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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9 (0) 2017/03/19 PM 08:42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고승 타쿠안(沢庵)과의 교류

~「야규 일족(柳生一族)」을 주제로 한 본서이지만,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에 대한 기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게 되었다. 일족 전체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인데, 여기서 일단 한숨 돌려야겠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몇번인가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고승 타쿠안(沢庵)과 무네노리의 교류에 대해서는 다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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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미야모토 무사시』나 만화『배가본드』, 그리고 단무지(타쿠안)로 친숙한 인물인 타쿠안 소호]

 

 타쿠안은 한 살 연하였으면서도, 무네노리의 사우(師友)라 해야할 법한 고승이다. 무네노리의 참선(参禅) 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兵法)에 대해 계몽(啓蒙)한 인물이었으며, 또, 공사(公私)에 걸쳐 좋은 조언자였다는 것이,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宮本武蔵(미야모토 무사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 고승이었다.

 무네노리의「저력(底力)」의 최고의 원천(源泉)은 사실 타쿠안이라는「선지식(善知識)」과 이신전심(以心伝心)의 교류를 유지한 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당초 무네노리와 타쿠안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자의 사건(柴衣事件)」이라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종교 정책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친정(親政)이 시작되기 5년 전, 아직 오오고쇼(大御所) 히데타다(秀忠)가 주도하던 정치가 전개되고 있던 칸에이(寛永) 4년(1627)에 일어난 이 사건은, 황실로부터 임제종(臨済宗)의 다이토쿠지(大徳寺), 묘신지(妙心寺)의 승려에게 하사된 승복인「자의(柴衣)」를 바쿠후(幕府)가 지인핫토(寺院法度)라는 법규를 방패 삼아 박탈한 것으로, 이러한 처사에 따르지 않았던 다이토쿠지의 타쿠안들이 처벌받은 사건이다. 타쿠안은 서른두살까지 수행을 거친 뒤 다이토쿠지의 153대째 주지가 되었으며, 거기다 다이토쿠지의 장로가 되어 쿄(京)와 사카이(堺)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전개해왔지만, 사건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칸에이 6년(1629), 데와(出羽)의 카미노야마(上山: 야마가타 현 카미노야마 시)로 유배된다. 그리고, 일반 사면에 의해 에도로 소환된 것은 3년 뒤... 히데타다가 세상을 떠난 칸에이 9년(1632)의 일이다. 

 이 때의 일에 대해, 훗날 타쿠안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 시절엔 야규님과 호리 탄슈(堀丹州: 에치고 혼죠 10만석인 호리 탄고노카미) 두 사람만큼, 우리들을 신경 써 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에 급급한 나머지, 보고도 못 본 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교시츠(玉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벌받은 승려 중 한 명)나 나를 탈 것에 태우고, 자신들은 말을 타고 텐카이 승정(天海僧正: 이에야스에게 후대받았던 천태종의 승려) 곁으로 함께 가주며 진심을 다해주었으며, 또, 토시요리(年寄: 훗날의 로츄)들에게도 미리 귀띔을 해 두어 움직이기 편하게 편의를 봐주셨다】(오고 큐에몬 앞으로 보낸 서장으로 칸에이 13년 2월 25일자로 되어 있다)


 타쿠안은 무네노리에 대해「上方よりの知音にて候。紫野の昔から参徒にて内縁ふかき人」라고도 기록한다. 무네노리의 형인 큐사이(久斎), 혹은 토쿠사이(徳斎)가 다이토쿠지파의 선승이었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생겨난 것이라 추고(推考)할 수 있는데, 어찌됐든, 꽤 이전부터 무네노리는 타쿠안에게 사사받으며 여러가지를 배웠던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친하게 교류하게 된 것은, 사면받아 에도로 소환된 타쿠안의 처지가 호전되도록, 무네노리가 여러가지로 돌봐준 뒤부터였다.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네노리는 이에미츠에게 타쿠안을 추거하기도 했다. 

 행운유수(行雲流水)하며 행각(行脚)하였고, 또, 다이토쿠지의 장로가 되면서부터는 쿄토나 남도(南都) 나라(奈良) 등을 돌아다닌 타쿠안은, 각지의 풍토와 역사, 기질, 거기다 정치적 성향에도 밝았다. 물론, 박학다식하였고, 특히나 의학에 정통해 있었다. 선(禅)의 가르침과 함께 그의 식견은, 이에미츠의 정치에 힘에 되어줄 것임에 틀림 없다며 병법의 사범이자 소메츠케(惣目付)였던 무네노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른바 정사 고문(政事顧問)과 종합적인 교육자로서, 그는 타쿠안을 이에미츠에게 추천했음에 틀림 없다. 

 사면으로부터 2년 뒤인 칸에이 11년(1634) 이리하여 타쿠안은 쿄토 니죠 성(二条城)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했다. 타쿠안에게 매료된 이에미츠는, 점차 귀의(帰依)를 생각하게 되었고, 익년(칸에이 12년 = 1635)에는 에도로 불러들인 끝에 칸에이 16년(1639)에는 시나가와(品川)에 토카이지(東海寺)를 건립하여 타쿠안을 그 사찰의 카이산(開山)을 맡겼다.

 타쿠안은 토카이지에 오래 머물게 된 것도, 자신이 말한「바쿠후에 묶인 몸(원문은 繋ぎ猿)」같은 대우에 그저 안주하고 있었던 것도 모두 본심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주 에도에서「증발(蒸発)」하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타쿠안반(沢庵番)」이라는 사찰 승려로 구성된 파수꾼이 두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설법한 점들은 이에미츠의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자면, 야규 무네노리 앞으로 보낸 서장(칸에이 11년 10월 7일자)에서 말한 것은 후에 이에미츠가 칸에이 16년부터 익년에 걸쳐 다이묘(大名)나 하타모토(旗本)에게 검약을 권장케 하는 법령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타쿠안은 서장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사치를 금지시키면 치세(治世)가 잘 풀리게 될 것이옵니다. 상하를 막론하고 사치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빈곤해져버릴 것이옵니다. 먼저 검약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광산 계발 등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옵니다. 거기다 노동력을 착취해버리면, 그만큼 오곡을 경작하는 일손이 부족해질 것이옵니다. 담배 같은 사치품을 만드는 것도 금물이옵니다. 담배를 만드는 만큼, 오곡을 제배할 밭이 적어지게 되니, 생산력이 낮아질 것이옵니다】


 칸에이 1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흉작이 만성화되어 있던 상황을 거울 삼아, 타쿠안은 광산 개발과 담배 재배를 특히나 문제삼아 지적하며, 당시로서는 참신했던「검약」이라는 관념을 강조한 것이다.  칸에이 19년(1642)에 대기근을 맞기 이전, 타쿠안의 뜻을 받들어 검약이 이에미츠 정치에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주목해 두어야할 것이다. 

 이 편지도 그러하지만, 타쿠안은 무네노리에게는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하곤 했다. 그 문면을 통해서는, 때로는 무네노리의 인간미 넘치는 부분이 드러나고 있기에 흥미롭다. 

 이른 이야기지만, 검약을 설파한 이 서장의 나오나오가키(尚々書: 추기)에서는, 무네노리의 흡연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이따금 그대(무네노리)가 생각나 뵙고 싶은 요즘이옵니다. 모쪼록, 오래 살고자 하신다면 분별을 갖춰주셨으면 합니다. 담배는 끊으시는 게 어떨런지요. 담배를 태우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담배를 끊지 않으시면 가슴 통증도 멎지 않게 될 것이옵니다. 흡연 탓에 사람들은 "암"이라는 병에 걸리니까요】


 또, 무네노리가 사루가쿠(猿楽)에 빠져있는 점에 대해서도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대는 난무(乱舞: 노가쿠를 가르킨다)를 좋아하셔서, 스스로 달인임을 뽐내시고는, 여러 다이묘들을 찾아 가 이를 장려하는 듯 하시온데, 이는 좋은 행동이라 할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교훈을 무네노리에게 써준『不動智神妙録(후도치신묘로쿠)』라는 책에 첨부해 두고 있다. 

 노가쿠(能楽)는 토쿠가와 바쿠후의 시키가쿠(式楽)라 여겨진다. 다이묘들도 목견(目見)을 허락받은 이상 막신(幕臣)... 즉, 하타모토의 기본 소양으로서 정착해 있었다. 노가쿠의 발상지인 야마토 출신인 무네노리는, 일찍부터 이 예도(芸道)를 접하였고, 그로 인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듯 하다. 그것을 재주 삼아, 오늘날의 조직 사회인에게 있어서의 골프 처럼 사교나 인맥 만들기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던 모습이 지나쳤을 정도였기 때문에, 타쿠안은 이를 충고한 것이다.

 실제로, 무네노리는「노광(能狂)」이라 불리웠을 정도로 이 기예를 애호했다. 일흔두살이었던 여름 7월, 에도 성 니노마루(二ノ丸)의 노 무대에서 연습하고 있던 도중에 일사병에 걸려 쓰러졌을 정도로, 만년까지 춤을 계속 추고 있었다. 

 원래 노가쿠와 병법은 상통(相通)하는 점이 적지 않았다. 노가쿠에는「타치아이(立合)」라는 말이 있다. 타치아이에는 복수의 자(座: 이른바 극단)의 배우가 같은 날, 같은 무대에서 순차적으로 무대에 올라가 기술을 겨루는 경우 이외에도, 다른 극단의 배우들끼리 무대에 서서 연기하는「아이마이(相舞: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춤을 추는 것을 의미)」풍의 경연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는 존재했다. 어찌됐든,「타치아이」는 관객의 평판을 통해서 극단의 연명이 좌우되는... 노가쿠 배우들의 진검 승부라 해도 좋았다. 그런 탓에,「노성(能聖)」이라 칭송받는 제아미(世阿弥)는 노가쿠의 이론을 설파할 때에 자주 병법의 예를 인용하고 있었다. 

 무네노리가 노가쿠에 열심히였던 것은, 필시 취미의 영역을 벗어나, 병법의 이치를 노가쿠를 통해 흡수하기 위함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실제로, 그는 대표작인『兵法家伝書(헤이호카덴쇼)』에서 자주 노가쿠의 전문용어나 비전(秘伝)되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타쿠안이 간파했던대로, 그것을 처세를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도 확실했을 것이다.

 사람 좋아하는 무네노리였던 탓에, 그의 품행에 노파심에서 충고를 할 수 밖에 없었던 타쿠안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괴롭게 비춰졌을테지만, 그 또한 무네노리의 인간다움의 일면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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