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재생(再生)
~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가 야규 가문 재생(再生)의 계기를 거머쥐게 된 것은, 마츠나가(松永) 부자가 죽고 5년이 지난 텐쇼(天正) 10년(1582) 6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때부터였다. 일족의 존망과 관련되어 온 근본적 원인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위협이 이 사건에 의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차츰 가운(家運)이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 의한 노부나가를 위한 보복 전쟁... 즉,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가 있었을 때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군이 될지... 아니면 적이 되어야할지 갈팡질팡하다, 결국에는 거취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세간에「호라가 고개(洞ヶ峠)의 쥰케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츠츠이 씨의 토착 세력과 무력은, 천하에 패권을 구축하려 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쥰케이의「히요리미(日和見)」는 히데요시도 경멸했을테지만, 오히려 20만석을 주고 야마토 슈고(大和守護)라는 지위를 안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후의 쥰케이는 히데요시의 전장에 있어서 유력한 전력이 되지 못했던 데다, 코후쿠지(興福寺)의 소즈(僧都)로 서임되었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제압한 사사 세력(社寺勢力)의 소생(蘇生)을 몹시 싫어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츠(信雄)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연합군과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合戦)에는 참전한 쥰케이였지만, 진중에서 병에 걸려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 야마토코오리야마 시)으로 귀성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텐쇼 12년 8월에 양자인 사다츠구(定次)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인질로 보내 둔 채로 사망한다. 향년 서른여섯이었다.
익년 9월, 코오리야마 성에는 히데요시의 이부(異父) 동생인 토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가 입성한다. 츠츠이 사다츠구는 이가(伊賀)로 영지가 교체되어 우에노 성(上野城: 미에 현 이가 시)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의 직접 지배가 야마토에도 미치게 되었다.
당시 마흔여섯살인 히데나가가 사사 세력이 뿌리 깊은 난치의 나라(難治の国) 야마토에 배치된 배경에는, 히데요시에 의한 키슈(紀州)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 봉기군 공격과 시코쿠(四国) 평정전이라는... 같은 해에 벌어진 두 번의 대규모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평가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히데요시의 양자인 당시 열여덟살의 히데츠구(秀次)도 두 번의 전투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이 해에 오우미(近江) 하치만야마 성(八幡山城: 시가 현 오우미하치만 시)이 주어져 43만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혼노지의 변으로부터 불과 3년 후, 그야말로 눈이 어지러울 만큼의 히데요시의 천하 탈취 아래에서, 야규 일족은 오다 노부나가의 주박(呪縛)이 풀려 한 숨 돌리게 되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서장에서도 다뤘던『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 실린 문서이다.
텐쇼 13년 11월 9일자로 된 그「지행문 목록(知行文目録)」은,「에치 군(愛智郡)」의 3개 마을에「도합 100석」을「야규 타지마노카미(柳生但馬守)」에게 주겠다는 취지의 기재가 있다. 필자인 하기와라 노부유키(萩原信之)의 주석에 따르면, 이 에치 군은「고슈 에치 군(江州愛智郡)」... 즉, 현재의 시가 현(滋賀県) 에치 군(愛知郡) 아이쇼 쵸(愛荘町) 주변이라 한다. 그리고, 때마침 토요토미 히데츠구가 오우미의 영주로 봉해졌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 100석을 세키슈사이에게 준 이는 히데츠구가 아니었나... 하고 동서는 추고(推考)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疑クハ秀次ニ仕玉フナルヘシ。尤秀次親陰ノ門弟ニシテ誓書ヲ今存】
라 주기하고 있다.
세키슈사이와 당시 열다섯살이던 무네노리(宗矩)는, 키슈 공략과 시코쿠 공략 모두에 종군했으리라 생각되는데, 100석이 그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히데츠구의 신카게류(新陰流) 입문 기청문(起請文)과 관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토요토미 정권하의 야규 일족은 항상 극진히 대우받았던 게 아니다.『교쿠에이슈이』의 필자가 말하듯, 세키슈사이가 토요토미 히데나가를 모셨던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100석은 새발의 피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됐든 세키슈사이가 일족 재생의 발판을 구축한 것은 확실하다.
세키슈사이와 무네노리 부자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불려간 것은, 그로부터 9년 뒤의 일이다.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秀頼)라는 친자식이 태어난 다음해인 분로쿠(文禄) 3년(1594), 양자인 히데츠구의 입장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을 무렵, 부자가 발빠르게 이에야스의 부름에 응한 것은, 결과론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익년(분로쿠 4년 = 1595),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에 의해 자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