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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6 (0) 2016/12/16 PM 10:34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히데츠구 사건(秀次事件)」과 노부시게(信繁)

~ 확실한 사료로 뒷받침할 수는 없지만,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칸파쿠(関白)인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가 히데요시(秀吉)에게 살해당한 뒤(통칭 「히데츠구 사건」), 그의 딸을 숨겨준 뒤에 측실(側室)로 맞이했다고 한다. 제 3장에서 말한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사를 보충해주는 것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에, 「히데츠구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 보고 싶다.

 토요토미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조카로,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칸파쿠에 임관했다. 계기는, 텐쇼(天正) 19년(1591) 8월에 히데요시의 아들인 츠루마츠(鶴松)가 세살이라는 나이로 요절한 데에 있었다. 이해 정월에 히데요시의 이부 동생인 토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가 죽어, 이치몬(一門)이 적었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이상의 충격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정권을 이치몬으로 굳히기 위해, 조카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서둘러 칸파쿠 자리에 앉혔다. 이후, 히데요시는 은퇴하여 칸파쿠의 호칭인 「타이코(太閤)」라 불리우게 된다. 덧붙여, 타이코라 하면 일반적으로 히데요시를 가르키곤 하지만, 이는 칸파쿠를 사퇴하여 그 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인물에 대한 존칭으로, 히데요시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호칭은 아니다. 

 이 일로 인해, 칸파쿠, 셋쇼(摂政)는 토요토미 가문의 세습으로 한다는 히데요시의 의향이 보여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칸파쿠가 되었다고 해서, 히데츠구는 권력을 손에 넣었던 게 아니었다. 실권은 어디까지나 타이코 히데요시에게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히데요시가 갖고있던 권력이라는 것은, 칸파쿠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히데요시의 군사력, 정치력에 의해 획득, 유지된 것이다. 

 그런데, 히데츠구의 명운은 분로쿠(文禄) 2년에 급변하게 된다. 이해 8월 3일,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淀殿: 챠챠)가 둘째 아들인 오히로이(お拾)... 즉,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낳았기 때문이다. 대망하던 아들 출산이었다.

 한편, 히데츠구도 4월 1일에 아들을 얻었는데, 6월 6일에 요절하고말았다. 그로부터 4개월 뒤, 8월 초두의 히데츠구의 모습에 대해, 쿠게(公家)들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면에서 밸런스가 망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9월 5일,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일본을 5분할하여, 4/5를 히데츠구에게 주겠다는 당치 않은 안을 꺼냈다. 물론, 남은 1/5는 히데요리에게... 라는 것이었으리라. 히데츠구는 익일부터 아타미(熱海)로 온천 치료를 위해 떠날 예정이었으며, 심신이 모두 지쳐있는 데에 잘 듣는다는 제안이었다. 

 이사이, 히데요시는 크게 들떠있었는데, 히데츠구의 이상을 신경쓰고 있었던 듯 하다. 10월 1일, 히데요리와 히데츠구의 딸 사이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아직 히데츠구는 아타미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독단이었다. 히데요시로서도, 뇌리에 장남인 츠루마츠의 이른 죽음이 스쳤을 것이며, 모처럼 히데요리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불안정화해서는 깡그리 사라지게 된다.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뒤, 완만하게 히데츠구로부터 칸파쿠직을 계승하는 형태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분로쿠 4년(1595) 7월 3일, 히데요시와 히데츠구의 「불화」는 뭇사람이 알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言経卿記』 『大かうさまくんきのうち』). 그리고, 히데츠구는 8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쫓겨나, 7월 10일에 코야 산(高野山) 세이간지(青巌寺: 현재의 콘고부지)로 들어갔다.

 7월 12일, 코야 산 모쿠지키 오고 쇼닌(木食応其上人)에게, 산 안에서의 히데츠구의 생활을 규정한 조목(条目)이 보내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3일 뒤인 15일, 히데츠구는 세이간지에서 돌연 할복, 생애를 마감했다. 이것이 「히데츠구 사건」의 줄거리이며, 그 배경에는 히데요시의 뜻을 받드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의 대립이 있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흐름은 확실히 이상하다. 히데츠구의 할복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생활 규정을 정해줄 필요가 없다. 이때문에 야베 켄타로(矢部健太郎) 씨는 히데츠구의 할복은 히데요시의 명령이 아니라, 히데츠구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야베 씨도 지적한대로, 히데츠구의 옛 가신들 중 와카에 8인방(若江八人衆)이 이시다 미츠나리 밑으로 들어갔다는 점도 주의해 두고 싶다. 주군을 할복으로 내몰았던 인간에게 충성을 다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히데츠구 사건」에 있어서 이시다 미츠나리는 결백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를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다(『兼見卿記』). 소문은 불과 하루만에 쿄(京)에도 전해졌다. 현직 칸파쿠의 할복이라니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히데요시의 분노는 대단했다. 8월 2일, 히데츠구의 처자식 삼십여명은 수레에 태워져 히데츠구의 목을 보게한 다음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처참한 처형 뒤에 감춰지기 쉽상이겠지만, 실은 모든 처자식이 처형당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히데츠구의 양친은 무사했다. 이는 히데요시의 누나 부부였기 때문에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측실이었던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의 누이동생도 친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히데츠구의 후처인 이치노다이(一の台: 카쿠테이 하루스에의 딸)가 낳은 딸이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출가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름은 불명이고, 법명(法名)을 류세이인(隆清院)이라 전하고 있다. 케이쵸(慶長) 9년, 쿠도야마(九度山)에서 노부시게의 딸 오덴(御田)을 낳았다고 한다. 오덴은 카메다 한(亀田藩)의 한슈(藩主)인 이와키 노부타카(岩城宣隆: 사타케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에게 출가, 칸에이(寛永) 6년(1629)에 묘케이지(妙慶寺: 아키타 현 유리혼죠 시)를 건립해 노부시게를 위한 제를 올렸다 한다. 노부시게의 딸이 노부타카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은 『岩城家譜(이와키카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녀의 모친이 히데츠구의 딸이었다는 뒷받침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과연... 히데츠구의 유복자를 숨기는 행위가 노부시게로서 가능하긴 했던걸까? 사실이라 친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다고 할 수 있다. 

 

 

 

◇ 쿠도야마(九度山)에서의 생활

~ 케이쵸(慶長) 5년(1600)의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 이후,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부친인 마사유키(昌幸)와 함께 코야 산(高野山) 렌게죠인(蓮華定院), 이어서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되었다. 아내와 첩들을 동반하였으며, 여기서 적자인 다이스케(大助) 이하 자녀들을 얻었다. 정실(正室)인 치쿠린인덴(竹林院殿: 오오타니 씨)은 틀림 없이 쿠도야마에 와 있었다. 측실들 중에 타카나시 나이키(高梨内記)의 딸은 나이키 자신이 마사유키를 봉공(奉供)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행했을 것이다. 홋타 사쿠뵤에(堀田作兵衛)의 누이동생은, 우에다(上田)에 남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쿠뵤에는 쿠보슈(供奉衆)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스헤(すへ)는, 사쿠뵤에의 양녀 대우로 이시아이 쥬조 미치사다(石合十蔵道定)에게 출가했기 때문이다(다만, 차녀인 오이치는 데려왔다). 

 코야 산 위는 여성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에, 쿠도야마에서 처자식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쿠도야마에서 노부시게는 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이하, 『左衛門佐君伝記稿(사에몬노스케쿤덴키코)』 및 사나다 로쿠몬카이(真田六文会 / 사나다 씨 자손 모임)의 조사 성과 등을 통해 기록한다.

 먼저 케이쵸 7년에 적자인 다이스케가 탄생했다. 모친은 치쿠린인덴이다. 이어서 케이쵸 9년에 다섯째 딸인 오덴(御田)이 태어났다. 생모는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의 딸인 류세이인덴(隆清院殿)이라 여겨진다. 생년은 미상이지만, 치쿠린인덴과의 사이에서 얻은 여섯째 딸 오쇼부(阿菖蒲), 일곱째 딸 오카네(おかね)도 쿠도야마에서 출생했다고 여겨진다. 여덟째, 아홉째 딸은 생모가 불명확하지만, 역시나 쿠도야마 시절에 출생. 차남인 다이하치(大八)는 케이쵸 17년 출생으로, 모친은 치쿠린인덴. 즉 2남 5녀를 쿠도야마에서 얻었다. 다만, 차녀인 오이치(於市: 모친은 홋타 사쿠뵤에 오키시게의 누이동생)은 쿠도야마에서 죽었다. 

 쿠도야마의 생활은, 렌게죠인의 주지 교에이(行永)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 교에이의 소개에 의해, 히데요시(秀吉) 아래에서 코야 산을 중흥시킨 모쿠지키 오고 쇼닌(木食応其上人)과, 센쥬인 세이요 쇼닌(千手院勢誉上人)과도 깊은 교우관계를 맺어, 코야 산 영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한다. 또, 키슈 한(紀州藩)의 한슈(藩主)인 아사노(浅野) 씨로부터도 한의 영지 부근에서의 사냥, 낚시를 허락받았다. 일정한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만년의 마사유키의 서장을 대필할 때에는, 추신에 종종 자신의 푸념을 넣어두고 있다. 「이쪽에서의 산골에서의 삶도 오래되어, 만사가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저는 이제 더욱 더 오오쿠타비레모노(大草臥者)가 되었사옵니다...」라고 나와있다. 「오오쿠타비레모노(大草臥者)」라는 게, 노부시게의 실제 감상이었다.

 그런데다, 마사유키의 죽음을 전후로 하여, 쿠보슈들 중에는 우에다로 귀국하는 자들이 나오게 되자, 더욱 더 쓸쓸해졌다. 『高野山蓮華定院書上(코야산렌게죠인쇼죠)』에 따르면, 쿠보타 카쿠에몬(久保田角右衛門), 아오키 한자몬(青木半左門), 토바 모쿠(鳥羽木工)가 귀국했다고 한다. 쿠보슈의 필두였던 이케다 츠나시게(池田綱重)가 귀국한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노부시게는 그러한 상황을 「너무나도 춥다(ひとしおうそばぶく)」고 기록하고 있다.

 주위에서도 노부시게의 적막감(寂寥感)을 깨달았는지, 렌가(連歌)를 배우도록 권하고 있다. 노부시게는 노부유키(信之)의 가로(家老)인 키무라 토사노카미 츠나카도(木村土佐守綱円)에게 서장을 보내어 「늙은이에게 학문이라니, 무리일 것이옵니다」라며 그다지 할 생각이 없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후, 우에다로 보낸 서장에서는 「한번은 뵙고 렌가를 선보이고 싶사옵니다」라고 말하고 있어, 막상 시작해 보니 적성에 맞았던 듯 하다.  

 소주를 좋아했던 듯 해서, 우에다에 항아리를 둘 보내어 소주를 담아 보내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고 있다. 만약 없다면 입수해서라도 가져다 달라... 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신에서도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두고 있어, 꽤 열심히였던 듯 하다. 

 마사유키의 생전과 마찬가지로, 생활은 절약의 연속이었다. 불행하게도 저택이 화재를 입어 노부유키의 지원으로 재건했다. 이렇듯 우에다와의 연락은 빈번했던 듯 하며, 케이쵸 11년에 숙부인 카나이 타카카츠(金井高勝: 유키츠나의 다섯째 아들)가 죽었을 때에는, 그 보다이(菩提)를 렌게죠인에서 치르고 있다. 또, 노부유키가 상경했을 때에는, 쿠도야마로 문안을 와주었던 것을 정중히 사절했다. 노부유키가 바쿠후(幕府)에게 의심을 살만할 일을 만들려하지 않았으리라.

 쿠도야마에서는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렌게죠인의 교에이가 키이(紀伊) 아마노(天野: 와카야마 현 카츠라기 쵸)로 갔을 때에는 동행할 생각이었지만, 복통을 일으켜 단념했다. 저명한 「작년부터 환자가 되었고, 이도 빠지고 수염도 하얗게 되었사옵니다」라고 써낸 서장은, 오오사카(大坂) 입성 후의 것이라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카오(花押)의 형태 및 「오랫동안 이런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도 보러 오는 이 하나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쿠도야마 칩거기의 것이다. 노부시게는 아직 40대였을테지만, 무력감은 그의 심신을 갉아먹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문인지 「코하쿠(好白)」를 호(号)로 삼아, 머리를 깎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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