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살아남은 야규 일족(柳生一族)
~ 오늘날, 야규 마을(柳生郷)을 방문해 보면, 공을 세우고 명성을 얻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의 생애를 그리는 사적(史跡)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예순여덟살 때인 칸에이(寛永) 15년(1638)에 부친인 세키슈사이(石舟斎)의 보다이(菩提)를 모시기 위해 무네노리가 창건한 사찰이 있다. 선(禅)의 스승이자,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타쿠안(沢庵)을 카이산(開山)으로 맞이하고, 초대 주지로 자신의 넷째 아들인 레츠도 기센(列堂義山)을 세운 호토쿠지(芳徳寺: 나라 시 야규시모 쵸)다. 그로부터 4년 뒤(칸에이 19년 = 1642)에 그가 세운 야규 한(柳生藩)의 진야(陣屋: 병영) 유적지도 남겨져 있다.
[야규 가문의 보다이지인 호토쿠지 본당]
이러한 사적에서 언급하다 보면, 스물네살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휘하(御麾下)」로 꼽혔다고 하는(『寛政重修諸家譜』) 무네노리의 파격적인 출세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입신의 길의 기점(起点)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뒤에 정권을 홀로 장악하려 한 이에야스와, 그것을 저지하려 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의 정쟁 속에서 이미 이를 인식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해인 케이쵸(慶長) 4년(1599) 1월 10일,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秀頼)가 쿄(京)의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이주했을 때 토요토미 정권의 정무를 대행하는 장(長)으로서,「오타이로(五大老)」의 필두격인 이에야스는 오오사카로 떠났다. 이때, 항상 이에야스를 타이로 자리에서 끌어내려 책동(策動)을 해 오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 습격을 계획했다. 그러한 소문이 돌아다녔던 데에 대해,『関原記(세키가하라키)』라는 군기(軍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있다.
【케이쵸 4년 정월 10일부터 여러가지 풍문이 떠돌아 세상이 소란스러워졌을 무렵, 야규 타지마노카미(柳生但馬守: 세키슈사이)는 자식인 마타에몬(又右衛門: 무네노리)을 시마 사콘(島左近)의 저택으로 보내어 사콘의 진술을 듣고 오도록 했다. 사콘은 그때, "요즘 같은 때에 마츠나가(松永: 히사히데)나 아케치(明智: 미츠히데) 같은 모반자가 있을 리가 없잖소"라 말했다. 이 이야기를 마타에몬으로부터 들은 타지마노카미는, "(이에야스에게) 적대할 법한 대장감은 존재하지 않는다(이 부분의 원문은 取り懸くべき大将あるまじき)고 말했다 한다】
여기서 나오는 시마 사콘(키요오키, 카츠타케 등 다양한 이름이 전해진다)은,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의 중신이었는데, 쥰케이가 죽은 뒤에 야마토 지배를 위해 히데요시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 배치한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를 따랐으며, 조선 출병에서는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秀保)의 군에 소속되어 크게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런 히데야스가 분로쿠(文禄) 4년(1595)에 병사한 뒤, 이시다 미츠나리의 삼고초려 끝에 그에게 고용되어, 이후에는 미츠나리의 절대적 신뢰를 받으며 충신이 되었다.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는데,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이다】
오우미(近江) 20만석을 영유한 미츠나리의 당당한 거성(居城)에 필적하는 가치를 지닌 노장이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분전에 의해 적병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 남자였다.
[시마 사콘 키요오키]
사콘은 생년이나 출신이 모두 불분명한데, 야마토노쿠니(大和国) 헤구리 고(平群郷: 나라 현 헤구리 쵸)의 지자무라이(寺侍)인 시마 씨의 센고쿠시대의 당주였음은 확실할 것이다. 이때문에 사는 지역과 처지가 비슷했던 야규 세키슈사이와 옛부터 교류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이용하여 세키슈사이에게 명령, 시마 사콘의 입을 통해 소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때의 정찰 임무를 직접 수행한 것이 이에야스에게 고용된지 5년이 지나있던 야규 무네노리였다
이시다 미츠나리에 의한 이에야스 습격은, 사콘의 언동을 통해 세키슈사이가 느낀대로,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 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타도에 대한 집념은, 해가 바뀐 케이쵸 5년(1600)에 구체화 되어 갔다. 그는 오우미에 갇혀있던 신세였지만, 다섯 타이로 중 한 사람인 아이즈(会津) 120만석을 영유한 타이슈(太守)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통모(通謀)하여 이에야스를 동서에서 협공하는 태세를 취해 갔다. 그런 우에스기 정벌을 결단한 이에야스는, 카미가타(上方)에서 대군을 이끌고 에도(江戸)에 도착하자, 20일 후인 7월 21일에 동정(東征) 길에 올랐다. 그 군세가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 토치기 현 오야마 시)에 착진했을 때(7월 24일), 이보다 먼저 이시다 미츠나리가 카미가타에서 거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의 도발에 그대로 걸려 든 것이다. 자신이 부재 중에 미츠나리가 거병하리라는 것은, 이에야스의 계산에 들어가있었던 것이다.
그 오야마 본진에서, 종군하고 있던 야규 무네노리를 이에야스가 불러들였고, 세키슈사이 앞으로 밀명을 담은 서장을 써서 준 것은, 착진으로부터 4일 후인 7월 29일의 일이었다. 주의(主意)는, 옛 쥰케이의 일족인 츠츠이 쥰사이(筒井順斎), 또, 이가(伊賀) 우에노 성(上野城)의 성주인 츠츠이 사다츠구(筒井定次)과 담합하여, 로닌(牢人)들을 끌어 모아 「충절을 다 하라」였다. 덧붙여, 자세한 것은 마타에몬 무네노리의 입을 통해 명령하겠다... 라고 덧붙여 두었다.
머지않아 발발할 천하제일을 판가름 하는 대전의 전장은, 토카이도(東海道) 어딘가일 것이라 상정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그 남쪽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야마토에도 전선기지를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또, 하시바 히데야스가 죽은 뒤에 코오리야마 성에 들어간 다섯 부교(奉行) 중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나아가서는 미츠나리의 고굉(股肱)한 맹장 시마 사콘을 견제한다는 효과도 있었다.
일찍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야마토에 손을 댔을 때, 야규 세키슈사이에게 그런 공작을 명령한 것을 흉내내어, 이미 병법이 인연이 되어 막하(幕下)에 고용되어 있던 세키슈사이와 자식인 무네노리에게, 이에야스는 거의 똑같은 임무를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오야마에서 말을 타고 먼길을 달려간 무네노리는, 세키슈사이에게 이에야스의 밀명을 전했다. 그리고, 세키슈사이는 츠츠이 씨와 공모하여 명령을 수행했다. 그것은 결전 전날인 9월 14일... 이에야스가 난구우 산(南宮山: 기후 현 타루이 쵸)의 적진을 아카사카(赤坂: 오오가키 시) 후방인 요지고에(余地越え) 인근에서 바라봤을 때의『徳川実紀(토쿠가와짓키)』(『東照宮御実紀附録』 巻十)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추고(推考)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가마 안에서 난구우 산 북면의 적의 모습을, 가마가 기울어질 정도로 몸을 내밀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셨을 때, 야규 마타에몬 무네노리가 다가와 "このたびの御上意めでたし。いずれもこれにさぶらふ(원문)"라 말을 하자, 이에야스 공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大儀であったぞ(원문)"이라 자신의 뜻(思し召し)을 전하셨다】
무네노리는 공작이 완료되었음을 은밀히 보고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후의 야규 씨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통해 추리하건데,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있어서 야규 씨의 공작 활동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활약이, 좀 더 있지 않았을까?
야규 씨는 전후에 2000석(이 중 1000석은 옛 영지의 안도)을 받고있다. 거기다, 그 익년(케이쵸 6년 = 1601)에는,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인 히데타다(秀忠: 당시 스물세살)로부터 신카게류(新陰流)에 입문하겠다는 서약을 담은 기청문(起請文)이 내려짐과 동시에, 가증(加増) 1000석을 받아 무네노리는 3000석의 하타모토(旗本: 녹봉 1만석 이하를 받는 신분)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활약을, 그러한 것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이리하여, 무네노리의 두 어깨에 모든것을 걸었던 야규 일족의 앞길이 열리게 된다.
정권이 두드러지게 교체되었던 야마토에서, 본래라면 지자무라이 일가에 지나지 않았을 이 일족이 살아 남게 된 것은 희유(希有)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