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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12 (0) 2017/07/14 PM 04:27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火付盗賊改)의 출장여비는 장관이 자비로 충당했다

~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火付盗賊改)는 뭔가 일이 있으면 칸핫슈(関八州: 칸토 8주)는 물론이고, 좀 더 먼 곳까지도 가곤 했다. 

 에도(江戸) 이외는 핫슈마와리(八州廻り)... 즉, 칸토(関東) 단속 출장을 분담한 것이라 오해하겠지만, 핫슈마와리는 칸죠부교(勘定奉行) 아래에 분카(文化) 2년(1805)에 설치된 부서이기 때문에, 에도시대(江戸時代) 절반동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역할이었다. 

 그런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행동 범위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있었던 사례를 소개해 보도록 하자.

 쇼토쿠(正徳) 5년(1715) 초겨울,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두령(명칭은 토조쿠코사츠)이었던 후나코시 고로자에몬 카게츠구(船越五郎左衛門景次)에게, 에치고(越後)의 백성으로 부터 에치고노쿠니 칸바라 군(蒲原軍) 야스시로 무라(安代村)와 토구치 무라(戸口村)에 걸친 산림 지대에 도적단이 숨어살면서 나쁜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퇴치해줬으면 한다는 호소가 들려왔다.

 그래서 후나코시 카게츠구는, 부하인 도신(同心) 2명(마츠노 이치뵤에 및 타자와 칸다유)을 임명하여 출장비를 주고는 이 일을 호소해 온 사람을 길안내인으로 세워 에치고로 파견했다. 

 이 두 도신은 수완이 좋아서, 단 몇일 만에 도적 일당 7명을 포박했지만, 그때부터 고생길이 열리게 된다.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취급 안건이기 때문에, 사로잡은 도적단은 에도까지 호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토마루카고(唐丸籠: 에도시대에 죄인을 호송하던 닭둥우리 같이 생긴 가마)를 짊어지고 운반하는 등... 이러한 경우의 비용은 도적단이 머물던 마을의 사람들이 충당하게 된다.

 그런데, 야스시로 무라 사람들은「우리들이 사는 마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낼 수 없다」며 거절, 토구치 무라 사람들도 같은 이유를 대며 비용을 내려하지 않았다.

 곤란해진 도신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료(御料: 바쿠후 직할령)까지 연행했고, 다이칸(代官)으로서 진야(陣屋)에 있던 노세 곤베에(能瀬権兵衛)와 담판을 지었는데, 노세는「사건의 발생지인 두 마을에서도 부담하려 들지 않은 돈을, 어째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곳 다이칸쇼(代官所)에서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겐가? 거절하겠다」며, 냉담한 반응.

 도신도 다이칸도 모두 막신(幕臣)인데도 서로를 돕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오늘날의 종적 관계 행정의 폐해의 축도(縮図)를 보는 듯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두 도신은, 이곳 가까이에 있던 또 다른 고료 다이칸쇼인 이즈모자키(出雲崎)까지 연행한다. 그런데, 이곳의 다이칸인 카메다 사부로베에(亀田三郎兵衛) 역시 노세와 같은 구실로 단호하게 거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던 중에, 두 사람은 출장비를 모조리 다 써버리게 되었다. 노세도 카메다도「엉뚱해서」빌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사로잡은 7명의 도적을 석방하고 에도로 돌아가, 장관인 후나코시에게 성과가 없었음을 보고했다.

 화가 치밀은 후나코시는, 상사인 와카토시요리(若年寄)를 통해서 칸다바시(神田橋)와 사쿠라다몬(桜田門)의 경호역으로 임명받아 에도 죠후(定府)로 있었던 에치고 시바타(新発田)의 미조구치 호키노카미 시게모토(溝口伯耆守重元)에게 부탁하여, 도적단을 잡을 경우 에도까지의 호송 비용을 부담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마츠노 이치뵤에(松野市兵衛)와 타자와 칸다유(田沢勘太夫) 두 사람을 파견, 두 사람은 재빠르게 일당을 포박하여 시바타의 미조구치 가문에게 신병을 맡겼고, 미조구치 가문에서는 에도까지 호송하여 칸죠부교의 손으로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칸죠부교는 에도 이외의 고료의 관리 지배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勘定」라는 두 글자에 집착한 나머지 칸죠부교가 바쿠후의 재정만을 담당하는 것 처럼 잘 못 묘사한 시대극이 있어서 안타깝다

 그런데, 이 칸죠부교에 의한 조사 결과, 뭔가, 도통 영문을 모를 일이 되어버렸다. 

 실은 두 도신이 사로잡은 도적단은 도적단이 아니라, 에치고 칸바라 군에 있던 마을들이 도적 등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의뢰했던 요진보(用心棒: 해결사) 집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집단에게 험한 꼴을 당한 일당들이 거짓 고소인을 내세워서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도신들을 파견시켜 사로잡도록 한 것이다. 사람 좋은 도신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서 "도적단"을 고문하여「우리들은 도적단이옵니다」라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는 경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야스시로 무라와 토구치 무라 사람들이 호송 비용 부담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한 이유도, 실은 도적단이 도적단이 아니라, 자신들 마을의 요진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으로,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도신들이 무서워서 진상을 말하지 못 한 것이다. 

 7명의 요진보 집단을 단 두 사람이 재빠르게 포박해버리는 등... 이 두 도신은 상당히 강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후나코시 카게츠구는, 이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서 즉시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직에서 해임되는데,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의 출장 비용은 장관으로부터 지급되는 것이며, 다른 곳에서는 돈을 융통받지 못 했음을 알 수 있다.

 TV 드라마인『鬼平犯科帳(오니헤이한카쵸)』에서도, 하세가와 헤이조(長谷川平蔵)가 부하인 요리키(与力)나 도신, 메아카시(目明し) 등에게 금전을 건내주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외에도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가 지방으로 출장을 간 사례는 몇가지 있다. 유명한 인물로, 토쿠노야마 고헤에 히데이에(徳山五兵衛秀栄)가 있다. 그는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郎)의 소설『おとこの秘図(남자의 비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토쿠노야마 히데이에는 엔쿄(延享) 3년(1746) 9월에 대도적 닛폰 사에몬(日本左衛門)... 즉, 하마시마 쇼베에(浜島庄兵衛)의 수하를 엔슈(遠州: 시즈오카 현 서부) 카케가와(掛川)까지 가서 포박했는데, 닛폰 사에몬이 잠복하고 있다는 밀고를 받은 토쿠노야마 히데이에는, 요리키인 홋타 쥬지로(堀田十次郎)를 지휘관으로 이소노 겐파치(磯野源八), 코바야시 오카에몬(小林岡右衛門), 타츠타 마고스케(竜田孫助), 사토 큐헤에(佐藤九兵衛), 오카 기하치로(岡儀八郎), 호시노 이소하치(星野磯八), 코무라 토베에(小村藤兵衛)라는 7명의 도신을 파견하여 일당을 포박했다.

掛川 東海道五十三次之内 日本左衛門(役者東海道).jpg

[닛폰 사에몬(하마시마 쇼베에)]

 

 수괴인 닛폰 사에몬 만은 달아났지만, 수하들이 모두 잡혀갔음을 알고 포기하고 자수하여, 덴마 쵸(伝馬町) 감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자수한 곳은 쿄토(京都)였는데, 일부러 쿄토까지 인수하러 가서 에도까지 호송하였고, 참수된 그의 목은 카케가와와 가까웠던 엔슈의 미츠케쥬쿠(見附宿)에서 효수되었으니, 신칸센(新幹線)도 없던 시대에 먼 길을 오가거나 했으니, 실로 힘든 출장을 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6년 뒤에, 토쿠노야마 히데이에는 사가미(相模) 오다와라(小田原)에서 오와리 큐에몬(尾張九右衛門)을, 센슈(泉州: 오오사카 부 남부)에서 닛폰 사에몬의 후계자를 자칭한 이마닛폰 사에몬(今日本左衛門)이라는 도둑을 잡았다.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가 얼마나 폭넓은 지역에서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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