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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5 (0) 2017/03/13 PM 06:24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큐슈 토자마 다이묘와의 긴밀한 관계

~ 칸에이(寛永) 9년(1632)이라는 해가 에도시대(江戸時代)라는 역사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인데, 특히나 큐슈(九州)의 정치사(政治史)에 있어서는, 훗날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쇼군(将軍)으로 취임한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는, 망부인 히데타다(秀忠)의 법요(法要)를 끝내자, 때마침 이 해가 조부인 이에야스(家康)의 17주기에 해당했기 때문에 닛코(日光)로 갔고, 상중(服喪中)이었던 탓에 중신인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를 대참(代参)시키고 난 뒤에 귀성했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52만석의 카토 타다히로(加藤忠広)의 개역(改易)이 여러 다이묘(大名)들에게 공표된 것은, 다망한 나날로부터 이에미츠가 일상을 되찾은지 얼마 안 되는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 일대사는, 카토 씨와 같은 큐슈의 토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에게 있어서 경천동지할만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의 큐슈는, 분고(豊後) 히타(日田: 오오이타 현 히타 시) 6만석을 영유한 이시카와 타다후사(石川忠総)가 유일한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였으며, 그 외에는 토자마 다이묘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큐슈는 변방의 땅이라는 것이기도 해서 바쿠후(幕府) 권력이 침투하는 게 늦었기 때문에, 다이묘 개역이나 이봉(移封) 등의 처단의 울타리 밖에 놓여있다는 느낌의 장소라 토자마 다이묘들은 오랫동안 평안를 탐닉하고 있었다.

 카토 타다히로가 개역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 길어 생략하겠지만,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0월이 되면, 큐슈에서는 쿠니카에(国替: 전봉, 영지 교체)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쿠마모토에는 토자마였으면서도 호소카와(細川) 씨 특유의 교묘한 처세술로 바쿠후의 신임을 얻었던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부젠(豊前) 코쿠라(小倉: 후쿠오카 현 키타큐슈 시 코쿠라 구) 40만석에서 쿠마모토 54만석(카토 씨의 영지에 2만석이 가증)으로 이봉되었다.

 큐슈의 정치 모양새는 이번 처단을 계기로 격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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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타다토시]

 

 먼저, 호소카와 씨의 옛 영지인 부젠노쿠니에 분고 2개 군(郡)을 더한 영토에는, 하리마(播磨) 아카시(明石: 효고 현 아카시 시) 10만석의 오가사와라 타다자네(小笠原忠真)가 15만석으로 이봉되었다. 카이 겐지(甲斐源氏) 출신인 오가사와라 씨는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이래 이어진 부케(武家)였으며,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며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죠(北条) 씨 정벌에 종군한 이래, 조선 출병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 오오사카 전투(大坂の陣) 등... 토쿠가와군에 속한 모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다이 다이묘이다. 타다자네의 코쿠라 이봉과 함께, 부젠 나카츠(中津: 오오이타 현 나카츠 시)에는, 타다자네의 조카인 오가사와라 나가츠구(小笠原長次)가 8만석으로, 또, 부젠 류오(竜王: 오오이타 현 우사 시)에는, 친동생인 마츠다이라 시게나오(松平重直: 셋츠 산다의 마츠다이라 시게타다의 양자)가 3만 7천석으로, 또, 분고 키츠키(杵築: 오오이타 현 키츠키 시)에는, 마찬가지로 타다자네의 동생인 오가사와라 타다토모(小笠原忠知)가 4만석으로 각각 이봉되었다. 이리하여 동부 큐슈 전체는 후다이 다이묘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오가사와라 이치몬(一門)은 큐슈 전토를 감시할 수 있는「큐슈 탄다이(九州探題)」같은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런데, 큐슈의 정치 지도가 이렇게 교체된 뒤에 소메츠케(惣目付)를 배명(拝命)받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는 이전부터 큐슈 다이묘와 적잖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두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가르침을 통해서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동년(칸에이 9년)에 쿠마모토로 입성한 당시 마흔일곱살의 호소카와 타다토시였다. 

 무단파(武断派) 무장으로서 전장에서 이름을 떨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의 셋재 아들로 태어난 타다토시는, 당초에는「나가오카(長岡)」라는 카바네(姓)를 썼으나,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던 케이쵸(慶長) 5년(1600)에 본래 성씨인 호소카와 씨를 쓸 것을 이에야스로부터 허가받았다. 4년 뒤, 열아홉살의 나이로 후계자가 되었으며, 겐나(元和) 7년(1621)에 서른여섯살 때 가독(家督)을 이어받아 부젠 코쿠라로 입성, 익년에는「엣츄노카미(越中守)」를 서임받았다.

 타다토시는 병법에 정통한 다이묘들 중에서도 손 꼽히는 영주였다. 그가 스승으로 삼은 이는 야규 무네노리로, 이미 십대 때부터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가장 먼저 전수받은 것은『新陰流兵法書(신카게류헤이호쇼)』(다른 이름은『進履橋』)로, 타다토시가 마흔한살 때인 칸에이 3년(1626)이었다 쿠마모토로 이주한 뒤인 칸에이 14년(1637)에는, 무네노리의 필생의 역작『兵法家伝書(헤이호카덴쇼)』를 전수했다. 덧붙여, 이 전서에는 무네노리의 참선(参禅)의 스승인 타쿠안(沢庵)의 직어(識語: 본문 전후에 덧붙이는 짧은 해설)를 게재한 인가장(印可状)이 첨가되어 있다. 거기에는「백지(白紙)로 병법의 마음가짐을 전한다(원문은 読み下し)」라고만 되어 있어, 이것을 통칭「백지 인가(白紙印可)」라 불렀다. 병법의 극의(極意)는 이미 전수해주었으니, 일부러 백지로 인가를 전수한다는 의미로, 검도(剣道)의 사료로서는 오늘날에도 특필되고 있다. 이만큼, 타다토시는 신카게류 병법의 정수를 깨우쳤음을 보여준다.

 호소카와 타다토시라 하면, 쉰여섯살 때 죽게 되는 최고만년에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를 손님 신분으로 우대하여 코리키마이(合力米) 300석을 준 다이묘로 유명하다. 츄고쿠지방(中国地方)의 다이묘들과 친하게 지냈으면서도 사관하지 않으며 고고한 생애를 걸어온 무사시가 쿠마모토 한(熊本藩)에 적을 둔 이유는, 한슈(藩主)인 타다토시가 검의 길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니텐이치류(二天一流)라는 병법을 보여주기에 걸맞는 인물이다... 라는 생각이, 쿠마모토로 내려간 무사시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한편, 타다토시는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는 무사시의 독창적인 병법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타다토시는, 코다치(小太刀)를 표예(表芸)로 하는 츄죠류(中条流) 계열 검술인 니카이도류 평법(二階堂平法)을 가신인 마츠야마 몬노 다이키치(松山主水大吉)에게서 사사받았다. 하나의 유파에 얽메이지 않고 문무양도를 중시한 가풍 때문에, 병법을 탐욕스럽게 흡수하려 했음에 틀림 없겠지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역시나 신카게류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후계자인 미츠나오(光尚)의 검술 스승으로, 무네노리의 수제자인 우메하라 쿠헤에(梅原九兵衛)라는 자를 고용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토사(土佐)의 쵸소카베(長宗我部) 가문의 로닌(牢人)이었으면서 무네노리 제자로 꼽히는 쿠헤에를, 타다토시는 300석에 고용하려 했으나, 한번은 이를 사퇴했다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병법이 아직은 미숙하기에, 지금은 수행에만 전념하게 해주셨으면 한다」라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쿠헤에는 나중에 미츠나오의 죠에도(定江戸: 에도 한테이 상근) 때의 가신으로서 고용되었다. 

 타다토시와 무네노리, 호소카와 가문과 신카게류 사이는, 이만큼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음에 이야기할, 히젠(肥前)의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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