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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11 (0) 2017/07/13 PM 06:08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火付盗賊改)는 오오사카 전투(大阪の陣) 이전부터 있었던 역직(役職)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火付盗賊改)」라는 호칭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소조쿠츠이부(草賊追捕), 토조쿠츠이부(盗賊追捕), 히조쿠코사츠(火賊考察) 등... 다수의 역직이 있었다가, 제 8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시절인 쿄호(享保) 3년(1718)에 일체화된 것이다.

 또, 오사키테구미(御先手組: 토쿠가와군의 선봉을 맡은 궁병대 및 텟포 부대. 전투가 시작되면 선진을 가르며 돌입한다)나 모치구미(持組: 쇼군의 직속 궁병대 및 텟포 부대. 전투 시에는 쇼군의 주위를 엄중히 지킨다. 이름의 유래는, 쇼군 근처에서 쇼군용 무기를 가지고 대기한 데에서 따왔다)의 겸임이었는데, 막말(幕末)인 분큐(文久) 2년(1862)부터는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로 전임되었다.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초대 두령(장관)은 칸분(寛文) 5년(1665)에 임명된 미즈노 쇼자에몬 모리마사(水野小左衛門守正)로 보는 설이 일반적인데, 이는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가 상설(常設)되었다는 단서가 붙어야 성립되는 말이다.

 그 이전에도, 치안이 어지러울 때마다 임시직으로 두곤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초대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장관은 핫토리 아타루 야스마사(服部中保正)와 히사나가 겐베에 시게카츠(久永玄兵衛重勝), 호소이 콘베에 카츠히사(細井金兵衛勝久)... 이 세 사람으로, 케이쵸(慶長) 16년(1611) 8월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역직 명칭은 핫토리 야스마사와 호소이 카츠히사가 소조쿠츠이부, 히사나가 시게카츠가 야토조쿠아라타메(野盗賊改)였다.

 케이쵸 16년이라 하면, 아직 오오사카 전투(大阪の陣)가 일어나지 않은 시기라 토요토미(豊臣) 가문이 건재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천하의 추세가 어떻게 될까... 라는 파란이 일던 때였다. 

 여기서 잠깐동안 핫토리 야스마사와 히사나가 시게카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3대째 핫토리 한조(服部半蔵)인 핫토리 마사나리(服部正就)가 케이쵸 10년(1605)에 이가구미(伊賀組)의 동량(棟梁) 자리에서 잘리게 되었다. 

 부친인 2대 한조 마사나리(半蔵正成)가 유능한 자였던 데에 반해 너무나도 무능해서, 그저 자신의 권위만을 누리며 부하인 이가도신구미(伊賀同心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기 때문에, 이가구미들이 요츠야(四谷)에 있던 쵸젠지(長善寺)에서 농성을 하며 마사나리(正就)이 파면을 요구하는 파업사태를 일으킨 것이다(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파업이다: 역자주).

 이때, 이가구미는 총 네 팀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두 팀을 맡고있었던 이가 핫토리 야스마사와 히사나가 시게카츠였다. 그들이 맡았던 소조쿠츠이부나 야토조쿠아라타메도, 이가구미 지배와 겸임한 것이다. 

 오오사카에 있던 토요토미 가문은, 토쿠가와 가문과 정면으로 격돌했다가는 승산이 없을 게 당연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소재지인 칸토 지방(関東地方)을 소란케 하는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정사(正史)인『徳川実紀(토쿠가와짓키)』의 케이쵸 16년 8월 3일 란(欄)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볼 수 있다. 


【히타치(常陸), 시모츠케(下野) 양국에 소조쿠(草賊)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핫토리 아타루 야스마사와 호소이 콘베에 카츠히사, 히사나가 겐베에 시게카츠에게 이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조쿠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무리를 결성하였다 하여, 세 사람을 조속히 보내 수백명을 생포하고 그 목을 쳐서 오야마(小山), 이모가라 신덴(芋柄新田) 이외에 93개 소에 효수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했던 것이 핫토리 야스마사의 분투로,『寛政重修家譜(칸세이쵸슈카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야스마사들은 온 산림을 탐색하여 수십명을 격살(撃殺)하였으며, 패거리 두명을 생포했다. 남은 도당들을 모조리 주살하니 모두 아흔세명. 오야마 및 이모가라(芋加羅) 신덴 등의 땅에 효수하였다】


 또, 히사나가 시게카츠에 관해서는『칸세이쵸슈카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게카츠는 평소부터 각소의 안내자들을 고용하여 산림 곳곳에 숨어있는 자를 찾아내어 수십명을 공격했고, 야스마사, 카츠히사들도 도당을 주살, 오야마, 이모가라 신덴 등... 구십세 곳에 그들의 목을 효수했다】


 후반에 관해서는 공통되고 있기 때문에, 이 93명을 포박하고 죽여 효수한 것은 이 세 사람의 협동 작전이며, 그 이전의 수십명을 죽인 점에 관해서는, 각자가 분담한 개별 행동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실제로, 히타치와 시모츠케 양국에서 소조쿠가 도량발호(跳梁跋扈)한 범위가 과장되었다고 쳐도 현재의 이바라키 현(茨城県)과 토치기 현(栃木県)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핫토리, 호소이, 히사나가가 이끈 세 부대는 각각 개별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대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도당들을 소탕하고 다니다가 대강의 처리가 끝난 다음에 잔당 토벌을 위해 합류했고, 그 잔당의 수가 93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참... TV 시대극인『鬼平犯科帳(오니헤이한카쵸)』에서 하세가와 헤이조(長谷川平蔵)가 자신과 맞서고 있는 도적들을 시원스레 베어 넘기는 레벨의 이야기가 아니다.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 초창기에는, 아무리 토요토미 가문이 오오사카에서 건재했다고는 해도 이런 살벌한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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