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유력한 백성보다 가난한 다이묘(大名)가 있었다
~ 센고쿠시대(戦国時代) 전기부터 중기에 걸쳐서는, 코쿠진(国人)이나 지자무라이(地侍) 등으로 불리운 햐쿠쇼부시(百姓武士)가 일본 전국에서 늘어나 있었다. 한 마을에 한 사람씩 있었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햐쿠쇼부시는, 서로 인척 관계를 맺는다거나 해서 안정된 인간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리더 같은 소질을 가진 이가 그룹을 통솔하며,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이후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를 축출하여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서 성공해 갔다.
리더는 표면적으로는 주군(主君)이며, 통솔 받는 측의 그룹 구성원은 가신(家臣)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당시까지의 본령(本領)이 안도(安堵)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군과 가신은 지배 관계가 아니라, 계약 관계라 봐야 옳다.
때문에, 때로는 주군은 가신에게 딸을 출가시킨다거나 하면서 계약 관계를 보다 강화시키는 정략 결혼 정책을 취한다거나 했다.
예를 들어 이즈(伊豆)에서는, 지리적으로 해안가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연안에 있는 각지에서 그러한 햐쿠쇼부시가 할거하여 각자가 이즈 반도(伊豆半島)의 작은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사단이 오다와라 호죠(小田原北条) 씨의 선조인 호죠 소운(北条早雲)이 이즈, 사가미(相模)로 영지를 확대해 간 전략에 협력하여 명목상으로는 소운의 가신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래대로 각자의 지배지를 유지했다.
호죠 씨는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고, 호죠 가문은 이에야스(家康)와 친하게 지냈던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를 제외하고 근절되긴 했지만, 가신단들은 거의 그대로 본령을 안도받았다.
시모다 성(下田城)의 성주였던 시미즈 야스히데(清水康英) 만은 시모다가 수군(水軍)의 요충지라는 이유로 토쿠가와 가문에 고용되긴 했지만, 그 대신에 누마즈(沼津)의 혼진(本陣)이 되었다.
시미즈 가문은 이에야스의 열번째 아들인 요리노부(頼宣)와 열한번째 아들인 요리후사(頼房)를 낳은 요쥬인(養珠院: 오만노카타)과 인척 관계에 있어 키이 토쿠가와(紀伊徳川) 가문은 산킨코타이(参勤交代) 때에는 자주 누마즈 혼진에 머물렀는데, 이 때문에 시미즈 가문에는, 토쿠가와 가문으로부터 받은 배령품(拝領品)이 오늘날까지도 다수 남겨져 있다.
이즈 반도 전체는 해상 교통의 요충이라는 이유로 고료(御料: 바쿠후의 직할령) 대우를 받았는데, 말단인 마을 단위로 보면, 호죠 씨의 가신단이 그대로 나누시(名主) 혹은 쇼야(庄屋)라는 호칭으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고료는 속된 말로 텐료(天領)라 부르는데, 텐료라는 것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전의 타이세이 봉환(大政奉還)에 의해 바쿠후 직할령이 텐노령(天皇領)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텐노령을 뭉뚱그려 텐료라 부르게 된 것으로, 에도시대에는 텐료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됐든「말단 지배자 및 지배 기구는, 이전 정권의 방식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방식은, 메이지 유신 때에도 유지되었으며, 대다수의 나누시나 쇼야, 혼진이 초대 촌장으로 임명되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납득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센고쿠시대 전기부터 중시에 걸친 햐쿠쇼부시들 중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카타리가리(刀狩り)와 타이코 검지(太閤検地)에 의해「단순한 백성」신분으로 격하된 자는, 기본적으로 지배자가 된 다이묘(大名)의 가신단 대다수보다는 유복했다.
그런 자들 중에는, 어지간한 다이묘보다도 유복했던 대백성(大百姓)도 있었는데, 그런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사카타(酒田: 야마가타 현 사카타 시)의 혼마(本間) 가문이다.
혼마 가문은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을 모셨던 유력 가신이었는데, 켄신이 죽고 카게카츠(景勝) 대가 되자 모반을 부추겼으며, 우에스기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배 등으로 쇠퇴하여 토쿠가와 가문의 지배체제가 되자, 무사 신분을 버리고 혼진이라는 백성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무사였던 시대와 전혀 달라진 게 없이 실질적으로 광대한 토지를 지배하였으며, 일본 최대의 지주로서 유명했다.
무사의 코쿠다카(石高)로 치자면, 혼마 가문은 약 20만 석을 넘었기 때문에(무사의 경우에는 4공 6민으로, 4할이 연공이 되기 때문에 10만 석을 영유하고 있더라 해도 실질적인 수입은 4만 석 정도였다),「혼마 가문 처럼 되기는 도저히 어렵겠지만, 적어도 다이묘 만큼은 되고 싶다」라는 말을 들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혼마 가문은 농업 이외에 신덴(新田) 개발 같은 개척업, 금융업, 해운업 등을 경영하는「다각경영 백성(多角経営百姓)」이었다.
혼마 가문이 얼마만큼 유복했는가 하면, 표면적으로는 혼마 가문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던 쇼나이 사카이(庄内酒井) 가문(11만 석) 쪽이 훨씬 가난해서, 사카이 가문은 혼마 가문으로부터 자주 돈을 빌려 썼다.
1만 냥(연간 소득을 기준으로 한 현대인의 감각으로 치면 20억 엔)이나 2만 냥의 빚은 일상다반사였다.
사카이 가문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로츄(老中)인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에 의한 삼방 영지 교체(三方領地替え: 세 다이묘가 각자의 영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이동을 위해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한다)가 진행되어 나가오카(長岡: 니이가타 현 나가오카 시)로 전봉(転封)당하게 되었을(이동 경비를 더해서 실질적으로는 5만 석 정도가 감소되었다) 때로, 사카이 가문은 혼마 가문에게 울고 매달리면서 30만 량(600억 엔)이나 빌렸다.
그 뿐만 아니라, 혼마 가문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백성무리를 동원하여, 사카이 가문이 나가오카로 전봉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쇼나이 지배자로서 머물게 해달라며 에도까지 보내어 직접 호소를 감행케 했다.
이는, 통상적으로는 사형 당할 행위였지만, 바쿠후(幕府)는 삼방 영지 교체의 방침을 철회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실로 대단하다며 칭찬까지 했으며, 그후의 미즈노 타다쿠니의 로츄 실각으로 까지 이어졌다.
또, 막말(幕末)의 보신 전쟁(戊辰戦争)에서는, 사카이 가문은 오우・에츠레츠 한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의 일원으로서 싸웠는데, 이때 혼마 가문은 군자금으로 5만 량을 제공, 오우・에츠레츠 한 동맹이 어이 없이 패퇴하자, 혼마 가문은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로부터「벌금(罰金: 명목상으로는 헌금이었지만)」을 명령 받았는데, 여기서도 5만 량을 냈다.
그 이후, 사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로부터 이와키타이라(磐城平: 후쿠시마 현 이와키 시)로 징벌적인 전봉을 지시받았으나, 혼마 가문은 메이지 정부에 70만 량을 헌금하는 것에 의해, 이 전봉을 철회시켰다.
에도시대 최대의 다이묘였던 마에다(前田) 가문은, 영내에 사는 대백성에게 비록 첩의 자식이긴 했지만, 당주의 딸을 출가시켰다.
이정도로 백성의 힘은 막강했던 것이다.
유력 백성의 비위를 맞추지 못 한다면, 아무리 유력한 다이묘 가문이라 해도 안정된 영지 지배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에도시대의 실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