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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42 (0) 2017/04/06 PM 08:56

제 5 장 이후의 야규 일족(柳生一族)

 

 

◎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의 그후...

~ 오와리(尾張) 나고야(名古屋)의 상징이라 하면, 당연히 토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의 필두격으로서 61만 9천석을 영유한 대한(大藩)의 한슈(藩主) 17대의 거성이었던 나고야 성(名古屋城), 하나 더 말해 보자면, 그 성의 5층 6중 구조의 천수(天守) 최상부에 장식된 금빛 샤치호코(金鯱)일 것이다.「尾張名古屋は城で保つ」라는 민요의 가사도 있는데, 케이쵸 오오반(慶長大判) 1940장 분량, 오반(小判)이라면 1만 7975량(両) 분량의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이 샤치호코에게 보호받는다... 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고야 성은 쇼와(昭和) 20년(1945)의 공습으로 3기(基)의 야구라(櫓)만을 남기고 소실되었는데, 쇼와 34년(1959)에 재건된 유구(遺構)가 지금도 나고야 시(名古屋市) 한가운데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나고야 공습은 쇼와 17년(1942) 4월 18일이 처음이었으며, 쇼와 19년 12월 13일의 미츠비시 중공업 나고야 발동기 제작소의 다이코 공장에 집중적으로 폭격이 가해지면서 본격화 되어, 익 20년 7월까지 이어졌다.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는 둘째치더라도, 토쿄(東京)와 오오사카(大阪) 다음 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시가지에 대한 공습이 격렬해진 것은, 3월부터 5월에 걸쳤다. 

 나고야 시내는 사원(寺院)이 많다. 그 사원들도 물론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받았는데, 그중 한 곳으로,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토카이산 하쿠린지(東海山白林寺)가 있다. 

 시내의 중핵을 이루는 나카 구(中区)의 에이(栄) 3쵸메에 있는 하쿠린지는, 한조(藩祖)인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가 가로(家老)인 나루세 마사나리(成瀬正成: 이누야마 성주)의 보다이(菩提)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임제종(臨済宗) 묘신지파(妙心寺派)에 속하는 선사(禅寺)로, 칸에이(寛永) 2년(1625)에 개창(開創)했다. 오와리의 이름 난 사찰인 묘코지(妙興寺: 아이치 현 이치노미야 시)에서 초청한 카이산(開山)을 란소 쇼슈(蘭叟紹秀)라 했다. 

 하쿠린지의 혼지(本寺: 오야데라)인 묘코지는, 신카게류(新陰流)의 유조(流祖)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와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죠슈(上州)에서 상경하던 도중, 이 묘코지의 사찰 안의 마을에서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미치광이를 물리쳤다는 전승이 있어「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 거사가 수도한 곳(上泉伊勢守信綱居士修道跡)」이라 새겨진 비석이 이 사찰에 있다. 그 말사(末寺)인 하쿠린지가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오류기(御流儀)의 사범 오와리 야규 가문의 보다이지라 여겨지는 것도, 기이안 도연(道縁)이다. 야규 가문의 묘소는, 전쟁 후의 도시 계획에 따라 시내 사원의 묘소를 이전한 동쪽의 구릉지, 평화 공원(치쿠사 구)에 있다. 

 같은 나카 구 니시키(錦) 1쵸메에 있었던 야규 가문의 택지 500평짜리 저택과, 다섯 간(間)에 여섯 간 정도의 넓이인 도장도 B29 290기가 날아온 3월 29일의 공습에 의해 소실되었다. 

 오류기 사범 가문은 야규 렌야 토시카네(柳生連也厳包) 이후, 조카(형인 토시카타의 아들)인 토시노부(厳延)가 가독 500석을 계승했다. 그가 바로 오와리 야규 가문의 5대 당주이다. 병법의 도통(道統)으로 요시나오, 미츠토모(光友) 이하, 한슈의 이름이 나열되기 때문에, 토시노부는 8대 도통에 해당한다. 

 오늘날에 신카게류를 계승한 오와리 야규 가문 대대의 도업(道業)들 중에서, 여기서는 12대(도통 19대)인 토시치카(厳周)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토시치카는 열여섯살 때인 분큐(文久) 원년(1861)에 15대 한슈인 모치나가(茂徳)의 오소바마와리(御側廻)로 출사하여, 2년 뒤인 분큐 3년에 16대 한슈인 요시노리(義宜)의 병법 사범으로 임명된다. 가독과 신카게류 제 19대를 계승한 것은 다음해인 겐지(元治) 원년(1864), 그가 열아홉살 때였는데, 동년에 한정(藩政)의 실권을 장악한 요시카츠(慶勝: 14대 요시쿠미. 메이지 8년에 다시 가독을 상속하며 17대가 된다)가 제 1차 쵸슈 정벌(長州征伐)의 총독으로 임명되자마자 토시치카는 그를 수행하여 히로시마까지 내려갔다. 이 쵸슈 정벌은 쵸슈 한(長州藩)이 재빠르게 항복할 뜻을 내비쳤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 요시카츠는 나고야로 개선한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요시카츠에 의해 한교(藩校)인 메이린칸(明倫観)에 무술 도장이 마련되었을 때에 검술 18류를 결속한 교도총재(教導総裁)로 임명된 토시치카는 재직 중에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에도 야규(江戸柳生)는 어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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