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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7 (0) 2016/12/18 PM 02:08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오오사카(大坂) 입성

~ 그런 때에 찾아온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로부터의 사자였다. 이미 토요토미 쪽과 토쿠가와(徳川) 쪽의 관계는 험악해질대로 험악해져, 히데요리는 각지의 로닌(牢人)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물의 우마마와리(馬廻)였던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사자는 당장의 지원금으로 황금 200장과 은 30관목을 지참했다고 한다(『駿府記』). 노부시게는 이에 응해, 케이쵸(慶長) 19년(1614) 10월 7일(『高野春秋』), 또는 9일(『左衛門佐君伝記稿』)에 쿠도야마(九度山)를 떠나, 13일에 오오사카(大坂)로 입성했다(『本光国師日記』). 그 소식은 노부시게를 감시하고 있던 코야 산(高野山)의 승려 몬쥬인(文殊院)으로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고문승인 콘치인 스덴(金地院崇伝)에게 보고되었고, 스덴으로부터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에게 전해졌다. 몬쥬인은 「御機嫌如何候ハん」라며 이에야스의 분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다.

 쿄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인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로부터의 보고도, 익 14일에 슨푸(駿府)로 전해졌다(『駿府記』). 하지만, 카츠시게는 노부시게의 케묘(仮名)를 겐자부로(源三郎)라 착각했고, 또 굳이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일로 미움을 사 코야 산에 틀어박힌 인물이라 설명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도무지 누군인지가 감이 잡히지 않았던 듯 하다.

 한편, 콘치인 스덴은 노부시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듯 한데,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에 이어서 「사나다 사에몬노스케(真田左衛門佐)」라 정확한 칸도나(官途名)를 기록하고 있다. 노부시게에 관한 지식으로는, 막각(幕閣) 안에서도 온도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에서 이에야스에게 저항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부친인 마사유키(昌幸)이기에, 노부시게의 존재는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나다 농성!」이라는 보고를 듣고 「애비인가 자식놈인가!」라고 물어보면서 문고리에 손을 대고 덜덜 떨고있었다고 하는 일화가 유명하지만(『仰応貴録』), 이는 확실히 후대의 창작이다. 하지만 토쿠가와 쪽은 이 인식부족에 의한 과신을 나중에 가서야 되새기는 꼴이 된다. 

 오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 참진한 야마구치 큐안(山口休庵)의 회고록 『大坂御陣山口休庵咄(오오사카고진야마구치큐안바나시)』는, 고용한 로닌슈(牢人衆)의 필두로 노부시게를 기록하고 있으며, 50만석을 주겠다고 하는 약속 아래에, 6천여명의 벙력을 이끌고 입성했다고 나와있다. 노부시게의 군장(軍装)을 노보리(幟), 사시모노(指物), 카부토(甲), 호로(幌)까지 붉은색 일색... 즉, 「아카조나에(赤備え)」였다고 한 것도 이 사료에 의한다. 하지만, 아카조나에는 둘째치고, 쿠도야마에서 칩거하고 있던 노부시게가 6천여명의 군세를 이끌고 입성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이 숫자는 오오사카 입성 이후에 히데요리로부터 받은 병력이라 볼 수 밖에 없다. 『高野春秋(코야슌쥬)』는 3백기, 『真田家譜(사나다카후)』는 150명, 『真武内伝(신부나이덴)』은 130명이라 기록하는데, 이것도 과대포장일 것이다. 코야 산으로 함께 간 종자들 중에 이름 있는 무사는 열여섯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상기시켰으면 한다. 이러한 숫자는, 시나노(信濃)로부터 노부시게를 흠모하여 달려온 옛 가신 수를 센 것이라 생각된다. 『幸村君伝記(유키무라쿤덴키)』는, 시나노에서 달려온 가신을 180명이라 하고 있어 거의 일치한다. 또, 『石合家記(이시아이카키)』(노부시게의 데릴사위인 이시아이 쥬조 가문의 가보)는, 코야 산으로부터의 수행 16기, 시나노로부터의 참진 50기라 한다. 이것이 실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덧붙여, 이 50기에는 노부시게의 측실의 오빠인 홋타 사쿠뵤에 오키시게(堀田作兵衛興重)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나노로부터의 원군은, 아무리 적은 수였어도 마음 든든했음에 틀림 없다. 이것으로 인해, 일면식도 없던 로닌슈를 맡은 노부시게는, 귀중한 중급 지휘관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오사카고진야마구치큐안바나시』는 노부시게의 우마지루시(馬印)에 대해 「金のうくゑ(ふくべ, 즉 금색 표주박의 오기인 듯)」라 한다. 그리고 『유키무라쿤덴키』는, 하타지루시(旗印)는 붉은 깃발, 우마지루시는 「카라비토가사唐人笠 위에 단」 것이라 하는데, 모두 오기이다. 제 2장에서도 말했듯이, 백부인 노부츠나(信綱) 이래의 쿠로시보(黒四方) 깃발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오사카고진야마구치큐안바나시』는, 「다이묘 로닌(大名牢人)」은 저택이 주어졌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노부시게도 저택이 주어졌으리라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저택에는 누가 들어갔던걸까?

 『武辺咄聞書(부헨바나시키키가키)』는 노부시게의 오오사카 입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키슈 한(紀州藩)의 한슈(藩主)인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명령에 의해, 쿠도야마의 감시가 강화된 것을 감지한 노부시게는, 인근 마을의 쇼야(庄屋: 촌장), 토시요리(年寄)에게 주연을 배풀고 싶으니 백성들을 모두 불러들이라 말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설 건물을 지어 수백명의 백성을 향응하여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마시게 해 취하게 만들어버렸다 한다. 적당히 시기를 봐가면서 백성들이 타고 온 말을 빼앗아 짐을 싣고, 처자식을 가마에 태웠다. 노부시게의 편에 선 백성에게 활이나 텟포(鉄砲)를 지니게 해 쿠도야마를 탈출했다.

 이때, 노부시게는 입도(入道)하여 덴신겟소(伝心月叟)를 호(号)로 삼았다고 하는데, 「게츠잔덴신(月山伝心)」이 정확한 호이다. 아무래도, 쿠도야마에서 생전에 계명(戒名)을 붙였던 듯 하다. 어쨌든, 머리를 깎고 야마부시(山伏) 차림을 하고서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저택을 찾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하루나가는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구금당하고말지만, 지니고 있던 검이나 와키자시(脇指)가 풍체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급품이었다. 그래서 하루나가의 가신이 다시 살펴보니 검은 마사무네(正宗), 와키자시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문을 가진 명검이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저택으로 돌아온 하루나가를 대면케 하자, 노부시게임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노부시게는 거물급 우마마와리(馬廻)였기 때문에, 하루나가와 면식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부헨바나시키키가키』는 엔포(延宝) 8년(1680)에 성립된 2차 사료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특히 쿠도야마 탈출 과정은 창작이 아닐까 하는 혐의가 농후하다. 하지만, 처자식을 동반했다는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쿠도야마에 남겨두기라도 한다면, 토쿠가와 측의 인질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翁物語(오키나모노가타리)』는 입도한 모습으로 하루나가의 동생인 도켄(道犬)을 찾아갔다고 해, 형제의 차이는 있지만, 오오노 씨를 의지했을 가능성은 높다. 따라서 저택에 들어간 것은, 쿠도야마에 있던 노부시게의 처자식이라는 뜻이 된다.

 입성 당시에 그를 따랐던 이는 타카나시 나이키(高梨内記: 노부시게의 모리야쿠), 아오야기 세이안(青柳清庵: 혹은 센야), 미츠이 부젠(三井豊前) 및, 타카나시 나이키의 적자이자, 노부시게의 적자인 다이스케의 「가로(御家老)」로 임명되어 있던 타카나시 우네메(高梨采女)였다. 여기까지 말해온대로, 노부시게는 타카나시 나이키의 딸을 측실로 맞이하고 있었으며, 근년에 이 딸의 이름이 「우네메」라 여겨지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명확한 실수이다. 우네메는 나이키의 딸이 아닌 적자이다. 

 마찬가지로 오오사카로 입성한 로닌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 쿠로다 나가마사의 옛 가신)의 유신(遺臣)인 나가사와 쿠로효에(長沢九郎兵衛)의 회고록 『長沢聞書(나가사와키키가키)』에 따르면, 오오사카슈(大坂衆) 중에서 기마 100기 이상을 받았던 것은 오오노 하루나가,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 사나다 노부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아카시 카몬 테루즈미(明石掃部全登: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가신), 센고쿠 히데노리(仙石秀範),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아자이 스오노카미(浅井周防守), 고토 모토츠구, 이 10명이었다 한다. 이들 중에서도 노부시게, 모리치카, 카츠나가, 테루즈미, 모토츠구는 고닌슈(五人衆)라 불리우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일컬어진다. 이는, 앞의 세 사람이 토요토미 다이묘 및 우마마와리, 남은 두 사람도 다이묘의 가로 출신이라는 가격(家格)에 의한 것이리라 사료된다. 덧붙여, 노부시게의 장인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아들 다이가쿠(大学: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도 이때 입성해 있었다(『翁草』).

 또, 『나가사와키키가키』는 노부시게에 대해서 「사나다 사에몬노스케는 마흔넷, 다섯 정도로 보였으며, 이마와 입에 2~3촌 정도의 상처자국이 있고 덩치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서가 취한 겐키(元亀) 원년 탄생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입성 당시 마흔다섯살이기 때문레, 나가사와의 인상은 노부시게의 실제 연령과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노부시게는 쿠도야마에서 자신의 노쇠한 모습을 한탄하는 서장을 국가의 허락하에 보낸 적이 있었다. 거기서 보면, 역시나 노부시게의 연령은 좀 더 젊었을지도 모르겠다. 나가사와가 노부시게의 정확한 연령을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들었던 것 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라는 뉘앙스가 담겨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 사나다마루(真田丸) 축성을 둘러싼 진상

~ 오오사카(大坂)로 입성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사나다마루(真田丸)」라 불리운 데마루(出丸) 축성에 나섰다. 문헌 사료에 의하면, 해자와 삼중으로 된 방책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데마루 안에는 높은 망루가 복수 세워져있었다고 한다(『大坂御陣山口休庵咄』). 높은 망루는 망보기와 텟포(鉄砲) 사격을 겸한 것이었으리라. 원형의 형상을 감안하면, 타케다(武田)계열 성곽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마루우마다시(丸馬出)」의 발전형일 가능성이 높다. 『幸島若狭大坂物語(유키시마와카사오오사카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넓이는 사방 다섯간(間: 약 9m)이었다고 하는 한편, 『大坂陣覚書(오오사카고진카쿠쇼)』는 사방 100간(약 182m)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상은 알 수 없는 채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센다 요시히로(千田嘉博) 씨에 의해서 사나다마루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떨어진 장소에 축성되었으며, 데마루라는 말을 통해서 연상되는 규모를 훨씬 넘는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확실히, 오오사카(大坂) 우에마치(上町)의 발굴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사나다마루와 오오사카 성 소가마에(惣構え: 성곽이나 요새의 외곽) 사이에는 저지(低地)와 수로가 확인되고 있어 소가마에로부터 떨어진 장소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종래에 알려져 있던 히로시마 시립 도서관 아사노 분코의 「真田丸絵図(사나다마루에즈)」와 일치하고 있어, 이 그림이 얼마나 정확한지가 증명되었다. 『유키시마와카사오오사카모노가타리』도 데마루에서 소보리(惣堀) 사이에 좁은 길을 만들어 오오사카 성 안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기록한다. 『翁物語(오키나모노가타리)』에도 「성에서 멀리 떨어져, 예상 밖의 장소에 요새(取出)를 갖췄던 것은, (성 내부에 대한) 배려인 것이옵니까」라며, 조카인 노부요시(信吉)가 노부시게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2차 사료이긴 하지만, 오오사카 성 소가마에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있는지는 문헌상으로도 뒷받침된다. 

 덧붙여, 사나다마루는 산코 진쟈(三光神社: 오오사카 시 텐노지 구) 혹은 그 남쪽에 있는 사나다야마 공원(真田山公園)에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케이오 의숙 대학 소장 「大阪北組旧蔵大阪町絵図(오오사카키타구미큐조오오사카쵸에즈)」(코다 분코)를 보면, 산코 진쟈 소재지에는 「사이쇼야마(宰相山)」라 기록되어 있어, 사나다마루를 공격한 카가사이쇼(加賀宰相)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가 포진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실제로 사나다마루가 있었던 곳은 그 서쪽에 해당하는 구릉으로, 근세에는 이 땅이 사나다야마(真田山)라 불리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묘죠 학원 부지가 정확한 사나다마루 유적지라 상정되고 있다. 요컨데, 어느샌가 명칭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越前家覚書(에치젠케카쿠쇼)』에 따르면,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의 아들)가 공격했던 것은 「真田出丸笹曲輪(사나다데마루 사사구루와)」(다만, 이는 남쪽의 시노야마를 가르키는 것이라 사료된다)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데마루가 아니라, 복수의 쿠루와(曲輪)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아사노 분코 「사나다마루에즈」를 보면, 사나다마루의 북측(즉 오오사카 성 측)에 작은 쿠루와가 묘사되어 있다. 쿠루와가 복수 존재했다는 것은 틀림 없는 듯 하다.

 또 『北川遺書記(키타가와이쇼키)』는, 사나다마루 축성은 노부시게의 발안이 아니라, 여러 장수들의 담합에 의해 정해지고, 결과적으로 노부시게가 지명되었다고 하는 흥미로운 설을 싣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수세가 지나치게 적어 지켜내기 힘들겠다고 키타가와 지로효에(北川次郎兵衛)에게 상담을 하면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아카시 테루즈미(明石全登)의 지원을 얻고 싶다고 부탁했다. 하지만 지로효에는 아무래도 「사나다마루(원문은 真田が丸)」라 이름이 붙여졌으니 수세가 적더라도 자력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달랬다고 한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기술이다. 근세에서 노부시게는 영웅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창작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사나다마루 축성은 「주제넘은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기에, 노부시게가 여러 장수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했을 가능성은 있다. 또 실제로 사나다마루에는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부대가 원군으로서 들어가 있었다(『長沢聞書』). 노부시게가 상담을 했던 키타가와 지로효에가 사나다마루를 지원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는 점도 경시할 수 없다. 『키타가와이쇼키』는 메츠케(目付)로서 호로슈(母衣衆: 히데요리 친위대)인 이키 시치로에몬(伊木七郎右衛門)이 파견되어 있었다 하는데, 이키는 후술하겠지만 사나다마루 공방전에서 활약한 인물이기에, 그러한 점도 이 기술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 『오오사카고진카쿠쇼』도, 고토 모토츠구가 유군(遊軍)이 되었기 때문에 노부시게가 들어갔다고 기술되어 있어 『키타가와이쇼키』의 기술과 일치한다. 사나다 측의 군기(軍記)인 『真武内伝(신부나이덴)』에도 「出丸を受取」라 한다. 어쨌든 사료적 가치는 높지는 않지만,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나다마루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는 아직 시작일 뿐이다. 금후의 연구의 진전에 기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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