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章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허(虚)와 실(実)
◎ 이에야스(家康)에게 있어서의「야규(柳生)」의 가치
~ 그런데, 만만찮은 이 서바이벌의 방책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야규(柳生) 씨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은, 그들의 본거지가 주위와 단절되어있던 히가시산츄(東山中)라는 산골 마을이었다는 것이리라.
남도(南都) 나라(奈良)에서 야규의 산골 마을에 이르는 길은,「야규 가도(柳生街道)」라는 이름으로 친숙해져있다.
[야규 가도 중 타키사카 길]
나라 시(奈良市) 남쪽을 빠져나가 그 길에 들어서면, 타카마도야마(高円山)와 카스가야마(春日山) 골짜기를 오르면 약 두 시간만에 이시키리 고개(石切峠)로 당도하게 되는데, 그 사이의 길은 석조 유적(石造遺跡)이 풍부한 나라 답게 석불(石仏)로 눈길을 사로잡는 길이다. 고개부터는 풍광(風光)이 일변하여 전원 속을 잠깐 걷게 된다. 이윽고, 오르막길에 들어가 사카하라 고개(坂原峠: 사카하라 쵸)에서 단번에 아래로 내려가면 갑자기 시계(視界)가 넓어지는데, 그곳이 야규 마을이다.
21세기인 지금도, 목가적(牧歌的)인 고요함으로 둘러싸인 야규 마을에는, 방문하는 사람들을 시간여행이라도 시켜주는 듯한 풍취(風趣)가 느껴진다.
- 숨겨진 마을(隠れ里)
... 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절묘한 표현이다.
여기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이 숨겨진 마을을 대대로 본거지로 삼아온 야규 씨에게 관심을 가진 또 하나의 이유를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야스가 단순히 병법상이라는 개인적인 흥미만으로 야규 부자를 초빙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야규 고(柳生郷)의 지리적 이점으로는, 전략상으로 매력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
야규에서 카사기야마(笠置山: 표고 290m)를 넘어 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 쿄토 부 소라 군)로 이르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길을, 통칭「카사기고에(笠置越え)」라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생존했을 당시의 본거지인 쿄라쿠(京洛)는, 카사기고에 루트로 야규의 북북서 약 40km 남짓한 위치에 있으며, 물론, 오오사카(大坂) 역시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이에야스와 적대하게 되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의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시가 현 히코네 시)도 쿄토(京都)에서 멀지 않다.
이렇게 보면, 가령 키나이(畿内)와 그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야규지방은 야마토(大和)에서의 전선기지를 둘 수 있는 편리성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4년 전인 텐쇼(天正) 18년(1590)에 칸토(関東)로 영지 교체되어 에도(江戸)를 본거지로하고 있던 이에야스가, 키나이의 동정을 실시간으로 알아두기 위한 정보 수집에 있어서, 야마토에 토착한지 오래된 야규 씨는 가치가 큰 씨족이다.
닌쟈(忍者)를 양성한 이가(伊賀) 우에노(上野: 미에 현 이가 시)의 성주인 츠츠이 사다츠구(筒井定次)도 야마토의 지자무라이(地侍) 출신이었기에, 그런 츠츠이 씨와 야규 씨는 기나긴 친분관계를 갖고있었다.
그들은 킨키의 움직임에 대한 이에야스의 눈과 귀가 되었으며, 유사시에는 연계하여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야규 씨를 길들이는 것은, 이에야스가 조선 출병 이래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고 있던 토요토미 정권의 움직임을 대응하는 데에 있어서, 앞에서 말한 편의를 갖고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에야스가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에게 입문의 뜻을 담은 기청문(起請文)을 준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적 기대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곳의 수렁은 손상되지 않았다고
그것은 전쟁을 겪지 않은 장소라고
그것도 성주인 세키슈사이의 위대함이라 이건가 라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