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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07 (0) 2017/07/03 PM 11:08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다이칸(代官)보다도 힘 있는 백성 대표도 있었다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라는 흐름으로 천하는 통일되어 갔고, 260여년이나 계속해서 안정된 토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 정권이 구축되어 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봉건체제(封建体制)로서 극심한 억압이 행해져 가게 되었다... 라는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 역시「토쿠가와 바쿠후와 비교해서, 우리들의 시정(施政) 쪽이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라고 어필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明治政府)가 적극적으로 행한 세뇌 교육의 산물인 것이다.

 천하통일의 내정(内情)은 사실, 현대풍으로 논한다면 M&A와 시정촌 합병(市町村合併)을 더해서 둘로 나눈 듯 한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흡수당한 측의 우두머리와 그 일족은 숙청당하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간부급 가신은 대부분 기존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남겨졌는데, 이를 본령안도(本領安堵)라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통일은 단시일만에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으며, 흡수된 측을 뿌리 뽑으려 한다면, 당하는 측도「가만히 앉아서 근절 당할까 보냐!」하고 결사적인 저항을 하게 될 것이 틀림 없기에, 그렇게 된다면 센고쿠 난세는 언제 끝나게 될지 알지 못 한 채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천하통일은「타협의 산물」로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흡수된 측의 가신 전원을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인원 감축은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시정촌 병합에 있어서, 의원 정원수 오버로 실직하는 의원이 발생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햐쿠쇼부시(百姓武士)」는「백성(百姓)」에 전념하도록 정해졌고, 여기서 나누시(名主)나 쇼야(庄屋), 혼진(本陣), 햐쿠쇼다이(百姓代) 같은「무라야쿠닌(村役人)」계급이 발족되었다. 

 종래의... 메이지 정부에 의해 세뇌된 일본사 지식에 따르면, 막번체제(幕藩体制)에서는 쇼군(将軍) 아래에 각 다이묘(大名)가 있고, 그 아래에 가신단이 있으며, 또 그 아래에 무라야쿠닌이 위치한다... 라는 피라미드형의 정치 기구가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무라야쿠닌은 사실 흡수된 측의 간부급 가신이기 때문에, 그들을 흡수한 다이묘 측의 가신단보다 아래라고는 한정지을 수 없다. 명목상으로는 상위인 다이묘 가문의 가신단보다 아래에 위치하면서도, 실제 의식으로는 자신들이 위라고 생각한 무라야쿠닌도 다수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연공(年貢)을 모으는 방식에는 케미호(検見法: 매년 가을에 벼 수확 상황을 보고 연공량을 정하는 방식)와, 죠멘호(定免法: 과거 10년 동안의 연공의 평균치를 바탕으로 해서 연공량을 고정시키는 방식)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어느쪽을 채용할지는 무라야쿠닌(즉, 백성 측의 대표)의 이해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합의에 이르지 못 할 경우에는, 무라야쿠닌의 위에 있어야 할 다이칸(代官)이 해고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칸죠부교(勘定奉行)인 하기와라 시게히데(萩原重秀)로, 그는 동시에 맡고있던 사도부교(佐渡奉行)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사도는 종래에 케미호 방식을 취하다 죠멘호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이후에는 죠멘호 방식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이는 죠멘호 방식 쪽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리했기(풍년인 해의 수확량은 평균치를 산출할 경우에 제외되지만, 흉작일 경우는 그대로 평균치를 계산할 때에 포함시키는 게 백성 측의 요구로 인정되었다) 때문이나 다름 없다. 

 그만큼 백성들의 힘은 막강했다.

 히데요시가 실행한 농업정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타나가리(刀狩り: 백성들로부터 무기를 몰수하는 정책)와 타이코 검지(太閤検地)인데, 카타나가리는 햐쿠쇼부시라는 애매한 존재를 없애고, 백성을 무사 이외의 업종에 전념시키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이 이전의 백성은 무투 집단(武闘集団)이라 카타나가리 이후의 백성(농업 종사자)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으나, 노부나가 시대를 묘사한 시대극에서는, 백성집단을 쓸만한 무기도 없고, 무예나 전투법도 모르는 인간상(像)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는 점은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런데, 무투 집단에게서 무기를 몰수했기 때문에, 몰수당한 측에게도 어떠한 메리트가 없다면 카타나가리가 잘 알려진 대로 철저하게 행해졌을 리가 없다.

 실은, 그것을 위한 "물물 거래"로서 히데요시가 추진한 게 타이코 검지였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농지와 관련된 권리 관계가 복잡했는데, 누가 실제 권리자인지가 애매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원인이 된 항쟁 등도 각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히데요시는 타이코 검지를 통해서「진짜 토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확정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은「토지 소유자로서의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항쟁의 원인의 태반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무기를 공출(供出)하는 카타나가리에 응한 것이다(전부가 불식 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최저한의 무기는 남길 수 있게 해주었다).

 검지로 인해, 이와 연동해 연공량도 확정되었는데, 항쟁에 의한 에너지 감소도 제거되면서 종합적으로 보자면 백성에게 있어서 유리한 선택지였기 때문에, 검지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고 난 뒤에도 바쿠후나 다이묘 가문에 의해 정기적으로 검지가 행해졌다(신덴 개발 등으로 농지가 점점 늘어났으며, 전매로 텃밭의 소유자가 교체되는 사례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은 모두 백성에게 있어서 유리했기 때문이지, 결코 위로부터의 압박이 엄격화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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