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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12 (0) 2017/02/21 PM 01:06

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와의 만남

~ 이제부터 이야기는 병법자(兵法者)로서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의 족적(足跡)이 되는데,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에 앞서, 먼저 신카게류(新陰流)의 개조(開祖)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히데츠나(上泉伊勢守秀綱)와 세키슈사이의 일본에서의 검도사(剣道史)상 특필해야만 하는 만남에 대해 다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가 죠슈(上州)에서 문인(門人)인 히키타 분고로(疋田豊後郎), 스즈키 이하쿠(鈴木意伯)와, 몇명의 종자를 동반해 상경길에 오른 것은 에이로쿠(永禄) 6년(1563)의 일이었다. 일행은, 머나먼 길을 떠나 이세(伊勢)의 코쿠시(国司)인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의 저택이 있는 타케노고쇼(多気御所: 미에 현 츠 시)를 찾아갔다. 

Kitabatake_Tomonori.jpg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라 하면,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을 스승으로 삼아, 그의 신토류(新当流) 오비(奥秘)인 타치(太刀)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하사받은 병법의 달인이다. 이는 훗날의 일이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차남이자 토모노리의 양자로 키타바타케 가문에 들어간 노부카츠(信雄)의 가신들이 텐쇼(天正) 4년(1576)에 토모노리를 모살했을 때, 그들은 결행을 하기 전에 그의 패도(佩刀)에 수작을 걸어 검을 뽑을 수 없게 해 두었던 듯 하다. 토모노리의 검에 대한 기량을 너무나도 두려워한 데에 대한 고육지책이었음에 틀림 없다. 

 이세노카미가 키타바타케의 저택을 찾아간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서장에서 다뤘는데, 공경(公卿)이었던 토모노리로부터 수도 사정에 대한 예비지식을 얻는 목적이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귀인(貴人)이자「검호(剣豪)」인 토모노리의 인맥을 의지하며, 자신이 창조한 신카게류의 진가를 시험해볼 상대를 소개받는 데에 있었던 듯 하다. 토모노리는 야규 신자에몬 무네요시(柳生新左衛門宗厳)... 즉, 세키슈사이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리고, 세키슈사이가 사는 야규 고(柳生郷)는 깊은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친분이 있던 호조인 인에이(宝蔵院胤栄)라는 승려가 주지를 맡고있는 남도(南都) 코후쿠지(興福寺)의 탓츄(塔頭)인 호조인(宝蔵院)에서 만나도록 하라는 토모노리의 권유에 나라(奈良)로 사자를 보냈다. 

 세키슈사이와 이세노카미의 만남을 알선한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그후, 에이로쿠(永禄) 10년(1567) 이후의 오다 노부나가의 이세 침공에 맞서서 오오코우치 성(大河内城: 마츠사카 시)에서 머물며 싸웠지만, 전후인 겐키(元亀) 원년(1570)에는 은거하여 미세노야카테(三瀬館: 타케 군 오오다이 쵸)로 거처를 옮겼다. 전술한대로 모살당한 것은 마흔아홉살 때의 일이다. 

 현재의 나라 국립 박물관 부지 내에 있었다고도 추정되는 호조인(나라 시 노보리오오지 쵸)의 주지인 인에이는, 카마야리(鎌槍: 겸창)의 창시자라 일컬어지고 있다. 창의 날 양쪽에 요코바(横刃: 횡 날)를 덧붙인 모로카마야리(両鎌槍)를「십문자 창(十文字槍)」이라고도 한다. 찌르는 것은 물론이고, 쳐내고, 베어낸다는 식의 조법(操法)도 가능한 독창적인 무기였는데, 원래 학문을 갈고 닦던 학승(学侶)이라 여겨지던 인에이가 무술의 한 유파를 연 것도 묘한 일이다.  

 코후쿠지에는, 수학하는 자가 사찰 내부의 경비를 담당한다는 사찰만의 법이 있었으며, 또, 호조인에는 슈토(衆徒: 승병)를 지휘하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 인에이가 승려이면서도 무술에 정통하게 된 이유라 여겨지고 있다. 

 호조인의 창술 도장의 구조에 대해서는, 훗날 에도시대(江戸時代) 후기에 야마토(大和)의 부교(奉行)로서 부임한 카와지 토시아키라(川路聖謨)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연습장은 3 간(間)에 7 간 넓이였으며, 사방 6촌(寸) 정도의 각목으로 만들여져 있다. 마루방은 마디가 없는 노송나무 재질로 만들어져 있고, 못을 박아 놓지를 않아, 일견 노가쿠(能楽)용 무대처럼 보인다. 하메(羽目)에는 창이 걸려있는데, 거기서 위로 천정까지는 2척(尺) 여남짓 되는 공간이 있다. 귀인들이 구경할 수 있게 한 자리는 마루에 타타미(畳) 8장을 깔아두었고, 츠기노마(次の間)도 넓다. 그 뒤쪽은 통로 가장자리로 되어 있다】


 이런 도장에서, 인에이의 중재로 야규에서 달려온 세키슈사이는,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와 검을 겨루게 되었다. 세키슈사이는 당시 서른다섯, 이세노카미는 이미 초로에 달해있었을 것이다. 

 3일동안 세 번 치러졌다고 전해지는 이 시합에서, 세키슈사이는 한 번도 이기지 못 했다. 완패한 그는, 즉각 이세노카미에게 입문했다. 

 훗날에 신카게류 병법이 야규 일족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게 이르는... 그 인연이, 두 사람의 이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세키슈사이를 문인으로 들인 이세노카미는, 상경을 서둘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규 고에 머물며 검의 술리(術理)를 가르쳤다. 쿄토(京都)에 들어간 것은 익년(에이로쿠 7년) 2월이었다 한다(柳生厳長『正伝新陰流』). 그의 검명은 수도 안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일설에 따르면 84명의 입문자가 있었다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훗날 타이샤류(タイ捨流)라는 유의(流儀)를 열게 된 쿠마(球磨) 히토요시(人吉: 쿠마모토 현 히토요시 시) 사가라(相良) 가문의 가신 마루메 쿠란도노스케 나가요시(丸目蔵人佐長恵)로, 이세노카미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에게 신카게류를 보여주었을 때, 우치다치(打太刀: 대련 상대)를 맡았던 게 이 인물이었다. 요시테루로부터 하사받은 감사장이 있어 확실한 사실인데,「3월 10일」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연호는 쓰여있지 않다. 요시테루는 에이로쿠 8년(1565) 5월 19일에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와 미요시 삼인방(三好三人衆) 때문에 사살당했으니, 그 직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세노카미가「무사시노카미 노부츠나(武蔵守信綱)」로 개명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으리라. 

 재경 중의 카미이즈미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모시고 입경한 다음해(에이로쿠 12년) 정월 15일부터, 공경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를 자주 방문했음이『言継卿記(토키츠구쿄키)』라는 일기를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2년 후인 겐키(元亀) 2년(1571) 7월 21일, 시모츠케노쿠니(下野国)의 유키(結城) 씨에게 보낼 소에죠(添状: 소개장)를 토키츠구로부터 받아서 하향한 이후의 족적은 억설(憶説)은 별도로 치더라도, 행적이 묘연해 알 수 없는 듯 하다.

 세키슈사이에게 카미이즈미가 준 신카게류 인가(印可)가 있다. 유의의 오의(奥意)를 모두 익혔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에이로쿠 8년 묘월(卯月) 길일(吉日)」에 발행된 것으로, 서명은「秀綱(히데츠나)」로 되어있다. 익년(에이로쿠 9년)에 받은『影目録(카게모쿠로쿠)』라는 전서는,「信綱(노부츠나)」로 서명하고 있다.

 쿄토에 있는 동안, 카미이즈미가 야규 고를 자주 드나들면서 지도했음을 추고(推考)할 수 있는 문서이다. 그 만남으로부터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던 중에 장래의 신카게류의 도통(道統)을 맡긴 것은, 세키슈사이의 실력이 만남 이전에 상응하는 영역에 달해있었음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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