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다이묘(大名) 행렬에 일반 민중은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 TV나 영화 시대극에서 자주 보이는 게 산킨코타이(参勤交代)를 위한 다이묘(大名)의 행렬에 일반 민중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통과를 지켜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사실, 크나큰 오류이다.
좀 더 심각한 시대고증 착오가 담긴 영화를 보면, 말단 관리의 마을 행차에서조차 백성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 민중은 길 옆에 서서 행렬을 구경하는 행위가 허락되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묘사한 당시의 그림들이 남겨져 있다(안도 히로시게가 그린『名所江戸百景』중「筋違内八ッ小路」등).
일반 민중에게 있어서, 다이묘 행렬을 구경하는 행위는 현대라면 스포츠 선수의 우승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의 오락이었다.
거기서, 구경당하는 측인 다이묘도 그렇다면 기대에 응해주지! 라며 점점 행렬을 화려하게 만들어 가는데, 이게 원인이 되어 재정을 압박받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에는 부케쇼하토(武家諸法度)에 의해 인원을 줄이라는 규제 등이 마련되었다.
일반 민중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행렬은, 쇼군(将軍) 및 고산케(御三家)인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와 키이 토쿠가와(紀伊徳川) 가문의 행렬 뿐으로, 이 행렬은「엎드려 조아려라!」라는 의미로「숙이거라, 숙이거라」라며 미리 알려주는 담당자가 외쳤다.
하지만, 다른 다이묘 행렬이 외치는 소리는「비켜라. 비켜」라던가「물럿거라, 물럿거라」등... 요컨데「길을 터달라」는 취지의 것이었다.
이것은 산킨코타이의 본질적인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산킨(参勤)」은 정확하게는「参覲」라 쓰는데, 이는「쇼군을 배알한다」는 의미이다.
즉, 에도로 참근(参勤)하여 쇼군을 배알하고,「저는 쇼군 가문의 신하이옵니다」라는 의사표시를 행하는 것이 산킨의 본래 취지인 것이다.
또, 에도로 참근하러 오는 다이묘와 교대로 영지로 귀국하는 게「코타이(交代)」로, 때로「산킨코타이하러 에도로 간다」는 식의 말은 터무니 없는 오류이다.
그런데, 일반 민중도「쇼군의 지배지에 거주하는 자」이기 때문에, 쇼군과 고산케(쇼군에게 뭔가 변고가 일어날 경우에 쇼군직을 계승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가문)에 대해서는 엎드려 조아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일반 다이묘에게는「쇼군의 지배를 받는 자」라는 의미에서는, 어떤 의미로 동렬(同列)이기 때문에 엎드려 조아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또, 산킨코타이는 모든 다이묘들이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테지만, 로츄(老中)라던가 와카토시요리(若年寄)라던가 지샤 부교(寺社奉行)라던가 하는... 바쿠후의 요직에「근무」하고 있는 다이묘는 산킨코타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쇼군을 배알하여 종신 의사 표시를 하는 것도 보는 방법에 따라서는 일종의「근무」이기 때문에, 본래의「参覲」이 아닌「参勤」으로 쓰게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또, 고산케 서열 3위인 미토 토쿠가와(水戸徳川) 가문은 에도 죠후(江戸定府: 에도에 상주하면서 기본적으로 영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로, 산킨코타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것과, 에도시대 중기 이후는 후계자가 없거나 당주가 병사할 경우에 개역(改易)당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영지를 나눠 분가를 창설하는 다이묘가 늘어났는데, 그러한 소국의 다이묘도 에도 죠후로, 산킨코타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산킨코타이 당번인 다이묘가 도중에 머물게 되는 숙소가 혼진(本陣)이다. 이를 고급 여관이라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겠지만, 전혀 다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혼진이라는 것은 본래 역직(役職)이기도 해서, 번거롭게 말해 보자면, 숙소는「혼진의 집(館)」이 된다.
혼진은 단순히 다이묘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할 뿐이며, 기본적으로 주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산킨코타이하는 다이묘는 조리기구나 식자재, 요리사, 나아가서는 입욕용 목욕통 등... 일체를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
또, 혼진은 신분적으로는 백성인 마을 사람이지만, 사실 센고쿠시대에는 무사였다. 토요토미(豊臣) 가문이나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점차 유력 다이묘가 멸망해 갔는데, 그러한 다이묘 가문을 모시고 있던 가신단까지 몽땅 멸망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이들을 근절하려는 듯 한 취급을 하게 된다면, 손쓰기 어려운 반란이 일어나서 천하통일 같은 것을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력한 다이묘를 공격해 멸망시킬 경우, 가장 위에 선 이는 죽이지만, 그 아래에 있는「간부급 가신」은 나누시(名主), 쇼야(庄屋: 촌장), 혼진 같은 명칭을 가진 신분이 주어지며, 종래의 수입을 거의 유지할 수 있도록 회유책을 채용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M&A(적대적 기업 매수)로 라이벌 회사를 빼앗긴 했지만, 모든 사원을 교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표권을 갖지 않은 간부 사원은 그대로 계속해서 사원으로서 대우해준다는 상황과 비슷하다.
따라서 나누시나 쇼야, 혼진은 신분적으로는 햐쿠쇼쵸닌(百姓町人)이면서도, 당시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무사인 채였다.
「묘지타이토(苗字帯刀: 성씨를 가질 수 있고, 평소에 칼을 휴대할 수 있을 권리)인 햐쿠쇼쵸닌」이라는 존재는, 사실 토쿠가와 가문의「센고쿠시대의 혼란 상황을 가능한 한 풍파(波風)를 일으키지 않고 원만하게 다스린다」는 기대에서 생겨난... 절충타협(折衷妥協)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한 본질적인 유래를 모르는 시대극 작가가 글을 쓰게 되면, 아직 센고쿠시대임에도, 나누시나 쇼야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엉터리 시대극이 세상에 돌아다니거나 한다.
산킨코타이의 다이묘 행렬 쪽으로 이야기를 되돌려 보면, 일반 민중들에게 어필하는 행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곳에서는 위풍당당하게, 천천히 행진한다.
그러나, 숙소와 숙소 사이에 구경꾼이 없을 경우에는 단번에 걸음을 제촉해야 했다.
아무래도 산킨코타이에는 돈이 들기 때문에, 영지에서 에도까지의 소요 일수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았다. 대다이묘쯤 되면, 하루당 요즘 금액으로 치면 1억엔 정도의 경비가 날아갔다.
하루의 이동거리는 40km 전후였는데, 특별한 이유(집중호우가 내린다거나)로 지연되기 시작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5~60km로 거리를 늘려서 걸음을 제촉하게 되었다.
역사에 기록된 가장 서둘렀던 산킨 행렬은, 카가 마에다(加賀前田) 가문의 4대째 당주인 마에다 미츠타카(前田光高)가 카나자와(金沢) → 에도 사이를 단 6박(통상적으로는 12일 걸렸다) 만에 이동했던 칸에이(寛永) 20년(1643)의 일로, 하루의 행진 거리가 약 70km에 달했다.
어째서 이렇게 서둘렀는가 하면, 이때, 바쿠후(幕府) 내부에서 마에다 가문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은밀히 카가 정벌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마에다 가문은 서둘러 산킨하여 쇼군 가문에 반역할 뜻이 없다는 증거를 보임과 동시에, 만에 하나라도 토쿠가와군에게 공격받을 경우를 상정하여 요격(邀撃)용으로 견고한 요새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엄청난 건설 경비가 들었기 때문에, 경비 절감을 해야 할 상황에 내몰려 산킨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 요새가 카나자와 이치노 쵸(市野町)에 있는 니치렌슈(日蓮宗) 사원인 세이큐잔(正久山) 묘류지(妙立寺: 닌쟈데라)로, 사원이란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이고, 데마루 요새(出丸要塞)로서 비밀 계단, 비밀 방, 함정, 망루 등... 다양한 군사기능을 갖추었으며, 물론 카나자와 성(金沢城)과 은밀하게 오갈 수 있는 지하 통로도 설치되어 있다.
영화『超高速! 参勤交代(초고속! 산킨코타이)』는 어쩌면 이 마에다 가문의 일을 모티프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