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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09 (1) 2017/07/10 PM 09:32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백성(百姓)은 무사(武士)가 될 수 없었다」는 착각

~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는「햐쿠쇼부시(百姓武士)」가 실태라, 무사(武士)와 백성(百姓) 사이에 명확한 구분은 이뤄지지 않았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카타나가리(刀狩り)에 의해서 일정한 구분이 이뤄진 이후에도 백성 신분에서 무사(이럴 경우는 다이묘 가문을 모시며 봉록을 받는 사무라이 신분, 바이신 신분을 의미한다)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한대로, 이 시대의 무사 신분은 시정촌 병합(市町村併合) 이후의 지방의회 의원 같은 이미지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요컨데「정원(定員)」이 있었다.

 정원이 있기 때문에, 봉록(俸禄)을 받는 무사가 되는 것은 한 집안에 남자 한 명 뿐이라, 차남 이외의 남자는「헤야즈미(部屋住み)」라 불리우며, 방 한 칸을 받아서 군식구(居候)로서 생활을 한다. 당연히, 아내를 얻고 자식을 얻고 하는 문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남이 죽지 않는 한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더부살이 해야하는 부양 가족으로서, 이를「얏카이(厄介)」라 불렀다.

 즉,「얏카이(厄介)」라는 말은「부양 가족」이라는 의미로, 이것이 점차 돌봄(面倒), 난사(難事), 폐(難儀) 같은 뉘앙스로 변화하여 현대의 용법으로 이르게 되었는데, 주군이 내리는 봉록이라는 고정 수입으로, 오늘날과 달리 승진을 바랄 수 없는 당시에 있어서는 수많은 부양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무사들의 고민거리였는지를 여실히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극에서 돌봄, 난사, 폐를 끼친다는 의미로「얏카이(厄介)」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고증 오류라 할 수 밖에 없다.

 무사의 집안은 아들이 없으면 대를 이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어찌됐든 아들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딸 밖에 없을 경우는, 데릴사위를 맞이했다).

 계획 출산을 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이 적어서 전원이 요절해버리거나, 반대로 너무 많아서 가계(家計)가 빈곤한 상태에 몰린다거나 하며,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그러한 약점을 파고들어(라고 말하면 표현이 안 좋지만) 백성에서 무사가 되는 이가 속출했다. 

 딸 밖에 없는 가정에 지참금을 주고 데릴사위, 혹은 양자로 들어간다거나, 극단적인 사례로는 부부 양자(夫婦養子: 이미 결혼해 있는 백성 부부가, 그대로 지참금을 주고 양자로 들어가는)도 있었다. 

 이것이 막신(幕臣)의 경우라면「하타모토 주식(旗本株), 고케닌 주식(御家人株) 구입」라 써야하겠지만, 이는 따로「하타모토(旗本)」「고케닌(御家人)」라는 식으로 쓰여진 주식 증서가 존재하는 게 아니기에, 이는 그냥 말장난이다.

 앞에서「정원」이라 썼는데, 이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가신으로서 고용되는 가신의 총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신단에게 지불하는 봉록의 총액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라, 고용되어 있는 다이묘 가문의 수입이 늘어나면 가신을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반대로 기근 등으로 수입이 격감할 경우에는 간단하게 가신을 자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봉록이 삭감되거나 했다.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무사도 다수 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무사는 고육지책으로서 지참금을 목적으로 유복한 백성을 양자로 맞이하는 패턴으로의, 백성 → 무사가 될 기회가 늘어났다.

「수입이 늘어나는」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신덴 개발(新田開発)인데, 이를 대대적으로 실천한 인물이 제 8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로, 이러한 과정에서 백성 신분에서 출세해 하타모토로 까지 승진한 이가 이자와 야소베에(伊澤弥惣兵衛)이다.

 야소베에는 키이노쿠니(紀伊国) 나가 군(那賀郡) 미조노쿠치 무라(溝口村: 와카야마 현 카이난 시 노카미신) 출신의 백성이었는데, 키노카와(紀ノ川) 유역의 신덴 개발로 실적을 남겼고, 그의 실적을 높이 평가한 요시무네에게 불려와서 미누마(見沼) 간척 사업에 종사했다.

 그 외에 타마 강(多摩川) 개수, 테가누마(手賀沼)의 신덴 개발, 키소 삼천(木曽三川)의 개수, 코누마(鴻沼) 간척 등에도 힘 써서 바쿠후(幕府)의 수입 증대에 막대한 공헌을 하여 칸죠긴미야쿠(勘定吟味役)를 거쳐서, 미노군다이(美濃郡代)로 까지 임명되었다(이 때 칸죠긴미야쿠를 겸임한 채였다).

 칸죠긴미야쿠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재무성 사무차관격이며, 미노군다이는 기후 현지사(라고 해도, 바쿠후 직할령일 뿐이라, 지사라기 보다는 정부령 지정 도시의 수장급 정도겠지만)이다. 대단한 출세라 할 수 있다. 

 이자와 야소베에와 비슷한 경위를 가지고서 하타모토로 까지 출세한 자로, 카와사키쥬쿠(川崎宿)의 혼진(本陣)이자 나누시(名主)인 타나카 큐구(田中丘隅: 타나카 요시히사)가 있다.

 큐구는 농정(農政) 및 민정(民政)에 관한 의견서인『民間省要(민칸세이요)』를 집필하여 오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大岡越前守忠相)를 통해서 요시무네에게 헌상, 이 의견서의 내용에 감명을 받은 요시무네는, 직접 큐구를 초빙해서 자문을 얻었고, 큐구의 능력을 간파한 요시무네는 큐구를 시하이칸죠(支配勘定)에 버금가는 역직으로 발탁, 카와요케고후신고요(川除御普請御用)로 임명했다. 

 큐구는 아라카와(荒川)의 수방 공사, 타마 강의 치수 공사, 니카료 용수(二ヶ領用水), 다이마루 용수(大丸用水), 로쿠고 용수(六郷用水)의 개수 공사, 사카와 강(酒匂川)의 준설이나 보수 등을 행했다. 

 이러한 여러 공사의 공적을 인정받아, 큐구는 고케닌으로서 시하이칸죠격으로 출세하면서 30명 분의 부치(扶持)를 받은 데다, 3만 석의 바쿠후 직할지 지배를 맡은 다이칸(하급 하타모토)로 까지 승진했다. 

 이렇듯, 백성 신분인 자가 무사가 되는 데에는 자산과 재능이라는 두가지 길이 있어서, 결코 사농공상(士農工商) 같은 꼼짝달싹 못 하는 신분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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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던 건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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