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이색적인 제자들
~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가 후세에 남긴 것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신카게류(新陰流)라는 검(剣)이다. 그런 검을 전수한 것이 무네노리(宗矩) 같은 자손들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현존하는 전서(伝書)를 통해 의외의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나아가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각각의 가신에게 신카게류 병법의 문계(門系)를 구축했음을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먼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있기 전년인 텐쇼(天正) 9년(1581)에「미요시 사에몬노죠(三好左衛門尉)」앞으로 발행한 인가장(印可状)이 있다. 전서 속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유의(流儀)의 진수(真髄)를 전수했음을 명언(明言)하는 그 전서를 받은 이는, 어쩌면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이거나, 그의 일족 중 누군가였을 것이다. 야스나가가「야마시로노카미(山城守)」로 임관되기 이전에「사에몬(左衛門)」을 자신의 통칭으로 쓰고있었다면 그가 당사자가 되겠지만, 이러한 점은 후고(後考)에 기대하고 싶다. 야스나가는 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를 양자로 삼은 무장이다. 그의 양자였던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가 바로, 훗날 칸파쿠(関白)가 되는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이다.
다음으로,「미요시 신우에몬노죠(三好新右衛門尉)」앞으로 분로쿠(文禄) 4년(1596)에 쓴 인가장이 있다. 즉, 미요시 후사카즈(三好房一: 당시 마흔세살)를 말한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거기다 히데츠구를 차례차례 모셔 온 무장으로, 이 인가장은 히데츠구가 히데요시 때문에 자결하고 거의 4개월 후(11월)에 주어진 것이다. 후사카즈가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복귀했을 때이다.
세번째 인가장은「마이타 곤자(蒔田権左)」앞으로 되어 있다. 즉,「사에몬 곤자(左衛門権左)」를 칭했던 마이타 히로사다(蒔田広定)라 여겨진다. 히로사다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이 패한 뒤에 개역(改易)당하게 되는데, 그후에 죄를 사면받아 빗츄(備中) 아사오(浅尾) 1만석(오카야마 현 소쟈 시)을 받게 된다. 세키슈사이가 마이타 앞으로 내어 준 인가장은 케이쵸(慶長) 7년(1602)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다이묘(大名) 신분이었다. 하지만, 마이타 히로사다와의 인연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이미 있었지 않았을까?
이러한 인가장들은 토요토미 정권과 야규 가문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史料 柳生新陰流』).
그런데, 세키슈사이의 제자들 중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이는, 노가쿠(能楽) 배우였던 콘바루 시치로 우지카츠(金春七郎氏勝)다.「노가쿠광」이라 일컬어졌을 정도로 노(특히 사루가쿠)를 좋아해서, 스스로 춤을 펼쳐 보인 적도 있었다고 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킨바루 하치로 야스테루(金春八郎安照: 젠쿄쿠)는,「오오다유(大太夫)」라 칭해졌을 정도로 명인이었다. 시치로 우지카츠는, 히데요시로부터 야마토(大和)에 500석의 지행(知行)을 받은 야스테루의 장남이다.
우지카츠는 젊었을 적, 가예(家芸)보다 병법(兵法)에 관심이 많아 부친을 고민케 했다. 그가 관심있어 했던 병법이 바로 신카게류였다. 세키슈사이로부터 우지카츠에게 준 전서는 다섯 점이 현존하고 있는데, 최초의 것은 그가 스물여섯살 때 받은『新陰流兵法目録(신카게류헤이호모쿠로쿠)』라 여겨진다. 마지막 전서는 서른한살 때(케이쵸 11년 = 1606)... 즉, 세키슈사이가 죽기 2개월 전에 전해준『兵法の極意(헤이호노쿄쿠이)』이다. 또, 그는 호조인류 창술(宝蔵院槍術)을 인에이(胤栄)에게서 사사받아 수행하여 인가장을 받기도 했다.
야마토 사좌(大和四座) 중 하나인 콘바루자(金春座)의 차기 당주 자리를 짊어져야할 후계자였으면서도 병법 수행에 매진해 가예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는 한 때, 부친으로부터 의절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의절 처분을 풀었으며, 가업은 남김 없이 그에게 전해지게 된다.
야규 가문에서 전해진 신카게류는, 노가쿠라는 예도(芸道)와 잘 맞는 요소가 적지 않다. 이는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세키슈사이는 콘바루 우지카츠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는 한편으로, 노가쿠를 통해 병법의 이치를 흡수했던 게 아니었을까?
복잡한 양상을 보인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야마토노쿠니(大和国)에서, 멋지게 처신해서 살아남았고, 후세에 신카게류 병법이라는「마스라오(益荒男: 남자다움을 의미한다)스런 문화」를 남긴 야규 세키슈사 무네요시라는 남자에 대한 평가는, 이후로도 더욱 더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