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이후의 야규 일족(柳生一族)
◎ 최후의 야규 한슈(柳生藩主)
~ 야마토(大和) 야규(柳生) 1만석은 에도시대(江戸時代)를 지나면서「죠후(定府)」라는 체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만약 산킨코타이(参勤交代)를 해야했을 한(藩)이었다면, 야규로 가는 왕래길은 발달하여 오늘날「야규 가도(柳生街道)」라는 속칭이 붙어있는 자연이 풍부한 길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며, 산골마을의 한적한 모습도 바뀌어버렸을 것임에 틀림 없다.
죠후인 한이었기 때문에, 한슈(藩主)와 가족들은 에도(江戸)가 생활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영지로 들어가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야규 한(柳生藩)의 경우는, 당주가 영지로 들어가 있었던 게 무네노리(宗矩)를 제외하면 그 예를 볼 수 없다. 쥬베에(十兵衛)는 다이묘(大名)가 아니었던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마지막 한슈는 후술하는 대로 자신의 영지에서 살기는 했지만...
무네노리는 칸에이(寛永) 13년(1636)에 다이묘가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영지로 들어갔다. 사적으로는 3년 전인 칸에이 10년에 야규로 내려가 잠시 머물렀지만, 그 이외에는 죽기 전년인 쇼호(正保) 2년(1645) 가을에 재읍(在邑)한 것이『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 기록되어 있다.
한조(藩祖)라 해야할 법한 무네노리 조차 이러했기 때문에, 자손들은 무네후유(宗冬) 시대까지는 야규에서 태어났지만, 그 이외에는 모두 에도에서 태어났다.
에도시대 전기부터 중기에 걸쳐 에도에서의 가로직(家老職)을 맡았던 것은 노도노(野殿) 씨였다.
카사기 산계(笠置山系) 정상에 위치하는, 과거의 교통의 요충지라 여겨진 땅에 노도노(野殿)라는 곳이 있다(쿄토 부 미나미야마시로 무라 내부). 노도노 씨는 이 땅을 영지로 한 씨족으로, 그 기록이 야규 씨와 관련된 자료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노도노 모쿠노스케 미츠노리(野殿杢之助光則) 시대 때이다. 예를 들자면『寛政重修諸家譜(칸세이쵸슈쇼카후)』에는, 무네노리가 죽기 6일 전인 3월 20일(쇼호 3년), 이에미츠가 병문안을 위해 야규 저택(별저)로 갔을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이때, 이에미츠 공은 사후한 사람들(쿠제 히로유키, 쿠츠키 타네츠나, 홋타 마사노부)을 물러나게 해, 무네노리에게 검술의 오의(奥義)를 묻고나서,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보게"라고 명령한 다음, "가신들을 이리로 불러들이게"라 말하셨다. 그러자, 가신인 노도노 모쿠노스케가 불려와 툇마루에 대기하자, 무네노리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저는 송구스럽게도 위의 은혜를 입어 만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어찌 바람 따위를 아뢸 수 있겠사옵니까? 만약 이대로 병이 낫지 않게 된다면, 가록(家禄) 전부를 반납하겠사오니, 이후 미츠요시(三厳: 쥬베에)와 무네후유(宗冬)에 대한 처분은 전하의 뜻대로 해주셨으면 하옵니다"
그러자 이에미츠 공은 "자네의 뜻은 알겠으니, 지금은 그저 마음 편하게 갖고 요양에 전념하게나" 라고 말한 뒤, "모쿠노스케 자네도 지금 내가 한 말을 확실히 기억해 두게나" 라고 명령했다】
노도노 모쿠노스케는 무네노리가 총애한 가신 중 최고였음을, 이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이에미츠가 직접 그를 불러들였던 것을 통해서도, 이에미츠의 신카게류 연습에 상반(相伴)한.. 이 유파의 달인이었음이 추측된다.
이 에도에서 함께한 가로는 이 이후, 4대 당주인 무네아리(宗在) 시대인 엔포(延宝) 4년(1676)에 모쿠노스케의 아들인 노도노 모쿠에몬 미츠나오(野殿杢右衛門光尚)가 습직(襲職)했다(『玉栄拾遺』). 모쿠에몬은 한때, 겐로쿠(元禄) 13년(1700)에 해직되기도 했으나, 훗날 그의 아들인 모쿠노신 미츠요시(杢之進光吉) 시대에 가로직에 복귀한다.
그런데, 죠후인 한에서는 에도와 영지와의 관계가 소원한 경향이 있는 이유는, 생각건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양자의 확집(確執)으로 발전한 경우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야규 한의 경우, 막말에 이르러서야 그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다.
마지막 한슈인 13대 토시마스(俊益) 시대에, 영지의 한론(藩論)은「존왕(尊王)」으로 기울어 있었고, 한편으로 에도에서는「좌막(佐幕)」론이 주류를 이룬 게 원인이 된 사건이었다.
[야규 한의 마지막 한슈(藩主)인 야규 타지마노카미 토시마스]
케이오(慶応) 3년(1867) 말의「왕정복고(王政復古)」선언(12월 9일)이 여러 한에 유포된 뒤, 조의(朝議)에 따라 다이묘(大名)의 영지 반납(후에「사관납지」로 개칭)이 결정되면서, 당시에는 쇼군 가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조죠지(増上寺)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야규 토시마스도 서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토시마스는 에도의 가로인 히로세 코다유(広瀬小太夫) 이하 마흔명을 따르게 해서, 시나가와(品川)에서 배에 올랐는데(12월 22일), 때마침 폭풍을 만나 18일간에 걸쳐 바다 위를 표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의 방아쇠를 당긴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익년인 케이오 4년... 즉, 1868년 1월 3일)가 그동안 발발하여 동쪽으로 돌아간 마지막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에게 추토령이 떨어진 뒤(1월 7일), 여러 다이묘에게 그 거취가 조정으로부터 오가던 상황 아래, 토시마스 이하, 에도에 머무르던 자들은 토바 미나토(湊)에 겨우 도착한다(1월 9일). 일행은 그곳에서 입경한다(1월 25일). 이미 신정부로부터는 항복하고 정부의 뜻을 따라야한다는 취지의 통달이 있었으며, 영지에서는 가로인 오야마다 사부로스케(小山田三郎助)를 중심으로 한 일파가, 여기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토시마스들은 야규로 들어가려 했다. 이를 영지에 머물러있던 일파 십수명이 습격, 토시마스가 타고있던 가마를 빼앗은 데다, 에도에서의 가로인 히로세들을 포박했다. 그후, 토시마스의 이름 아래에 할복당한 에도 쪽 사람과 병사한 사람 아홉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야규 한의 내분이, 토쿠가와의 와해와 함께 이런 식으로 비극을 낳은 것은, 토쿠가와 쇼군 가문에게 등용되어 성운(盛運)이 따라왔던 야규 가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는 숙명이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야규 한 최후의 한슈인 토시마스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 토시로(俊郎)로 개명하여 자작(子爵)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쇼와(昭和) 2년(1927)에 세상을 떠났다.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의 12대 당주인 토시치카(厳周)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쇼와 7년(1932)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