실시하였으며, 히데요시의 첫 조선 출병인 분로쿠의 역에서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 보급과 점령지 행정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요시츠구는 분로쿠의 역 이후, 사료로부터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는 이전부터 앓고있던 병세의 악화에 따른 것이었던 듯 하다. 요시츠구는 실명으로 바꿔 「하쿠토(白頭)」라 서명한 문서를 발급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새치머리가 많았던 것을 호(号)로 사용했으리라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요시츠구의 경우는 「악창(悪瘡: 피부병)」을 앓고있었음이 사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혼간지(本願寺)의 『宇野主水日記(우노몬도닛키)』에 따르면, 텐쇼 14년에 「센닌기리(千人斬り)」라 불리운 츠지기리(辻斬り: 노상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베는 행위) 사건이 일어났다. 소문으로는, 범인은 요시츠구였으며, 천명의 피를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어 행한 살상행위였다고 한다. 일의 진위여부는 따로 두더라도, 요시츠구의 병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악창」이라 나와있기 때문에, 요시츠구의 병은 한센병(중세에는 나병이라 불렀다)이라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확정할 수 없다. 요시츠구의 이미지는 하얀 두건을 뒤집어 쓴 부장(部将)이라는 것이 있는데, 앞에서 말한 「하쿠토」와 연결짓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근세에 성립된 《関ヶ原合戦図屏風》에서는, 요시츠구는 하얀 두건차림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는 막말(幕末)에 오치아이 요시이쿠(落合芳幾)가 그린 우키요에(浮世絵)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하쿠토」와 병을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중세에서의 나병(らい病)은 전생의 악행이 저주로 나타난 업병(業病)이라 여겨지고 있었기에, 심하게 차별받고 있었다. 여러 다이묘들이 작성한 기청문(起請文)에 「만약에 이 서약을 깨면 신벌(神罰)을 받아 나병에 걸리게 된다」 같은 문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것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에서조차 헤이세이(平成) 8년(1996)이 되어서야 겨우 한센병 환자의 격리정책을 정한 「라이 예방법(らい予防法)」이 폐지된 것을 통해서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활동을 통해서는 동료들로부터 차별받은 모습은 엿볼 수 없다. 

 만약 요시츠구가 병으로 눕지 않았더라면, 다섯 부교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딸이 우다 요리타다(宇多頼忠), 요리츠구(頼次) 부자를 통해 이시다 미츠나리와 인척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부시게도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과 인척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노부시게는 우에다(上田) 시절에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홋타 사쿠뵤에 오키시게(堀田作兵衛興重)의 누이동생과, 타카나시 나이키(高梨内記)의 딸 사이에서 딸을 얻었는데,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측실(側室)이라는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홋타 사쿠뵤에의 누이동생과의 사이에서 장녀인 스헤(すへ)와 차녀인 오이치(於市), 타카시나 나이키의 딸과의 사이에서 셋째 딸인 오우메(阿梅)와 넷째 딸인 아구리(あぐり)가 태어났다. 

 타카나시 나이키의 딸을 측실로 맞이한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카와하라 츠나노리(河原綱徳)가 편찬한 사나다 가신들의 전기(伝記) 『本藩名士小伝(혼한메이시쇼덴)』(飯島文庫)에 따르면, 나이키의 적자인 우네메(采女)는 노부시게의 「우바(姆: 유모. 보모)」였다고 한다. 남성이 유모를 맡았을리가 없다는 것이라 여긴 세대의 관점을 통해, 이는 우네메와 노부시게가 젖형제(乳兄弟)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나이키는 노부시게의 모리야쿠(傳役)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이키의 딸과 맺어졌을 것이다. 

 

 

 

◇ 우마마와리(馬廻) 노부시게(信繁)의 지행지(知行地)와 그 지배

~ 분로쿠(文禄) 연간(1592~96)의 정월 8일, 사나다(真田) 가문이 후시미 성(伏見城) 보수를 명령받았을 때에,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도 마사유키(昌幸), 노부유키(信幸)와 함께 보수역을 부과받았다. 이는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노부시게를 「보수역」을 맡는 게 가능한 존재라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부시게가 토요토미 정권으로부터 받은 영지를 영유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마마와리(馬廻)였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후시미 성의 보수역은 100석당 두 사람이라는 것이 본역(本役)이었음이 여러 사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즉, 50석당 한 사람이다. 이때, 사나다 부자 세 사람은 합계 1680명을 부과받게 된다. 덧붙여, 노부유키를 「반역(半役)」「1/5역」으로 하라는 명령서도 남겨져 있는데, 보수 개시일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해의 것이었으리라. 1680명은 사나다 가문이 맡은 본역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실은 토요토미 다이묘의 코쿠다카(石高)를 총망라한 확실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나다 가문에 대해서는 『恩栄録(온에이로쿠)』를 통해 마사유키의 우에다(上田)령 3만 8천석, 노부유키의 누마타(沼田)령 2만 7천석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를 통해, 무역분(無役分)... 즉, 공제분을 제외한 코쿠다카가 역부과치가 된다. 다만, 사나다 가문에는 무역분이 설정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모두 역부과치로 보도록 하자.

 그러면 마사유키는 3만 8천석이니 760명, 노부유키는 2만 7천석이니 540명이 되니, 모두 합쳐 1300명이 된다. 덧붙여, 노부유키는 반역을 부과받았을 때에 270명, 1/5역이 부과되었을 때에 110명의 동원을 명령받았기 때문에, 숫자는 거의 맞어떨어진다. 『온에이로쿠』에 기록된 코쿠다카는 신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남은 380명은 어디서 온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당연히, 아테도코로(宛所)에 기록된 남은 한 사람인 노부시게가 된다. 애당초, 보수역을 부과하지 않았다면, 노부시게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노부시게의 코쿠다카를 계산해 보면, 1만 9천석이 된다. 노부시게는, 우마마와리로서 1만 9천석을 받았던 것이다.

 옛 영지인 야시로(屋代)령은 토요토미 정권 시기에 우에스기(上杉) 씨에게 되돌려 주었다는 것이 최신 연구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노부시게는 지행 1000관문의 카에치(替地)를 어딘가에서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신을 부양할 수 없다. 노부시게는 텐쇼 18년에 안나카 헤이조(安中平三)에게 「성씨(名字: 안나카 성을 허락받거나 혹은 편휘)」를 주었다. 노부시게에게는, 확실히 가신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 신세를 지고 있던 둘째 도련님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장소는 우에다 영내가 아니었을까? 토요토미 정권기에 3만 8천석이었던 우에다령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 이후, 사나다 가문이 겐나(元和) 8년(1622)에 마츠시로(松代)로 전봉()되었을 때, 6만 5천석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이 사이, 우에다령을 계승하고 있던 노부유키가 영지 변경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의 증가분은 나왔을테지만, 2만 7천석 증가라는 것은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많다고 생각한다(누마타령은, 2만 7천석에서 3만석으로 증가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6만 5천석에 노부시게의 영지 1만 9천석이 포함시킨다면 어떨까? 즉, 마사유키의 3만 8천석이라는 것은, 우에다령(시나노 치이사가타 군) 전부의 코쿠다카가 아니라, 따로 노부시게의 영토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노부시게가 발급한 서장을 보면, 마에야마(前山: 우에다 시)에서 채취한 옻을 다른 사나다 가문의 가신에게 보낸 게 있다. 역시나, 노부시게는 우에다에 자신의 영지가 있었던 듯 하다. 1만 9천석 대부분은 우에다에 소재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또, 노부시게는 우마마와리로서 후시미나 오오사카에 틀어박혀있었을 것이기에, 쿄(京), 오오사카 주변에 자이후료(在府料)가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도 1만 9천석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다만, 노부시게는 그 지행지를 자신의 가신에게만 다스리게 한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부친인 마사유키의 가로(家老)인 하라 마사사다(原昌貞)에게 영지를 공들여 조사하여, 주인이 없는 장소에는 백성을 살게 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해줬으면 하고 요구하고있다. 마사사다가 무사히 수배해놨다고 보고하자, 노부시게는 금후에도 문제가 없도록 부탁한다고 거듭 의뢰하고 있다. 

 지행지로부터의 수확물에 대해서도, 대신 관리하고 있는건 하라 마사사다였다. 노부시게는 만약 우에다에서의 매매가가 싸질 것 같으면 서둘러 매각해 자신에게 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코즈케(上野)의 노부유키령으로부터 쌀가마니를 운반할 때에는, 자신의 쌀가마니도 함께 옮겨달라고 요청, 만사 잘 풀리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마사사다에게 부탁하고 있다.

 하라 마사사다는 마사유키 아래에서 경리 쪽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흔적이 있어, 그것이 이러한 실무를 맡긴 이유였을 것이다. 거기다 노부시게령의 경리 일기는, 역시나 마사유키의 가신인 세키 카쿠자에몬(関角左衛門)이 노부시게에게 보내고 있었고, 노부시게는 그 내용을 후시미에서 확인하고 있다. 즉, 노부시게는 우에다에서의 지행지 경영을 마사유키의 가신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시게는 후시미와 오오사카에 독자적인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인 케이쵸(慶長) 5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의 마사유키의 서장에 따라면, 토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오오사카에서 저택을 배령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직접 배령한 게 아니라, 마사유키를 통한 배령이었다. 거기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노부유키, 노부시게 쌍방의 저택을 받아, 살기 좋은 저택을 노부유키에게, 거주하려면 개축이 필요한 저택을 노부시게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견, 부친의 비호 아래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는 노부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수속을 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은 마사유키에게 일괄하여 주었던 듯 하다. 즉, 노부시게는 토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저택을 하사받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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