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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06 (0) 2017/02/15 AM 09:42

序章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허(虚)와 실(実)

 

 

◎ 센고쿠(戦国)의 야마토(大和)를 살아남다

~ 그해(에이로쿠 8년)로부터 세월은 흘렀고, 아들 무네노리(宗矩)를 데리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알현하기까지의 족적(足跡)인 30년동안...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의 신변에서 일어난 생애 통한사(痛恨事)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쇼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모시고서 입경한 해(에이로쿠 11년 = 1568), 야마토(大和)에서는 그런 노부나가의 후원을 얻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평정을 도모하고자 세력을 단번에 일으켰다. 하지만, 3년 후인 겐키(元亀) 2년(1571)에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와 적대하게 된 요시아키의 편에 서서 오다 측인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와 센고쿠시대(戦国時代) 야마토(大和) 최대의 전투를 펼쳤다. 즉, 타츠이치 성(辰市城: 나라 시 토쿠죠 쵸)에서 쥰케이를 공격한 전투였는데, 무운이 따라주지 않아 히사히데는 대패를 맛봤다.

 이 격전에서, 세키슈사이를 당주로 하는 야규 씨는 마츠나가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당년 스무살이었던 장남 요시카츠(厳勝)가 중상을 입었고, 그가 예순다섯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구로 세월을 보내야했던 것이다. 

 2년 후인 텐쇼(天正) 원년(1573) 7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되었고, 12월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본거지로 삼아왔던 타몬야마 성(多聞山城: 나라 시 호렌 쵸)을 노부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그러한 추세 속에서, 세키슈사이가 마흔다섯살에 전선에서 물러나 야규 고(柳生郷)에서 은거한 이유는, 잘 보여야할 상대를 착각했다는 후회와 함께, 이미 야규 씨의 사직(社稷)과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요시카츠에게 맡길 수 없게 되어버린 상심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세키슈사이는 늘상 불만 투성이인 모양새로 자신의 신세를 감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숨겨진 마을에 살게된 지 3년... 텐쇼 5년(1577)에, 일찍이 자신이 모셔왔던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오다군에게 공격을 받고 자결하자, 노부나가 휘하에 있던 츠츠이 쥰케이의 지배하에 야규 씨는 놓이게 된다. 요는, 앞장서서 노부나가 세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오랜동안 노부나가의 후원을 받으며 야마토에서 군림한 츠츠이 쥰케이가 텐쇼 12년에 죽게 되면서부터,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천하 탈취에 야마토의 여러 씨족도 그 아래로 편입 된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손을 잡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시마 사콘 키요오키(島左近清興)는, 그 대표격인 무장이라 할 수 있다.

 헤구리 군(平群郡: 나라 현 이코미 시와 이코마 군 일대)에 거점을 둔 이 시마 씨와 마찬가지로 지자무라이(地侍)에서 쇼묘(小名)가 된 야규 씨도, 이번에는 하시바 씨의 야마토 지배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쥰케이의 양자로서 가독을 이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定次)를 이가(伊賀)의 우에노(上野)로 영지 교체를 시켜 츠츠이 씨가 오랜 세월에 걸쳐 키워온 권세를 일소시킨 뒤, 이복동생인 히데나가(秀長)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 나라 현 야마토 군 야마이치)에 들여보냈다. 때는 발 빠르게도 노부나가가 죽은지 3년 뒤인 텐쇼 13년(1585)의 일이었다. 

 이후의 야규 씨와 하시바 씨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이 해에 환갑을 맞이한 세키슈사이에게 오우미(近江) 에치 군(愛智郡: 시가 현 에치 군 아이쇼 쵸 주변)에 100석을 주었다는 취지의 지행목록(知行目録)이『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 실려있다. 

 동년은 히데요시의 조카인 히데츠구(秀次)가 키슈(紀州) 네고로(根来)의 슈토(衆徒) 토벌전, 이어서 시코쿠(四国) 평정전에서의 전공에 의해, 오우미 하치만야마 성(八幡山城: 시가 현 오우미 하치만 시) 43만석을 받은 해였다.

 세키슈사이, 혹은 무네노리도, 후에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고 칸파쿠(関白)로도 임명 되는 당년 열여덟살의 하시바 히데츠구에게 속해서, 몇번인가 전투에 참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점의 배경에 대해서는 제 1 장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하시바 씨... 아니, 토요토미 씨 정권하의 야규 씨는 극진하게 우대받았던 것도 아니다. 야마토노쿠니와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경계에 본거지를 두었고, 외부로부터 야마토를 평정시키려 한 대세력의 전투에 참가해 온 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령인 예순여섯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눈에 띌 때까지의 세키슈사이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불만이었음에 틀림 없다.

 난세의 야마토에서 동분서주해 온 무장 야규 세키슈사이는, 훗날 천하인의 지위를 수중에 넣으려함에 틀림 없다고 자신이 예견했던 이에야스에게 부름을 받고서, 그로부터 입문의 뜻을 담은 기청문(起請文)을 손에 넣었을 때,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이라는 가예(家芸) 연구에 부지런히 노력해 온 것에 대해, 필시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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