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이후의 야규 일족(柳生一族)
◎ 또 하나의「에도 야규(江戸柳生)」
~ 야규 무네후유(柳生宗冬)의 정실(正室)은 탄고(丹後) 미네야마(峰山) 1만 3천석(쿄토 부 쿄단고 시)의 초대 한슈(藩主)인 쿄고쿠 타카미치(京極高通)의 딸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2남 3녀가 태어났다.
장남인 무네하루(宗春)는 무네후유보다 앞선 엔포(延宝) 3년(1675) 2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스물일곱. 때문에, 차남인 무네아리(宗在)가 스물두살에 가독을 계승하여 4대째 당주가 되었다(무네아리의 생년은『寛政重修諸家譜』에 의한다).
이보다 먼저, 열일곱살 때 4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의 코쇼(小姓)로 출사한 무네아리는, 가독을 계승하게 되면서 쇼군의 병법사범으로 임명되는데, 겐로쿠(元禄) 2년(1689)에 서른여섯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대째 당주자리를 계승한 이는 죽은 무네하루의 장남으로서 무네아리에게 양자로 들어갔던 토시카타(俊方)로, 당시 열일곱살이었다.
쇼군의 병법사범이 되기 위해서는 입문의 뜻을 담은 서약서가 내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토시카타 이후의 당주들은 그러한 서약서가 없다. 4대 쇼군이 되기 이전의 이에노부(家宣)로부터 토시카타가 서약서를 받은 것이 마지막으로, 야규 본가는 쇼군 가문이 병법사범이라는 임무를 벗어나게 된다. 가전인 병법은 그럭저럭 야규 가문 대대로 맥을 이어 전해졌으리라 생각되는데, 때로는 쇼군 앞에서 그것을 피로한다거나, 형식적인「연습 상대」를 맡는다거나, 전서를 헌상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었어도, 야규 1만석을 영유한 당주들은 경비를 주로 하는 역직을 수행하는 데에 대부분 중점이 놓여지기에 이르렀다.
이는 쇼군 그 자체가 초기의 상무정신(尚武精神)에서 벗어나게 되어 갔던 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야규 가문은 토시카타 이후, 양자 상속(養子相続)이 주가 되어 갔다. 게다가 차기인... 즉, 6대째인 토시히라(俊平) 때부터는 다른 가문으로부터 들여온 양자에 의해 가독이 계승되고 있다.
그런데, 5대째인 토시카타 시대「에도 야규(江戸柳生)」에는, 특필해야할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말하려면, 5대 쇼군인 츠나요시(綱吉)의 치세 때인 죠쿄(貞享) 4년(1687) 12월의『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기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코후기미(甲府君)」... 즉, 코후(甲府) 25만석(후에 35만석)을 영유한 성주 츠나토요(綱豊: 이에미츠의 차남인 츠나시게의 장남)를 가르키며, 훗날 이에노부가 신카게류(新陰流) 연습상대를 사범인 무네아리에게 부탁했다고 나와있다.
세는 나이로 스물여섯살이었던 이에노부였지만, 조부인 이에미츠(家光)에 필적할 정도로 신카게류 병법 연습에 열심히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무네아리가 올려 보낸 것이, 혈연관계이자 가신이었던 야규 토에몬 무네스케(柳生藤右衛門宗相: 혹은 요리유키)라는 자였다. 하지만, 토에몬은 무네아리가 죽은 다음해(겐로쿠 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문도 단절되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겐로쿠(元禄) 12년(1699)에 이에노부로부터 5대 당주인 토시카타에게 연습상대를 재차「진상(進上)」해야한다는 취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래서 토시카타가 보낸 이가 쿠니모토 가신(国許家来)인 무라타 쥬로에몬 히사토키(村田十郎右衛門久辰)라는 자였다.
무라타 씨에 대해서 말하자면, 오우미(近江) 출신이라 칭하는 야소하치(弥惣八)라는 자가 야규 가문의「우마야노소츠(厩中の卒)」(『玉栄拾遺』)로서 일하고 있었다. 우마야노소츠는 즉, 말을 돌보는 일을 맡은 하인이었는데, 이 자가 검술에 심취해있던 것을 본 무네노리가 무사 신분으로 출세시켜주었다 한다. 그와 동일인물이었는지, 무라타 야지에몬(村田弥次右衛門)이라는 자가 야규의 다이칸(代官)을 맡았다가 나중에 텟포구미(鉄砲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히사토키는 그의 손자이다. 사실 토시카타가 처음에 후보로 생각했던 이는 타라오 헤이하치 카즈타다(多羅尾平八和忠)라는 가신이었는데, 자신이 아끼던 타라오를 보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한편, 자신의 소년시절에 선대인 무네아리에게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인해 교만한 행동을 되풀이했던 무라타 히사토키를... 이른바「제거(厄介払い)」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결국, 히사토키를 이에노부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는 이에노부의 가신의 반열에 오른 히사토키에게 있어서는,「굴러 들어온 호박」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이에노부가 5년뒤인 호에이(宝永) 원년에 츠나요시의 후계자가 되어 에도 성(江戸城) 니시노마루(西の丸)로 이주하자마자, 히사토키는 그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고, 그의 아들인 히사토시(久寿)도 코쇼로 고용되었다.
이에노부는 마흔여덟살 때인 호에이 6년(1707)에 6대 쇼군이 되었다. 동시에 야규 가문의 가신에 지나지 않았던 바이신(陪臣) 무라타 히사토키와 히사토시 부자는 쇼군의 지키신(直臣)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 아들인 히사토시는「야규」성을 쓸 수 있게 허락받고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임관하면서 600석을 영유하게 된다. 여기서, 속된 말로「무라타 야규(村田柳生)」라는... 또 하나의「에도 야규」가문이 탄생하게 된다.
야규 무네노리는 히데타다, 이에미츠 2대에 걸쳐 모셨고, 두 사람이 모두 쇼군이 되기 이전에 병법사범을 맡았는데, 이때 모두 결국은 쇼군 사범이라는 자리를 손에 넣었다. 그런 성공담을 방불케하는 무라타 히사토키, 히사토시의 입신 출세였다.
히사토시 이후, 이 가문은 히사미치(久通: 히사토시의 적손) 시대에 1100석이 되면서, 당시까지의 니시노마루 근무에서 혼마루(本丸)로 출사하게 된다. 야규 히사미치는 메츠케(目付), 코부신 부교(小普請奉行), 마치 부교(町奉行)를 거쳐, 결국에는 칸죠 부교(勘定奉行)로까지 승진한다. 분세이(文政) 11년(1828)에 히사미치가 죽은 뒤에 그 뒤를 이은 양자 히사카네(久包)는 메츠케, 나가사키 부교(長崎奉行), 야마다 부교(山田奉行)를 거쳐, 막말(幕末)인 코카(弘化) 3년(1848)에 오오메츠케(大目付)로 승진한다.
일찍이 무네노리가 배명받은 역직인 소메츠케(惣目付)와 같은 중직에「무라타 야규」라고 하는... 야규 가문의 가신에게 맡겨진 것은, 기이한 역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