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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30 (0) 2017/03/22 AM 11:46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필생의 저서 『헤이호카덴쇼』의 노림수

~ 무네노리(宗矩)와 타쿠안(沢庵)의 이러한 교류 속에서 태어난 두 권의 명저(名著)가 있다. 모두 앞서 다뤘던 서적으로, 타쿠안의『不動智神妙録(후도치신묘로쿠)』와 무네노리의『兵法家伝書(헤이호카덴쇼)』이다.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我輩は猫である(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도 그 명언이 인용되는『후도치신묘로쿠』는, 저자인 타쿠안이 무네노리라는 한 개인을 위해 붓을 들었다는 점에서도, 일본 문화사에 있어서 이채로움을 띄고있는 고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쿠안의 선풍(禅風)이 가진 특색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서인『結縄集(케츠죠슈)』의「仏法能く収りたるは、世法に同ず。世法能く収りたるは、仏法同ず。道は只日用み、日用の外に道なし」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불법(仏法)과 세법(世法: 속세에서 통하는 진리)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생각... 즉, 불도(仏道)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시대의 인심(人心)에 응해 유연하게... 알기 쉽게 선(禅)을 설파한 이가 바로 타쿠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리(禅理)로서 검리(剣理)를 설파한『후도치신묘로쿠』는, 타쿠안류 선(禅)의 진수를 이루고 있으며, 뛰어난 고전의 단골로서, 검도(剣道) 뿐만 아니라, 널리 서도(書道) 등의 예술을 포함한 일본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편,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정수를 집대성한 무네노리의 필생(畢生)의 역작『헤이호카덴쇼』는,『후도치신묘로쿠』에서 설파한... 이른바,「검선일여(剣禅一如)」라는 진리, 특히나 두 길의 닮아있는「마음(心)」의 형태를 예리하게 파고든 서적으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五輪書(고린쇼)』와 더불어 무도서(武道書) 중에서 쌍벽을 이루는 고전이라 여겨진다. 

「進履橋(신리쿄)」「殺人刀(세츠닌토)」「活人剣(카츠닌켄)」(「無刀之巻」를 포함)... 이 세 권으로 이뤄진 이 서적이 저술된 것은, 기이하게도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친정(親政)이 있었던 첫 해, 또, 무네노리로서는「소메츠케(惣目付)」라는 역직에 취임한 칸에이(寛永) 9년(1632)의 일이다. 본래부터 신카게류 병법의 철리(哲理), 그리고「심법(心法)」에 중점을 두고 기법(技法)을 설파한 서적이었지만, 이 해에 성립했다는 것에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무네노리는 자손들이나 제자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쇼군(将軍)의 경세(経世)의 지침서로 삼겠다는 노림수를 담아서 이 서적을 저술했음에 틀림 없다.

 1 대 1 전투인 병법이 전쟁에서의 그것과 비교해 뛰어나게 통용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쓰여진『헤이호카덴쇼』는, 궁극적으로는「타이쇼(大将)의 병법」... 리더로서 가져야할 마음가짐의 형태를 말하려 한 것이다(참고 『新訳 兵法家伝書』 渡辺誠編訳 PHP研究所).     

 

 

◎ 숨은「참모(参謀)」의 최후

~ 야규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柳生但馬守宗矩)가 일흔여섯살의 생애를 마감한 것은, 타쿠안(沢庵)이「夢」이라는 한 글자를 유게(遺偈)로 남기고 입적(入寂)한 다음해인 쇼호(正保) 3년(1646), 벚꽃이 날리는 3월 26일의 일이었다.

 사지(死地)는 에도(江戸) 아자부(麻布) 히가쿠보(日ヶ窪)에 있던 야규 가문 별저(別邸)이다. 현재의 롯폰기 힐즈(六本木ヒルズ)의 게이트 타워 남쪽, 미나토 구(港区) 모토아자부(元麻布) 3쵸메의 교회나 고등학교, 초등학교가 나란히 세워진 땅으로,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는 시모우사(下総) 오미가와(小見川) 1만석의 다이묘가 있었던 1만 천여 평의 부지가 별저가 있던 땅에 해당한다. 타쿠안이 토카이지(東海寺)의 카이산(開山)으로 임명되기 이전, 에도에 체류했을 때에 머물렀던 곳도 이곳이다.

 무네노리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하시바(橋場: 타이토 구)에 있는 소센지(総泉寺)에서 화장해, 시타야(下谷) 코토쿠지(広徳寺)에 매장되었다. 시호(諡号)는「사이코인덴젠탄슈타이슈타이츠소카츠타이코지(西江院殿前但州太守大通宗活大居士)」. 4월 4일에는 쿠제 야마토노카미 히로유키(久世大和守広之) 등의 면면들을 코토쿠지로 파견했고, 4월 6일에 종 4위하를 증위(贈位)하는 서찰을 내려보냈다.『文政寺社書上(분세이지샤카키아게)』(1826)에 따르면, 엔만잔 코토쿠지(円満山広徳寺)는 사찰 안의 10개 인(院)의 시인(子院)을 받드는 임제종(臨済宗)의 대사찰이었다 한다. 무네노리가 매장되었을 때는 현재의 타이토 구(台東区) 히가시우에노(東上野) 4쵸메에 있었지만, 칸토 대지진에 의해 소실된 뒤, 타이쇼(大正) 14년(1925)에 묘지가 네리마 구(練馬区) 사쿠라다이(桜台)로 이전되면서 별원(別院)이 되었고, 이어서 혼보(本坊)도 쇼와(昭和) 46년(1971)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무네노리의 사인(死因)은, 타쿠안이 걱정했던「かく」였다. 이는 즉 폐암이라 여겨진다. 그것이 3월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임종 소식을 들은 쇼군(将軍)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는 서둘러 파발을 보내어 쿄토(京都)에서 의사를 파견케 했다. 이것이 3월 7일의 일이다. 10일에는 스스로 히가쿠보에 있는 별저로 내려와 병석에 누운 무네노리를 간병했다. 무네노리는 쿠제 히로유키와 쿠츠키 타네츠나(朽木稙綱)에게 부축받으며 이에미츠를 알현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에미츠로부터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오비(奥秘)에 대한 하문이 있었다 한다. 이는 병법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한 것이리라. 

『徳川実紀(토쿠가와짓키)』(『大猷院殿御実紀』 巻六十四)는 이렇게 기록한다. 


【무네노리는 병법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대국(大局)에 정통했다. (이에미츠에 대해서는) 선리(禅理)로 검리(剣理)를 가르쳤으며, 검리로 정사(政事)를 논하는 바가 있었기에, (이에미츠의) 신뢰와 존경심이 두터웠다】


 그리고, 이에미츠가「내가 천하를 통치하는 방법은, 무네노리로부터 배웠다」고 항상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로 이어지는 토쿠가와 초기 삼대를 모셨고, 일흔살에는 1만 2500석의 다이묘로 출세한 무네노리는, 에도시대 초기의 숨은「참모(参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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