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또 하나의 야규(柳生) 가문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신카게류(新陰流)
◎ 토시토시(利厳 = 죠운사이)의 후계자들
~ 초기의 야규(柳生) 가문의 장남들은 무운(武運)이 따르지 않았던 사람이 많다.
세키슈사이(石舟斎)의 장남인 요시카츠(厳勝)는 스무살 때 전장에서 부상을 입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불구자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요시카츠의 장남인 큐자부로(久三郎)는 스물한살 때 조선 출병에 종군했다가 전사했다. 그러고 보면, 마흔네살 때 졸도사한 쥬베에(十兵衛)는 무네노리(宗矩)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의 효고노스케 토시토시(兵庫助利厳)의 장남인 키요토시(清厳)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阪夏の陣: 겐나 원년 = 1615)에 토시토시의 장남으로서 태어난 신자에몬 키요토시(新左衛門清厳)는, 어릴적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시가(詩歌)에도 뛰어났다. 성장해서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의 코쇼(小姓)로서 출사하여 300석을 받았으나, 난치병에 걸려 사직하고 말았다. 오와리 한(尾張藩)의 한시(藩士)이자 병학자(兵学者)였던 치카마츠 시게노리(近松茂矩)의『昔咄(무카시바나시)』(겐분 3년 = 1738)는 키요토시가 사직한 이유에 대해,「술을 많이 마시면 취해서 난동을 피워댔기에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이유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키요토시도 칸에이(寛永) 15년(1638) 새해 첫날에 아리마 전투(有馬の陣:「시마바라의 난」진압 전쟁)의 총공세에 종군하여 무운이 따르지 않아 전사한다. 아직 스물네살의 젊은이었는데, 그에 관해 남겨진 이야기가 다양하다. 병 때문에 칩거하고 있었을 때, 시마바라 봉기(島原一揆) 보고를 받자「아리마 온천에서 쉬기도 할 겸」(『名古屋市史』)해서 당지로 떠났으며, 봉기군 진압군의 죠시(上使) 중 한 사람인 이시가야 사다키요(石谷貞清)에게 청원하여 시마바라 한(島原藩)의 마츠쿠라(松倉) 부대에 가세하다 전사했다는 것이 그 중 한가지 설이다.
그런 키요토시의 다섯살 아래 동생... 즉, 토시토시의 차남의 이름은 모자에몬 토시카타(茂左衛門利方)라 했다.
열아홉살 때, 출부(出府)하여 요시나오의 후계자인 미츠토모(光友: 당시 열네살. 훗날 오와리 한의 2대 한슈)의 병법 사범으로 임명된 토시카타는 10년 뒤인 케이안(慶安) 원년(1648), 부친인 토시토시의 은거에 따라 가독(500석)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병법 사범직을 사직하고 이복 동생인 토시카네(厳包: 렌야)에게 사범직을 물려주었고, 이후에 요리아이(寄合), 미토모반(御供番), 메츠케(目付), 우마마와리(馬廻), 우마마와리코가시라(馬廻小頭) 등의 역직을 전전하다 세는 나이로 쉰다섯살 때에 텟포가시라(鉄砲頭)로 승진한다.
이런 토시카타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영예는, 쇼군 이에미츠(家光) 앞에서 토시카네(당시에는 토시토모라는 이름을 썼다)와 함께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기술들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케이안 4년(1651), 토시카타가 서른두살 때의 일이다. 동년 4월 5일과 익 6일에 두번에 걸쳐서 두 사람이 연무를 펼친 것은 신카게류의「엔비(燕飛)」라는 타치(太刀)로, 에도시대(江戸時代) 후기의 오와리 한에서 병법 사범의 보좌역이라는 입장에 있었던 나가오카 후사시게(長岡房成)가 저술한『連也翁一代記(렌야오이치다이키)』(안세이 2년 = 1855)에「고금에 둘 도 없을 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며, 그 묘기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토시카타는 텐나(天和) 원년(1681)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예순둘이었다.
토시토시의 셋째 아들은 앞에서 소개한 토시카네... 즉, 렌야(連也)다.
토시카타보다 다섯살 연하인 이복 동생으로, 아명을 시마 신로쿠(島新六)라 했던 이유는, 모친 쪽의 성(姓)을 계승한 것이라 한다. 모친은 야규 씨와 친했던 야마토(大和)의 지자무라이(地侍)이자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맹장 시마 사콘 키요오키(島左近清興)의 막내딸이다. 외조부의 용맹한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이 된다.
출생에 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나고야 성(名古屋城)의 죠카마치(城下町)에서 태어난 뒤에, 다섯살 때에 미슈(三州) 고유쥬쿠(御油宿: 아이치 현 토요카와 시 고유 쵸)의 도매상인 하야시 고로에몬(林五郎右衛門)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하야시 가문은, 토시토시의 딸... 즉, 렌야의 누이의 시댁이었다. 나고야로 돌아온 것은 아홉살 때였는데, 그 무렵부터 가예(家芸)를 배우면서 일찍부터 검의 재능을 드러냈다.
렌야가 조숙한 천재였다는 것은, 그가 열세살 때인 칸에이(寛永) 14년(1637)에『新陰流兵法目録(신카게류헤이호모쿠로쿠)』의 모든 구전(口伝)의 요결(要訣: 통칭『고히쇼』)을 정리한 것을 통해서도 추찰될 것이다. 3년 뒤에 야규 씨를 쓸 수 있게 허락받았으며, 칸에이 19년(1642), 열여덟살에 에도에서 동년배였던 주군의 후계자 미츠토모(당시엔 미츠요시라는 이름을 썼다)를 알현했다.
거기에는 이러한 경위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미츠토모가 신카게류의 한가지 술리(術理)에 대해 납득을 할 수 없었기에, 지도를 맡았던 토시카타에게 질문을 하자,「그런 문제라면 저보다도 동생인 효스케(兵助: 렌야)가 온 힘을 다해 수련하였사오니, 원하신다면 에도로 불러들여 여쭤보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미츠토모는 에도로 불러들였다.
훗날 오와리의 오류기(御流儀) 도통(道統)의 6대째를 계승하게 되는 미츠토모는 날 때부터 기운이 센 인물로, 무예 수행에 열심히였다. 목을 길게 빼고 렌야가 에도에 오기를 기다렸는데, 도착한 렌야에게 가장 먼저 명령한 것은 시합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그의 기량이 어느정도인지를 분석하려 한 것이다.
시합에서 렌야를 상대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선발된 삼십여명의 검사들이 차례차례로 렌야에게 맞섰지만, 모두 어린아이처럼 손쉽게 쓰러트려 미츠토모의 혀를 차게 했다.
이리하여 렌야는 에도에서 복무한 무사로서 40석을 받다가, 얼마 안 가 30석을 가증받아 7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찬밥신세였던 셋째 도련님에게는 이례적인 대우였으나, 이후에 미츠토모와는 군신수어(君臣水魚)의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오와리 야규 가문은, 이 렌야로 인해서 대대손손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병법 사범을 맡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