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화친의 성립
~ 토쿠가와(徳川) 측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포위하여 총공격을 펼쳤지만, 이에야스(家康)는 사태를 낙관시하지 않았던 듯 하다. 이미 케이쵸(慶長) 19년 11월 18일에는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 노부나가의 동생, 요도도노의 숙부)의 아들을 오오사카 성으로 파견하여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와의 사이에 파이프라인을 만들게 했다(『時慶記』). 예수회 선교사의 연보는, 이에야스가 4일의 전투에서의 큰손해와 겨울의 추운 날씨, 거기다 병량 부족에 고민한 결과, 화친 교섭에 나섰다고 기록한다. 이 4일의 전투라는 것은 확실히 사나다마루(真田丸)에서의 전투를 가르킨다. 다만, 이는 우발적인 전투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전의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사나다마루 전투가 선교사에게 과장되어 전해진 듯한 모습이 엿보인다.
우라쿠사이는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화친을 진언했지만, 히데요리는 이를 거절했다. 12월 2일 밤에는 텟포(鉄砲) 소리가 다이고(醍醐: 쿄토 시 후시미 구)까지 울려퍼졌을 정도였지만(『義演准后日記』), 히데요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3일, 우라쿠사이는 히데요리의 화친 거절을 이에야스에게 전했다. 히데요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황은 불리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날, 챠우스야마(茶臼山: 오오사카 시 텐노지 구)로 진을 옮긴 이에야스는 전군에 소가마에(惣構え) 옆까지 진을 치라고 하명하고 있어(『駿府記』), 화친 교섭이 결렬로 끝났기에 공격태세를 굳혔으리라 여겨진다.
16일,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에 텟포, 오오즈츠(大筒)를 본격적으로 쏘기 시작했다. 그 포격은 쿄(京)까지 울려퍼졌다 한다(『孝亮宿禰日次記』 『義演准后日記』). 이를 통해 결국 오오사카 측은 화친에 응했다. 중재한 것은 요도도노(淀殿)의 동생인 죠코인(常高院: 오하츠. 오오사카 측)과 그녀의 아들인 쿄고쿠 타다타카(京極忠高: 토쿠가와 측)였다. 18, 19일에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및 이에야스의 측실인 아챠노츠보네(阿茶局)가 파견되어 교섭이 진행되었다.
조건은, 히데요리는 오오사카 성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 파각(破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측이 모은 로닌(牢人)에 대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요도도노가 에도(江戸)에 재부(在府)하면서 인질이 되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내외의 해자에 대해서, 이에야스가 약속을 깨고 멋대로 매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한 게 아니다. 해자를 매운 것 자체는 합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오오사카 측에서 매운다고 약속했던 것을, 이에야스가 멋대로 토쿠가와 측에서 매워버린 게 이 일의 진상이다. 히데요리가 시간 벌이를 시도하려 하자, 이에야스가 그 싹을 뽑아버리는 형태였으리라. 따라서, 이 화친은 어디까지나 정전(停戦)을 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토요토미 가문이 무사히 존속할지는 더욱 더 많은 교섭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는, 이 니노마루, 산노마루 파각에 대해서 이에야스의 면목을 세워주기 위해, 히데요리가 패배한 것 처럼 위장했다고 하며, 이에야스가 아니라 히데타다(秀忠)가 명령한 것이라는 소문을 써내려 가고 있다. 일본의 사정에 정통하지 않은 선교사의 기술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화친 조건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 기술하고 있다는 것에는 유의해 두고 싶다. 만약 이 기술이 정확하다면, 니노마루, 산노마루 파각은 이에야스의 함정이 아니라, 히데타다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럭저럭 휴전이 이뤄지자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사나다 본가와의 접촉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노부시게는 문득 조카인 노부요시(信吉)의 진영을 방문해 네살 때 만난 이후이긴 했지만 꽤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기뻐하며 형인 노부유키(信之)를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노부요시는 동생인 노부마사(信政)를 소개한 뒤에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 키무라 츠나츠라(木村綱円), 한다 치쿠고노카미(半田筑後守), 오오쿠마 호키노카미(大隈伯耆守)를 불렀다. 노부시게는 술을 나누며 재회를 기뻐한 뒤, 성 안으로 돌아갔다고 여겨진다(『翁物語』). 또, 누이인 무라마츠도노(村松殿)의 적자인 오야마다 유키토모(小山田之知)와는 자주 만났다고 한다. 다만, 노부시게는 결코 한가해서가 아니라서 안정된 분위기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던 듯 하다.
케이쵸 20년(겐나 원년 / 1615) 정월 24일, 노부시게는 누이인 무라마츠도노에게 서장을 보냈다. 거기에는 걱정을 끼치게 한 것을 사과하며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은 상황이 변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이라고도 말하고 있어,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면서도 본심을 토로하고 있다. 이 서장은 우에다(上田)로 떠나는 여행자에게 맡겼던 듯 한데, 「상세한 근황을 써내려 가고 싶습니다만, 서둘러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라고 쓰고 있다. 무엇보다, 동시에 다시 서장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무라마츠도노 앞으로 보낸 서장을 통해 엿볼 수 있듯이, 노부시게는 재전(再戦)을 각오하고 있었다. 2월 10일, 장녀 스헤(すへ)의 남편인 이시아이 쥬조(石合十蔵)에게 「이젠 더 이상 눈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네. 스헤는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내버려두지 말기를 부탁하네」라며 서장을 써보냈다. 우에다에 남겨진 장녀의 장래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때 노부시게를 뒤덮고 있었던 것은 염세관(厭世観)이었다. 화친 교섭이 있었을 때에 오오사카 성은 니노마루까지 파각되어 혼마루(本丸)만이 남겨진 벌거숭이가 되었다. 당연히, 노부시게가 정열을 쏟아 쌓은 사나다마루도 파각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수적으로 우세한 토쿠가와 측을 야전에서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부시게는 겨울 전투에서는 적극적으로 야전에 나서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겨지지만, 농성전이라는 선택지를 빼앗아버린 것에 대한 의미는 컸다. 3월 19일, 매형인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 유키토모 부자에게 보낸 서장에는 「당년 중에 조용히 보낼 수 있게 된다면 만나 뵙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덧없는 세상이기에 한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섣불리 덧없는 인간이라 여기지 말아주십시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노부시게는 케이쵸 20년 중에 재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화친이 정리될지도 모르겠다는 한줄기 희망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은 무리라 각오를 굳히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염세관이 생긴 배경에는, 히데요리로부터 친절하게 대우를 받는 한편으로, 토요토미 지키신단(直臣団)으로부터 소외당해 「만사가 걱정」이라는 사정이 있었던 듯 하며,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서장에서 써내려 가고 있다. 그 빛나는 무명을 감안하면 상상하기 힘든... 섬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노부시게와 나란히 무명을 떨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는 동년 정월 14일자 서장에서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는 이 덧없는 세상이 재미있사옵니다」라고 말하고 있어, 성격 차이가 잘 드러나고 있다.
『真武内伝(신부나이덴)』 『難波戦記(나니와센키)』 같은 군기물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화친 중에 타케다의 옛 가신인 하라 사다타네(原貞胤)와 만나 옛시절을 그리워했다 한다. 사다타네는 당시, 에치젠 마츠다이라(越前松平)의 한시(藩士)였기 때문에, 이 만남이 사실이라면, 사나다마루에서 충돌한 상대와의 면담이다. 사다타네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텐쇼 3년 = 1575)에서 전사한 하라 마사타네(原昌胤)의 아들로, 『信長公記(신쵸코키)』에 따르면, 타케다 가문 멸망 당시에 타카토오 성(高遠城: 이나 시)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의 분간쵸(分限帳)에는 사다타네로 보이는 인물에 대한 기재가 있다. 또,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하라 가문의 계보는, 사다타네에 상당하는 인물을 에치젠 마츠다이라 한시로서, 오오사카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사나다 가문을 모셨던 하라 씨는 사다타네의 동생의 계통이라 한다.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과 사나다 가문의 기록의 일치는 경시할 수 없다.
『신쵸코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관한 기록사료로서는 가치가 높지만, 적의 전사자 기록에는 착오가 자주 발견된다. TV도 사진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무찌른 상대의 목을 봐도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급 검사를 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착각하는 경우도 생긴다. 사다타네에 대해서도, 타카토오에서 수급을 잘 못 봤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라 사다타네는 마사타네의 셋째 아들이기에, 위에 두 형이 일찍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가독을 이을 신분이 아니었다. 노부시게보다는 연장자였지만, 타케다 시절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군기물류가 기록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의 재회가 사실이라 친다면 노부시게의 마음에 위로가 되어줬을 것이다.
◇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로...
~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는 화평파인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들이 퇴거, 재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날이면 날마다 높아져 갔다. 하지만, 파벌은 넷으로 나뉘었을 정도로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요도도노(淀殿) 모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증답을 나누는 등 우호관계 양성에 힘썼지만, 동시에 재전 준비도 진행시켰다.
케이쵸(慶長) 20년(1615) 3월 12일, 쿄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인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는 오오사카 측의 동향을 이에야스에게 써서 보냈다. 거기에 따르면, 병량과 목재를 모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겨울 전투에서 농성하고 있던 로닌(牢人)들 중에 해고되었어야 할 자들 조차 한명도 떠나지 않고 있어, 작은 방을 만들어 오오사카 주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다, 곳곳에서 더욱 더 많은 로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히데요시(秀吉)가 오오사카에 있었던 시절보다 군세가 늘었다고 하는 마을 사람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보고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였으며, 그의 형인 하루나가(治長)는 오히려 히데요리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짓은 하지 말라는 견해를 보였던 듯 하다.
4월 1일, 쇼군(将軍) 히데타다(秀忠)는 오오사카로부터의 패잔병에 대한 포박을 명령했다. 4일에 진중법도(陣中法度)를 반포한 것은, 확실히 오오사카 공격에 대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4월 3일, 자식인 요시토시(義利: 오와리 토쿠가와 요시나오)의 혼례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며 슨푸(駿府)를 떠났다.
이러는 동안, 바쿠후(幕府)와 오오사카에서는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한 교섭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제시한 조건은 고용한 로닌들을 퇴거시킨다는 것이었지만, 히데요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야마토(大和)나 이세(伊勢)로의 영지 교체를 새로운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오오사카 측의 회답은 이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서장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스루가(駿河)에서 오와리(尾張) 나고야(名古屋)로 들어가 다시 회답을 요구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사무네는, 두가지 조건 중 어느쪽이든 수락하지 않으면, 출전할 모양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나고야에서 다시 회답을 묻는다는 자세에서는, 군사 압력을 가하는 것에 의해 히데요리가 굴복하는 것을 바랐다고 파악할 수 있다. 통설과는 달리,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오오사카 여름 전투, 토요토미 가문 멸망은 기정노선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을까?
4월 5일, 오오노 하루나가의 사자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거기서 보여준 것은, 영지 교체안을 철회했으면 한다는 히데요리, 요도도노 모자로부터의 탄원이었다(『駿府記』). 여기서 사태는 결정되었다.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에게 출진을 명령해 오오사카 여름 전투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영지 교체를 거부한 주체로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병기되어 있음을 주의해 줬으면 한다. 히데요리는 일정한 주체성을 가지고서 여름 전투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도도노의 의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는 히데요리가 탄생하고 얼마되지 않아 히데요시가 죽었으며, 요도도노가 일족의 수장으로서 「고케켄(後家権)」을 행사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세의 가치관에서 보자면, 여성의 정치 참여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행위이며, 또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에, 요도도노의 평가는 상당히 낮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세 부케 사회(武家社会)에서는 가독을 이어받을 사람이 어릴 경우에는 코시츠(後室 = 後家)가 가장권(家長権)을 대행하는 게 상식이었기에, 요도도노는 그 관례에 따라 토요토미 가문의 가정(家政)을 담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군주가 성인이 된 뒤, 권력은 차츰 코시츠에서 가독 상속자로 이행해 가는데, 토요토미 가문의 경우는 거기에 통례보다도 시간이 걸린 것일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