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발흥(勃興)
~ 카스가 타이샤(春日大社)에 코후쿠지(興福寺), 나라 국립 박물관이나 토다이지(東大寺), 거기서 와카쿠사야마(若草山)에 카스가야마(春日山) 등의 명소 대부분을 끌어 안고 있는 나라 공원의 남쪽, 와리이시 마치(破石町)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신야쿠시지(新薬師寺) 근처의 주택가를 빠져나오면, 당돌하게도 지금은 토카이 자연 보도(東海自然歩道)의 일부가 되어있는 야규 가도(柳生街道)의 타키사카(滝坂) 길로 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타카마도야마(高円山)와 카스가야마 사이를 구부러져 올라는 오르막길에서 이어지는 이 길은, 옛 수도 사람들은「야규 길(柳生みち)」이라 불렀다.
현재는「가도(街道)」라는 두 글자를 써서 관광 명소로서 선전하고 있는 길을 잠깐 걸어가다 보면, 노토 강(能登川)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봄여름에는 꾀꼬리 소리가 들려와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는데, 길 옆의 석불(石仏)을 보면서 걸어가는 중에 점차 다른 차원으로 끌려 들어가는 감각 역시 하나의 여흥꺼리다.
이시기리 고개(石切峠)를 넘어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에 건립된 요세무네즈쿠리(寄棟造) 방식의 본당(本堂)이 있는 난묘지(南明寺) 근처에,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와 그의 후처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는 로맨스가 전해지는「오후지 우물(おふじの井戸)」부터는, 야규 가도의 정취도 일변하여 전원의 한가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걸어가게 된다. 길은 다시 고갯길로 나온다. 고개를 넘어 단번에 내려가면, 야규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전장 약 19km, 약 네 시간 전후를 걸어가면 도달하게 되는 분지이다.
근세에 야규 1만석의 성하(城下)가 되기 전의 야규 고(柳生郷)는「무풍지대(無風地帯)」로서의 정취가 있었다. 히가시산츄(東山中: 야마토 고원) 한쪽 구석에 있어 힘 있는 다이묘(大名)나 쇼묘(小名)가 근처에 없었으며, 카스가 타이샤의 신료(神領: 진쟈나 사찰이 관리하는 영지)였기 때문에, 신(神)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을 강력한 무장들조차 두려워했기 때문에 침략의 손길을 뻗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가 되면 차밭의 녹음이 유달리 아름다운 이 산골 마을에, 야규 일족과 관련된 사적 대부분은 좁은 범위에 점재해 있는데, 그 중 하나로「잇토세키(一刀石)」라는 것이 있다.
일본 신화(日本神話)에서 말하는「아마노이와야토(天岩屋戸)」의 문 역할을 했던 돌이 날아왔다는 세 개의 거석(巨石)을 신체(御神体)로 하는 진쟈(神社)인 아마노이와타테 진쟈(天乃岩立神社)가 진좌(鎮座)한 토이와다니(戸岩谷)에서 수행했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가 텐구(天狗)와 시합을 펼치다 이를 단칼에 베어버리자, 텐구는 즉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두 쪽으로 갈라진 거대한 돌이 놓여져 있었다... 라는 기이한 전설을 가진 돌이다. 약 7m 크기의 그 돌의 표면의 팬 자욱은 텐구의 발톱자국이라 전한다.
야마토는 석조 문화(石造文化) 유적이나 유물이 풍부한 지역인데, 이 잇토세키도 그러한 것을 통감케 하는 압도당할 법한 거대함을 자랑한다.
애당초, 그의 재호(斎号)를 봐도 그는 돌과 인연이 깊었다.
야규 고 서북쪽 산 속에서 출토된 이시비츠(石櫃: 화장한 유골의 장골기를 담은 궤짝)를, 그 거관(居館)의 쵸즈바치(手水鉢: 손 씻을 물을 떠놓는 푼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순여섯살에 탁발했을 때, 야규 신자에몬 무네요시(柳生新左衛門宗厳)는「타지마뉴도 세키슈사이 소곤(但馬入道石舟斎宗厳)」이라 칭했다. 그의 호에 관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兵法のかちをとりても世のうみを わたりかねたる石のふねかな】
검의 길에 있어서「승리(勝)」에「노(梶)」를 저어, 난세에 대처하는 고뇌를 읊은 것이리라. 칼날 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 해도, 자신과 같은 낮은 신분인 자가 유위전변(有為転変: 만물은 항상 변한다는 의미)하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것은「돌(石)로 만든 배(舟)의 키잡이 노릇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다」라며 도회(韜晦)한 것이다.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宮本武蔵(미야모토 무사시)』안에서 무사시가 경의를 표하고 있는 세키슈사이지만, 그는 병법자이기 이전에 무장이었다.
세키슈사이는 일가의 대들보를 짊어지고 전장을 누비며 야규의 생존에 스스로 앞장섰지만, 그런 무장으로서의 얼굴은 항상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온 천하가 난마처럼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야마토라는 특유한 권력 구조를 가진 땅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사 왕국(社寺王国)」이라는 호칭을 갖기도 한 야마토에는, 카마쿠라시대부터 슈고(守護)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슈고임을 자임(自任)하며 이「신국(神国)」을 지배하던 것은, 카스가 타이샤의 실권을 장악했던 코후쿠지였다. 이러한 관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전소, 나아가서는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으로 키나이(畿内)의 종교 세력에 의한 지배를 일소해 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텐쇼(天正) 3년(1575)에 반 나오마사(塙直政), 그 다음해(텐쇼 4년 = 1576)에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를 야마토의 슈고로 임명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의 야마토에서의 코후쿠지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권력 지배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후다이(譜代)인 고케닌(御家人)에 상당하는 슈토(衆徒: 승병)와, 토자마(外様)인 준고케닌(準御家人)이라 해야할 법한 지닌(神人: 혹은 고쿠민)의 무력 위에 만들어졌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칸베시칸고(神戸四箇郷)」라는 카스가 신료의 쇼칸(荘官)으로서 부흥한 야규 씨(본 카바네는 스가와라 씨, 선조는 야규 나가이에)는, 무사화를 달성한 지자무라이(地侍) 일가였으며,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77) 무렵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메이오(明応) 6년(1497)에 태어나 센고쿠 난세 때의 당주가 된 야규 이에요시(柳生家厳)는, 코후쿠지를 대신해 여러 세력과의 응접에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세력이란, 먼저 츠츠이 쥰쇼(筒井順昭)였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극상(下克上)에 의해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를 대신해 중앙(쿄토)의 실권을 장악하여 킨키(近畿) 제패를 실현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였고, 나아가서는 주군인 미요시 가문을 멸망시키고 야마토에 거점을 쌓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였다. 이에요시는 츠츠이 vs 미요시 전투에서는 미요시 씨를 따랐으며, 양자가 화해를 하자 츠츠이 쥰쇼, 이어서 그의 아들인 쥰케이에게 협력하게 되었는데, 이에요시가 예순셋, 아들인 세키슈사이 무네요시는 서른살인 에이로쿠(永禄) 2년(1559)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입국하자마자, 결국 츠츠이 씨를 떠나 마츠나가 씨에게 종속하게 된다.
그런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결국 야마토를 석권하며 나라(奈良)는 물론이고 쿄토(京都), 사카이(堺) 같은 키나이 3대 도시를 비예(睥睨)하는 세력을 쌓아 감과 함께, 야규 씨는 일개 지자무라이 신분에서 쇼묘(小名)로 발전해 갔기 때문에, 이에요시는 선견지명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즉, 처세에 능했던 이 이에요시가, 헤이안시대 후기인 호엔(保延) 연간(1135~41)에 발흥했다 전해지는 야규 씨의「중조(中興の祖)」라 여겨지게 된 연유이다.
그후, 야규 가문의 당주가 된 세키슈사이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와의 대결 태세를 보인 오다 노부나가의 위협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부친인 이에요시가 여든아홉살이라는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정도의 장수를 누리다 죽은 것은, 노부나가가 죽고 3년이 지난 텐쇼 13년(1585)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