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또 하나의 야규(柳生) 가문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신카게류(新陰流)
◎「완전주의자」의 유서(遺書)
~ 만년의 야규 렌야 토시카네(柳生連也厳包)의 취미는 다양했다. 모란 재배, 정원 가꾸기 이외에, 다기(茶器)를 좋아해서 손 수 다기를 구웠다 한다. 거기다 츠바(鍔: 검의 손 보호대) 제작까지...
렌야는 후세에 말하는「야규츠바(柳生鐔)」의 창안자(創案者)이다.
그는 스스로 구상한 도안을 화가에게 그리게 한 다음에, 탄코(鐔工: 츠바 제작자)에게 밑바탕을 만들게 해서는 거기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담아냈다. 즉, 사비츠케(錆付け: 자연 발생한 녹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특수한 사비츠케 방식)를 스스로 작업했다. 또, 츠바 바탕에 키타에메(鍛目)나 철골(鉄骨)을 드러내기 위해, 손수 담금질도 했다. 나고야(名古屋)에서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을,「렌야츠바(連也鐔)」「코바야시츠바(小林鐔)」등이라 불렀다. 이것이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 이후의「야규츠바」의 기원이다.
크고 둥근 모양의 렌야츠바는 태반이 섭새김 방식이며, 모두 철을 재료로 하고 있어, 끈적끈적한 쇠 맛이 일품이다.
어찌됐든 그 도안은 굉장히 참신한 것이었다. 원래, 츠바는 적의 검을 막아서 검을 쥐고있는 손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인 장식구라 여겨지지만,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중기 이후에는 작가의 생각(요즘 말로 디자인 주의)를 표현하는 것이 캇츄시(甲冑師: 갑옷 제작자)나 도공(刀工)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렌야가 고안하게 된 츠바도 마찬가지라, 거기에는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술리(術理)가 암시되어 있다. 가령,「이게타(井桁)」라는 명칭의 츠바는, 신카게류의「쿠카노타치(九箇之太刀)」에 포함된「야에가키(八重垣)」의 자세를 나타낸 것,「스이게츠(水月)」라는 츠바는 문자 그대로 이 유의(流儀)의 스이게츠의 자세를 나타낸 것이다.
[스이게츠츠바]
렌야는 또, 검의 제작에도 열심이였다. 그는 아라미노카타나(新身の刀)... 즉, 도검사(刀剣史)에서 말하는「신토(新刀)」... 케이쵸(慶長) 연간(1596~1615) 이후에 만들어진 검을 좋아해서, 오와리(尾張)의 도공들에게 만들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마음에 들어한 것은 히고노카미 미츠시로(肥後守光代)라는 카타나카지(刀鍛冶: 도공)이다.
미츠시로는 미노(美濃) 세키(関)의 흐름을 이어받은 도공이다. 세키(関: 기후 현 세키 시)에서 오와리의 키요스 성(清洲城) 죠카마치(城下町)로 왔다가, 거기서 다시 케이쵸 15년(1610)에 나고야 성(名古屋城) 죠카마치로 이주한「키요스고시(清洲越し)」 도공 중 한 사람으로, 렌야의 중개에 의해 에도(江戸)의「세키도계(石堂系)」인 츠시마노카미 츠네미츠(対馬守常光)에게 사사받은 적도 있다. 그런 미츠시로에게 렌야가 만들게 한 검으로는「오니노호쵸(鬼の包丁: 귀신의 식칼)」라 명명된 와키자시(脇差),「카고츠루베(籠釣瓶)」(카타나),「사사노츠유(笹露)」(와키자시)가 있다.
「오니노호쵸」는 명문(銘文)으로 「肥後守秦光代(히고노카미 하타노미츠시로)」라 새겨져 있으며, 길이는 1척 6촌 5분(약 49cm)로, 오모테(表)가 키리하즈쿠리(切刃造), 우라(裏)가 시노기즈쿠리(鎬造)... 이른바 카타기리즈쿠리(片切造) 형으로 제작된 와키자시다. 도신(刀身)의 폭이 넓고, 날의 폭이 매우 두꺼운 타이하이(体配)로, 순식간에 뽑아서 칠 수 있게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오니노호쵸의 도신(刀身)]
어떤 검을 만들게 하더라도, 미츠시로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해대며 몇번이나 다시 만들게 한 것도, 완전주의자인 렌야다웠다.
한점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의 이러한 생애는, 자신의 유언장에도 나타난다. 당시로서는 희귀했던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죽을 때가 다가오더라도, 침술 치료를 한다거나, 약을 지어와 먹인다거나 해서는 아니 된다. 또, 죽을 때에 얼굴을 살피는 것도 안 되는데(부검을 하지말라는 의미인 듯 하다: 역자주), 만일, 내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다면, 조카 한 명에 고용인 두 사람을 동반하여 부검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시체를 닦는 것은 하등 쓸모 없는 짓이다. 그냥 옷만 입힌 채 탈 것(관)에 태워, 저택 남쪽에 있는 소각장에서 시신을 화장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충분히 태웠다고 생각 될 때, 물을 끼얹고 뼛가루를 섬에 싸서 조각배에 이 뼛가루를 실어 아츠타(熱田) 만에 버리도록 하라】
유언에는, 유품 분배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써놓았다.
군신수어(君臣水魚)의 관계에 있었던 한슈(藩主) 미츠토모(光友), 전년에 가독을 물려받은 츠나나리(綱誠: 오와리 한의 3대 한슈), 마츠다이라 요시마사(松平義昌: 미츠토모의 넷째 아들), 가로(家老)인 나루세 마사치카(成瀬正親) 이하, 친분이 있었던 가신이나 제자, 승려, 자신이 고용했던 대장장이, 나아가서는 저택에 드나느는 직인(職人), 상인에 이르기까지, 유품 분배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택 처분에 대해서도 써놓았다. 가령, 저택은「토노사마(殿様: 한슈)」에게 드린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 집안 구석구석까지 청소해서 먼지 하나 없게 해놓고, 망가진 곳이 있으면 모조리 다 고쳐놓은 다음에 남긴 말이다.
겐로쿠(元禄) 7년(1694)에 영면. 오늘날로 치면 산골(散骨: 유골을 바다나 강, 산에 뿌리는 장례)에 의해 장례식을 치른 렌야의 묘는 전해지지 않는다. 쿄토(京都) 묘신지(妙心寺)의 린쇼인(麟勝院)에 안치되어 있는 위패는, 조카인 토시노부(厳延: 신카게류 도통 제 8대 당주)와 제자들이 그를 너무나도 추모한 나머지, 10주기에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법호(法号)는「칸쇼인테이조렌야코지(寒松院貞操連也居士)」.
◎ 시대에 대응한 검(剣)
~ 근세 초기의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왔는데, 그 검의 술(術)과 리(理)에 대해서는 20대 당주인 야규 토시나가(柳生厳長)가 저술한『正伝新陰流(쇼덴신카게류)』(島津書房 개정판은 1989년 발간), 21대 야규 노부하루(柳生延春: 토시미치)가 저술한『柳生新陰流道眼(야규신카게류도간)』(島津書房 1996년 발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오와리 야규 가문의 선조(3대 당주)인 야규 효고노스케 토시토시(柳生兵庫助利厳)는, 유조(流祖)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로부터 조부인 세키슈사이 무네요시(石舟斎宗厳)에게 전해진 가르침을「옛(昔)」가르침이라 하여, 이러한 가르침은 이거대로 평전(評伝)하긴 하겠으나, 태평성대에 어울리는「지금(今)」의 가르침을 수립한 위재(偉才)였다. 즉, 센고쿠시대(戦国時代)식 검법의 가르침이라 여겨진「저무는 해(원문은 沈なる身)」를 개량하여 갑옷을 입지 않는 평상복 차림으로의 검법...「다시 뜨는 해(원문은 直立つる身)」(자연체의 병법)를 고양시켜, 확립하였다.
그런 비판 정신은, 당시의 세상의 관습을 감안하면 실로 기특하다 해야하겠지만, 그러한 토시토시의 업적을 집대성한 책으로『始終不捨書(시쥬후샤노쇼)』가 있다.
또, 특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신카게류헤이호가이덴・시아이카타(新陰流兵法外伝・試合勢法)」백수십여편이 완비된 것인데, 이는 오와리 야규에서 전승한 독특한 도법(刀法)을 에도시대(江戸時代) 후기에 나가오카 후사시게(長岡房成)가 정비한 것이라 한다. 덧붙여, 나가오카의 저술서로는『連也翁七ヶ条解(렌야오시치가죠카이)』(분세이 3년 = 1820)라고 하는, 렌야(連也)에 의한 7개 조(条)의 요체(要諦)를 해설한 저술서 등이 있다.
시대에 대응한 개혁은 유조 이후의 근본적인 정신이긴하나, 오와리 야규에서는 그러한 정신이 자라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