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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4 (0) 2017/03/11 PM 09:45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병법자(兵法者)에서 관료(官僚)로 변신

~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는 역대 쇼군(将軍)들 중에서도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쇼군이라 할 수 있다. 쇼군의 정실(正室)을 모친으로 두고 에도 성(江戸城)에서 태어난 쇼군은 사실 이에미츠 이외에는 없다. 그를 제외한 쇼군들은 측실(側室)의 자식이었거나, 토쿠가와 가문의 서류(庶流) 출신이었거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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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쿠가와 이에미츠]

 

 이에미츠의 치세(治世)는, 토쿠가와 15대 중에서 쇼군직의 권위가 가장 높았던 시대에 해당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창업한 부케 바쿠후(武家幕府)는, 2대째인 히데타다(秀忠)의 강력한 정치력에 의해 근세 국가의 정점에 자리잡게 되었으나, 이에미츠는 바쿠후의 이러한 체제를 지배 기구의 정비에 의해 안정시켜, 더 이상 흔들릴 게 없는 정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야스가 죽고나서 7년 뒤인 겐나(元和) 9년(1623) 7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의 선지(宣旨)를 받았을 때, 이에미츠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토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을 집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대까지의 쇼군은 그대들과 동렬(同列)인 다이묘였던 때도 있었소. 허나, 짐에 이르러서는 태어날 때부터 쇼군이었소. 이는 즉, 그대들 역시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와 같고, 또, 짐의 가신이기에, 더욱 더 그러하오. 만약, 짐의 뜻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가 있다면, 하루속히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앞으로의 거취를 결정하기 바라오」


 고압적인 태도로 내뱉는 말에 한 방 먹은 토자마 다이묘들은, 납거미처럼 바짝 엎드렸다 한다. 이에미츠가 실제로「태어날 때부터 쇼군」이라 스스로 말했는지는 의심해봐야겠지만, 젊은 쇼군의 기개를 전해주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 해에 마흔다섯살이었던 히데타다는 여전히 건재했고 기력도 충실했다. 이에야스가 그러했듯이, 오오고쇼(大御所)로서 군림하고 있던 히데타다와, 쇼군 이에미츠의 이원 정치 체제(二元政治体制)는 그후 9년간이나 이어졌다.

 그 세월이 흐른 해인 칸에이(寛永) 9년(1632)는 에도시대 역사들 중에서 대서특필해야할 시기이다. 동년 1월 24일에 히데타다가 쉰네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일원화(一元化)된「쇼군 정치」가 시작된다. 

 당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막말(幕末)의 정국(政局)에 영향을 준 영국인 외교관 어네스트 사토(Sir Ernest Mason Satow, 1843~1929)는, 일본의 근세를 야유했을 때에「잠 자는 숲 속의 공주」라는 비유를 썼다(『一外交官の見た明治維新』坂田精一訳 岩波文庫). 그「공주」가 잠들기 시작한 것은, 이 해에 시작된 이에미츠의 친정을 바탕으로 지정된 수많은 법령... 이른바,「쇄국(鎖国)」과 관련된 것, 산킨코타이 제도(参勤交代制度)를 성문화(成文化)한 것,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 치교다카(知行高)에 따른 군역령(軍役令) 등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이에미츠는「나는 태어날 때부터 쇼군이다」라 공언했다 한다. 또는, 히데타다가 죽은 뒤,「오오고쇼가 타계한 뒤부터는, 금후엔 나야말로 천하의 주인이다. 만약, 천하의 권세를 바라는 이가 있다면, 사양하지 말고 시도해 보아라. 짐이 상대해줄터이니...」라는 호언장담을,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에도 성으로 등성한 여러 영주들에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류의 일화가 적잖게 전해지는 이유는, 그의 정치가 일본의 근세 국가 구축에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꾸며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에미츠 시대에는 다이묘들의 개역(改易)이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힘에 의한 공포 정치」「무단 정치(武断政治)」로 평가되는 탓이겠지만, 그러한 점도 이런 일화를 낳은 배경이었음에 틀림 없다.

 다양한 의미로 획기적인 해가 된 이 칸에이 9년의 12월,「소메츠케(惣目付)」라는 역직이 신설되었다. 이는 훗날의 오오메츠케(大目付)에 해당하는 역직으로, 설치 당초에는「오오요코메(大横目)」등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임명된 이는 모두 네 사람으로,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政重), 아키야마 마사시게(秋山正重), 미즈노 모리노부(水野守信), 그리고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였다.

 당시 예순두살의 무네노리가 배명(拝命)받은 이 소메츠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에미츠의 눈과 귀가 되어 다이묘와 하타모토(旗本)를 감찰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게다가, 그 대상은 토시요리(年寄: 훗날의 로츄)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시요리조차도, 소메츠케의 눈빛에는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역직을 이에미츠가 신설한 의도는 자연스레 밝혀질 것이다. 그는 오오고쇼 히데타다의「니시노마루 정권(西の丸政権: 그의 거주지가 에도 성 니시노마루였던 것에 의한 호칭)」시대의 토시요리를 의지하지 않고도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정치를 전개하기 위해 상하(上下)를 막론한 정보망을 정밀히 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로츄(老中)와 와카토시요리(若年寄)를 중추로 하는 정치 체제가 정비되기에 이르면서, 소메츠케는 로츄의 지배하에 놓인 역직이 되었지만, 그 권위에는 절대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쇼군에게 문제점을 직소(直訴)하는 게 가능했으며, 게다가 로츄는 감찰당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감찰 내용은 꽤 다방면에 걸쳐 이뤄졌는데, 그중에서도 여러 다이묘들의 군비(軍備)에 관련된 것에는 눈을 번뜩이며 정보를 캐냈다. 구체적으로는, 성곽의 수복과 확장이나, 제방이나 도로의 보수, 관문(関所) 설치 등이다. 이 이외의 직무로는 에도 성 안에서의 다이묘의 언행에 관한 감독, 전례(典礼)와 의식(儀式)의 지도, 전국에 반포하는 법령의 시달(示達), 나아가서는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소송에 배석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단 정치 조직의 중추 세포 중 하나라고 해야할 이러한 요직의... 어쩌면 최우익(最右翼)이라 여겨지는 포지션에다 3천석을 가증(加増)받아 등용된 이가 다름 아닌 야규 무네노리였다.

 이에미츠는 자신의 병법 사범인 무네노리의 정보 수집 수완을 높히 평가했음에 틀림 없다. 그것은 소메츠케의 중요 임무 중의 중요 임무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나아가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정하고 있던 야규 씨의 비할 바 없는 가치는, 이 수완에 있었다. 이것을 계승해 온 무네노리는, 병법의 프로페셔널로서의 모습을 벗어나, 6천석을 받는 신분으로 입신하였으며, 그리고 이에미츠의 친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료(官僚)로 변신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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