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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02 (0) 2017/06/24 PM 04:50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삿쵸 동맹(薩長同盟)을 연출한 것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아니었다

~「역사의 진상(真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의심을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막말(幕末)에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가 손을 잡고 토막(討幕)을 위한 보신 전쟁(戊辰戦争)을 단행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 동맹을 연출한 것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는 점은 미심쩍다.

 특히, 분큐(文久) 3년(1863) 8월 18일의 정변에서는, 사츠마와 쵸슈는 완전한 적대관계에 있었다. 

 옛부터 우호관계에 있었다면 몰라도, 적대관계에 있었던 두 지역이 불과 3년 뒤에는 손을 잡다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마즈(島津) 가문도 모리(毛利) 가문도 명문인 대다이묘(大大名)였기 때문에, 각각의 체면이 있다.

 토사(土佐)를 뛰쳐나온... 일개 로닌(浪人)이었던 사카모토가 필사적으로 동분서주하는 것 만으로는 동맹에 이르렀을리 없다. 사카모토가 열심히 움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뒤에 수많은 영향력을 가진 흑막이 있어 은밀히 시마즈, 모리 두 가문에게 작업을 걸었고, 심부름꾼으로서 사카모토를 동분서주하게 했다... 고 생각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 단순한 억측이 아니라, 그러한 흑막 같은 역할을 맡은 다이묘가 실존했다.

 그게 누구인가 하면, 모리 가문으로부터 바칸해협(馬関海峡: 현재의 칸몬해협)을 끼고 바로 서쪽에 있는 후쿠오카(福岡)에 47만 3천석의 광대한 영지를 가진 쿠로다(黒田) 가문의 제 11대 당주인 쿠로다 나리히로(黒田斉溥)였다. 코쿠다카(石高)로 말해보자면, 모리 가문보다 많았다.

 이 쿠로다는 란페키 다이묘(蘭癖大名: 유럽 문명 편애자로, 스스로 좋아서 서구 문화를 도입했다)로 알려져 있어서 네덜란드어에 능통했기에, 시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로부터 직접 서구식 해부학 강의 등을 받고 있었다(이때의 쿠로다 나리히로는 오니와반에서 초대 니이가타부교가 되어, 나중에 나가사키부교로 전근을 간 카와무라 나가타카와 접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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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 나리히로]

 

 막말... 이 쿠로다의 뜻을 받들어 삿쵸 연합 체결을 위해 움직이고 있던 중심 인물이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였다.

 사실 쿠로다는 데릴사위로서 쿠로다 가문을 이은 인물로, 친가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이었다. 부친은, 역시나 란페키 다이묘로서 알려져 있던 시마즈 가문의 25대 당주인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로, 쿠로다는 그의 아홉째 아들이었다.

 시게히데는 증손자인 나리아키라(斉彬)를 매우 예뻐해 함께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서 시볼트를 만나거나 했다(쿠로다가 만났을 때는 다른 시기로, 그보다 상당히 앞이다). 

 나리아키라는 후쿠이(福井)의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토사의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우와지마(宇和島)의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와 나란히 막말의 사현후(四賢侯)라 칭해졌을 정도로 명군으로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 서양식 조선, 반사로(反射炉) 및 용광로를 건설, 유리 제조 등의 사업을 일으킨다거나, 미국에서 귀국한 존 만지로(ジョン万次郎)를 보호하여 가신에게 조선법 등을 배우게 하여 서양식 범선인《이로하마루(以呂波丸)》(사카모토 료마가 침몰시킨 것과는 다른 배다)를 건조, 범선용 돛을 자체 제작하기 위해 방직 사업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팔면육비(八面六臂) 같은 활약이었다. 사이고 타카모리도, 이런 나리아키라에 의해 발탁되었다.

 나리아키라가 장수했더라면 일본의 근대문명사는 크게 바뀌었을테지만, 쉰살의 나이로 급사, 동생인 히사미츠(久光)가 실권을 잡는다(사츠마와 영국의 전쟁의 원인이 된 나마무기 사건은, 히사미츠가 에도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일어났다).

 이 히사미츠는 사이고 타카모리를 미워했는데, 히사미츠의 역린을 건드린 사이고는 토쿠노시마(徳之島)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를 구명해 준 이가 쿠로다 나리히로였다. 쿠로다는 시게히데의 자식, 나리아키라는 시게히데의 증손자였지만, 사실 연령은 쿠로다 쪽이 두살 아래로, 나리아키라와는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다.

 나리아키라는 선견지명이 지나쳐「일본이 아편 전쟁에 패배한 청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서둘러 국내를 서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앞에서 말한대로 사업을 일으켰지만, 나리아키라가 죽자마자「이런 상태로는 머지않아 시마즈 가문은 재정파탄에 몰리게 된다」라는 반동의 폭풍이 시마즈 가문 안에서 휘몰아쳤고, 그 선두에 섰던 이가 히사미츠였다. 

 쿠로다는 어째서 나리아키라가 사이고에게 눈을 돌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고의 유배형을 멈춰달라고 히사미츠에게 권고했다. 히사미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증조부의 자식이자 연상이기도 했던 쿠로다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이고를 다시 불러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고와 의견이 맞았던 것도 아니라, 결국 사이고는 시마즈 가문의 가신단 중에서는 일종의 유군(遊軍)처럼 행동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이고는 은인인 쿠로다의 뜻을 받들어 행동하였으며, 사카모토 료마와도 접촉하여 초슈의 모리 가문과 시마즈 가문이 보폭을 맞춰 시대의 황파에 맞설 수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쿠로다는 사카모토 같은 장기말을 움직이는 것 만으로, 자신은 겉무대에 나서지 않고 흑막으로서의 활동에 집중했던걸까?

 그것은, 역시나 나리아키라의 급사에 최대 원인이 있었다... 고 봐야할 것이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뒤, 시마즈 가문 안에서는 보수반동의 태풍이 휘몰아쳤고, 양이 사상(攘夷思想)도 과격해져 갔다. 

 서양의 여러 나라의 실태를 모른 채, 그저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양이 사상은, 란페키로서 서구 사정에 통달해 있던 쿠로다의 눈에는 일본의 존망 자체에 관련된 중대한 사태로 비쳐졌다.

 나리아키라가 살아있었더라면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사츠마와 영국간의 전쟁으로 시마즈 가문이 궁지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리 가문이 바칸해협 통과 중인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네개 나라의 함대를 상대로 무모한 포격을 받아 참담한 꼴을 당한 바칸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던지, 아니면 다른 양상을 띄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란페키 다이묘로서 고립된 상황에 몰린 쿠로다는 양이파의 과격 로시(浪士)에게 습격받을 우려도 있어서, 겉무대에 설 수 없었다. 이것이 삿쵸 동맹의 뒷사정이다.

 다른 란페키 다이묘로는 사가(佐賀)의 나베시마 칸소(鍋島閑叟: 나오마사)가 있었지만, 나베시마는「삿쵸는 바쿠후(幕府)와의 항쟁으로 공멸할 것이기에, 사가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다」라며 협조하려 들지 않았다. 사가가 토막을 단행한 것은, 삿쵸 연합군이 토바 후시미(鳥羽伏見)에서 바쿠후군을 격파, 삿쵸 측이 승리했음이 명백해진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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