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근세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모체(母体)
~ 야규 마타에몬(柳生又右衛門)... 훗날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但馬守宗矩)가 태어난 겐키(元亀) 2년(1571)이라는 해는, 야규 가문에게 있어서 일대 재앙이 내려진 해였다. 아버지뻘 정도의 나이차가 있는 큰형... 당시 스무살이었던 요시카츠(厳勝)가 평생동안 낫지 않았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야규 고(柳生郷)에서 태어난 무네노리는, 우렁찬 외침과 함께 삶을 부여받은 동시에, 센고쿠시대(戦国時代)라는 비정한 시대의 공기를 들이키게 된다.
세키슈사이는 애처가였던 듯 하다.「슌토고젠(春桃御前)」이라는 호칭으로도 전해지는 아내 오노(おのう) 앞으로 보낸 유언서에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5남 6녀... 도합 열한명의 자식을 얻었던 자식복이 많은 인물이다. 무네노리는 그런 그의 자식들 중 여덟번째로 태어난 막내아들(아들들 중에서는 다섯째)로, 세키슈사이가 마흔세살 때 태어났다. 즉, 태어났을 때는 이미 위로 네 명의 형과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큰형인 신지로 요시카츠(新次郎厳勝)는 불행하게도 불구의 봄이 되었지만, 부상을 입기 전에는 부친 밑에서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을 수행했다.『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는, 후에 야규 고를 떠나 타국을 전전하던 중에 객사했다 전하고 있으며『寛政重修諸家譜(칸세이쵸슈쇼카후)』(에도시대 후기에 바쿠후에 의해 편찬된 다이묘나 하타모토들의 계보)의 야규 씨 항목에도「본령(本領)을 떠나 타국을 전전하였으며...」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3남 2녀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는 것, 또,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다음해인 겐나(元和) 2년(1616), 예순다섯살까지 살아있었기 때문에, 후반생의 대부분은 부모와 함께 야규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둘째 형은 즈이운인 큐사이(瑞雲院久斎)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선문(禅門)에 들어가 케이쵸(慶長) 10년(1605)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형도 승려로서 류조인 토쿠사이(竜蔵院徳斎)라는 호(号)를 썼다.
자식을 출가시켜 선조의 보다이(菩提)를 모시게 하는 것은, 센고쿠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독(家督)을 이어받은 자가 전사나 횡사하여, 다른 아들이 없을 경우에 이를 환속(還俗)시켜 일가의 존속을 도모하기 위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야규 가문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을 것이다. 토쿠사이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가 일어났을 무렵, 동군의 호소카와(細川) 씨의 중신인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의 신세를 졌던 적이 있었다 한다. 칸에이(寛永) 원년(1624)에 세상을 떠났다.
넷째 형은 고로에몬 무네아키라(五郎右衛門宗章)라 했다. 그의 생년은 미상이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이자, 훗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양자로 들어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를 모셨다. 그것은 어쩌면, 히데아키가 치쿠젠(筑前)의 나지마 성(名島城: 후쿠오카 시 히가시 구 나지마)의 성주였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서군에 속해있다 동군으로 배신」으로 이름을 떨친 뒤, 그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의해 비젠(備前), 빗츄(備中), 미마사카(美作) (모두 오카야마 현)의 타이슈(太守)가 되었는데, 케이쵸 7년(1602)에 급사하여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로 인해 야규 고로에몬 무네아키라는 로닌(牢人)이 되었다가, 호키노쿠니(伯耆国) 요나고(米子: 톳토리 현 요나고 시) 18만석의 성주 나카무라 타다카즈(中村忠一)의 보좌역(바쿠후로부터 파견)인 요코타 무라아키(横田村詮)의 신세를 졌다. 이는 요코타가 세키슈사이의 제자였던 인연에 의한 대우였다고『교쿠에이슈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로에몬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고로에몬이 신세를 지고있던 요코타가 케이쵸 8년(1603) 11월에 주살당한 것이다.
요코타 무라아키라라는 무사는, 요나고 성 축성에 공헌한 인물로, 성 안에「나이젠마루(内膳丸)」라는 쿠루와(郭)의 호칭이 남겨진 것은,「나이젠노쇼(内膳正)」를 그가 칭하고 있었 것에서 따왔다 한다. 당시까지의 호키노쿠니의 중심지는 쿠라요시(倉吉: 쿠라요시 시)였는데, 요코타의 노력에 의해 축성과 죠카마치(城下町) 정비,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요나고로 상업지구를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정치 방식이 너무나도 대담하고 화려했기 때문에, 당시 열네살이던 성주 타다카즈로부터 의심을 사고, 신하들의 시기를 사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는 피로 물든 내전으로 발전했다. 무라아키라의 적자인 슈메노스케(主馬助)가 요코타 일족을 벌한다는 처분에 대해 반항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는 일족을 저택에 모아, 윗사람이 보낸 자객에 맞서 항전했다.
이때, 요코타 가문에 의지하고 있던 야규 고로에몬은 함께 분전했다. 그때, 고로에몬 무네아키라는 신카게류의 도법(刀法) 중 하나인「역풍(逆風)」을 구사하여 자객인 갑옷 무사 열여덟명을 쓰러트리는 사자분신(獅子奮迅)의 활약을 보인 뒤 전사했다 한다.
세키슈사이이 아들들 중에서, 신카게류 병법에 특히나 숙달했던 이는 이 무네아키라와, 무네노리였다. 장유유서에 의한 가독 상속이 없었던 센고쿠 난세였다고는 해도, 자신이 모시고 있던 코바야카와 가문이 개역당하고, 그후 유랑한 끝에 죽지 않았더라면, 야규 가문의 가독은 무네노리가 아니라 무네아키라에게 물려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무네아키라의 죽음은, 그가 죽기 9년 전인 분로쿠(文禄) 3년(1594)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고용된 무네노리에게 일족의 장래를 짊어져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근세 야규 일족의 모체(母体)에 대해, 좀 더 특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장남 요시카츠의 아들... 즉, 세키슈사이의 손자이다. 요시카츠는 위에서부터 큐자부로(久三郎), 츄지로 헤이스케(忠次郎兵助: 모자에몬), 곤에몬(権右衛門)으로, 아들이 셋이었다(딸은 둘). 장남인 큐자부로는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500석에 고용되었다가, 케이쵸 2년(1597)의 두번째 조선 출병(케이쵸의 역 = 정유재란)에 종군했다가 울산 성 전투에서 주군인 요시나가들이 명나라와 조선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전사했다. 항년 스물한살이었다. 셋째 아들인 곤에몬은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게 1000석에 고용되어 병법 사범을 맡았다고 하는데, 생몰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차남은, 훗날의 효고노스케 토시토시(兵庫助利厳)이다. 장남인 큐자부로보다 세살 연하였던 토시토시는,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에게 1300석에 고용되었는데, 얼마 안 가 로닌이 되었고, 그로부터 20년 후, 서른일곱살 때인 겐나 원년(1615),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 가문의 한조(藩祖)인 요시나오(義直)에게 500석에 고용되어 병법 사범으로 임명된다. 무네노리를 시작으로 하는 통칭「에도 야규(江戸柳生)」와 대비되는... 이른바「오와리 야규(尾張柳生)」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토시토시에 대해서는 제 4 장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오와리의 야규 가문 역대에서는「厳」라는 글자를「토시」로 읽도록 했다).
덧붙여,『교쿠에이슈이』에 따르면, 여섯명의 딸들 중 셋은 야마토(大和), 둘은 야마시로(山城), 남은 하나는 이가(伊賀)로 시집보냈다. 딸들의 혼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모두 부케(武家)였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