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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7 (0) 2017/03/16 PM 06:14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시마바라의 난」과 무네노리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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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바라의 난을 묘사한 병풍도]

 

~ 쇼군(将軍)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대외 정책은 두 말 할 것 없이 후세에서 말하는「쇄국(鎖国)」정책으로 요약된다. 잇달아 반포된 그의 법령에 의해, 일본인의 해외 왕래는 금지되고, 가톨릭을 단속하여 외국 배에 의한 무역이 엄격히 통제, 혹은 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이 일어났다. 칸에이(寛永) 14년(1637) 10월부터 익년 2월까지 이어진 이 봉기는, 기근에 의한 이 지방의 황폐화에다, 시마바라 성(島原城)의 성주인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와 아마쿠사(天草)의 영주인 테라사와 카타타카(寺沢堅高: 히젠 카라츠 성의 성주)의 가혹한 정치가 가해진 데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스다 토키사다(益田時貞: 통칭 "아마쿠사 시로")를 맹주로 한 카톨릭 교도들에 의해, 봉기 세력의 단결이 상당했기 때문에, 바쿠후(幕府)는 그에 대한 진압에 고심하다, 결국 이를「카톨릭 신자의 반란」이라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난이 있은 후, 카톨릭 탄압과 함께「쇄국」정책이 강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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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쿠사 시로]

 

 그런데, 이 해 11월 11일의 일이었다. 

 전년인 칸에이 13년(1636)에 4천석을 가증(加増)받아 1만석의 다이묘(大名)로 올라감과 동시에, 소메츠케(惣目付) 자리에서 물러난 야규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柳生但馬守宗矩)는, 이 날 치쿠고(筑後) 쿠루메(久留米: 후쿠오카 현 쿠루메 시)의 성주인 아리마 겐바노카미(有馬玄蕃頭)의 저택에서 개최된 사루가쿠(猿楽) 공연에 참가하고 있었다. 오후 3시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는데, 야규 가문의 낭당이 달려와 다음과 같은 급보를 전해주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지방(나가사키 현 미나미시마바라 시)에서 야소(耶蘇: 예수 그리스도)의 문도(카톨릭 신자)가 영주인 마츠쿠라 씨를 배신하여 봉기하였으며, 반도 남부의 옛 영주인 아리마 씨의 성에서 현재는 폐성되어 있는 하라 성(原城)에서 농성했다. 그러한 보고를 받고서, 이에미츠가 큐슈(九州)의 다이묘로 조직한 진압군의 총지휘관으로서의 사자로,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 쇼시다이 이타쿠라 시게무네의 동생으로 미카와노쿠니 후코우즈 1만 5천석의 영주)를 임명하였고, 이미 출진시켰음을 알려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무네노리는 연회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리에서 아리마 겐바노카미에게 빌린 준마에 채찍질을 가하며 서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시나가와 숙영(品川宿), 거기서 다시 카와사키 숙영(川崎宿)까지 달려갔지만, 이미 사자인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2~3리 앞까지 도달해 있는 모습을 보자, 즉시 되돌아와 등성했다.

 그 무렵, 이에미츠는 병 때문에 정무를 집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게다가, 무네노리가 등성한 것은 이미 한밤 중이었다. 하지만, 완강하게 알현을 요청했기 때문에 겨우 출좌(出座)한 이에미츠에게, 무네노리는「이타쿠라님을 사자로 파견하시는 명령을 즉각 물리셔야 하옵니다. 카톨릭 신자인 농민 봉기를 얕보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필시 이타쿠라님은 전사하실 것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에미츠가 겨우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무네노리의 충고에 기분이 나빠져 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네노리에게 물러나라 말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재차 자리에 앉아「이타쿠라가 전사하게 될거라는걸, 그대는 어찌 아는가?」라며, 이에미츠는 거친 말투로 힐문했다. 

 무네노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잇코슈(一向宗) 봉기 제압에 고생했음을 예로 들며, 대게 신앙심이 두터운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라 설득하였고, 또,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사자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타쿠라님이 지금보다 입지와 코쿠다카(石高)가 높아져, 중요한 역직에 임명된다면, 서국(西国)의 여러 다이묘도 너도 나도 어지럽게 그분의 지휘하에 들어가려 할 것이온데, 현재의 기량으로는 역부족이옵니다. 여러 다이묘들은 처음에야 그분의 지휘를 따라 열심히 활약할 것이오나, 앞서 말씀 올린대로 난적인 봉기세력을 공격하기 어려워지기라도 한다면, 손발이 맞지 않게 될 것이옵니다. 그리 되면 다음에는 중진이 사자로 임명되어 봉기 진압의 지휘를 맡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체면을 짓밟힐 것이 분명한 이타쿠라님은 설령 단 한 기만 남을지라도 집요해질 것이옵니다. 그런 탓에 전사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그리고 무네노리는, 시게마사를 되돌아 오게 하고 그 임무를 자신에게 맡겨달라 아뢰었다.「농민들 때문에 천하의 사자가 전사해버린다면, 아주 훗날까지 웃음꺼리가 될 것이니, 여기서는 부디 제가 설득에 나서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미츠는 무네노리가 아뢴 말에 이해하는 듯 했지만, 이제와서 손 쓰기엔 늦었다는 말을 꺼냈다. 당시에는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만이 병 때문에 산킨코타이(参勤交代)를 안 하고 있었지만, 그외의 다른 큐슈의 다이묘들은 에도(江戸)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여러 다이묘들과 자제들에게, 봉기군 진압에 군세를 보내도록 즉각 귀국을 명령한 뒤이기도 해서, 즉시 지휘관을 교체할 상황이 아니었다. 무네노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결과는 무네노리가 예상한대로 되었다. 시마바라로 들어간 이타쿠라 시게마사는, 12월 10일과 20일의 두 번에 걸쳐 하라 성으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가했지만, 적인 농성군의 방어전은 예상 외로 막강하여 두 번 다 패퇴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이보다 앞선 12월 3일, 이에미츠에게 명령을 받은 제 2차 사자인 로츄(老中)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信綱)가 에도를 떠났다. 이것도 무네노리가 상정한대로였다. 두 번의 패퇴 후인 12월 29일, 후다이(譜代)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씨의 거성(居城)인 부젠(豊前) 코쿠라(小倉)로 노부츠나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타쿠라 시게마사는, 공을 세우는 데에 초조했던 나머지 예정 밖의 무모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것이 해가 바뀐 정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군세의 동요를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진두에 서서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한 시게마사는, 결국 날아든 총탄을 맞아 전사해버렸다. 

 당시 말로「아리마 전투(有馬の陣)」즉,「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진압 전쟁은, 2월 27일이 하라 성 함락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이 전쟁을 전한 선승(禅僧) 타쿠안(沢庵)의 편지에 따르면, 무네노리가 예상한 일들이 하나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위도 아래도, 모두 류탄(流但:무네노리의 약칭)이 말한대로」라 경탄했다 한다.


「야규 타지마노카미는 결코 평범한 일개 검객이 아니었어」


 훗날, 카츠 카이슈(勝海舟)가 이렇게 평가했다.

 

「명의(名義)야 검법 사범이지, 상당히 낮은 가격(家格)이긴 했으나, 3대 쇼군(将軍) 때에는 대단한 권력을 갖고 계셨지. (중략) 표면적으로는 일개 검법 지도 사범 자격으로 쇼군 근처를 드나들고, 매일처럼 열심히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에, 세간의 사람들도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실제로 이 남자에게 대단한 권력이 있었다는 것은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야 알 수 있었어」(『氷川清話』)


 인물을 평가하길 좋아한 카이슈는, 앞에서 말한대로 봉기가 일어났을 당시의 무네노리의 언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봉기가 발발했다는 정보는 에도에서 어떤식으로 들어왔는가 하면, 먼저, 시마바라 한의 가로로부터 분고 후나이메츠케(府内目付)에게 보고되었다. 바쿠후의 이 역직은, 불손한 언행 때문에 앞서 히데타다(秀忠)가 개역(改易)시켜 분고로 유배보낸 에치젠(越前)의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를 감시하는 하타모토의 역직이었다. 시마바라 한의 가로는, 이 보고를 올림과 동시에, 이웃 한인 사가(佐賀) 나베시마(鍋島) 씨와 쿠마모토(熊本)의 호소카와(細川) 씨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바쿠후의 지시 없이 타국에 출병하는 것은「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한은 요청에 응하지 못 했지만, 급보는 에도 한테이(藩邸)에 있던 한슈(藩主)에게 도착했다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네노리와 이 두 가문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고 후나이메츠케로부터 이에미츠에게 보고가 좀 더 늦어, 바쿠후의 처분에 대해 두 가문이 모두 무네노리에게 정보를 가져다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평소, 두 가문과의 교류 속에서 큐슈의 정세에 정통해있던 무네노리는, 그 정보를 분석한 다음 자신의 판단을 이에미츠에게 전했음에 틀림 없다.

 후일담이 있다.

 제 2차로 파견된 사자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는, 하라 성 총공격을 2월 28일로 결정했는데, 전날에 나베시마군과 봉기군 사이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어, 이를 나베시마의 새치기라 판단한 여러 군세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앞다퉈 성으로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생각지 못한 난전이 되었기에, 전후에 사가 한의 한슈인 나베시마 가문은 영지 몰수와 카츠시게(勝茂)의 데와(出羽) 유배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는데, 이 때, 뒤에서 움직이며 카츠시게를 반년짜리 근신 처분으로 마무리 짓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야규 무네노리였다. 

 아래는, 애제자였던 나베시마 모토시게(鍋島元茂) 앞으로 보낸 무네노리의 편지를 의역한 것이다(『元茂公年譜』 소장)


【이번 시마바라 건에서의 수고와 공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젠(御前: 이에미츠)에 대한 저의 처분에는, 아무런 실수가 없으니 부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안심하도록 하십시오】


 나베시마 카츠시게가 근신 처분을 받은 것은 4월(칸에이 15년)의 일로, 동년 9월에 쇼인반(書院番)에 출사한 야규 쥬베에(柳生十兵衛)도 어떠한 형태로 나베시마 가문이 처한 존망의 위기를 구하는 데에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무네노리와 쥬베에를 모시는 작은 사당이 훗날에 세워진 이유는, 야규 부자에 대한 보은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들 만큼의 권세를 자랑한 로츄 마츠다이라 노부츠나의 처단을 회유한 무네노리였다. 카이슈가 말한「대단한 권력」이라는 표현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을테지만, 이에미츠 및 막각(幕閣)에 대한 무네노리의 은연한 영향력... 만만찮은 저력(底力)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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