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오오오카 에치젠(大岡越前)의 주된 공적은「오오오카 재판(大岡裁き)」이 아니었다
~ 그래서, 에도 마치부교(江戸町奉行)에서는 가장 유명한 오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大岡越前守忠相)를 배출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의 업적을 다뤄보고자 한다.
TV 시대극『大岡越前(오오오카 에치젠)』은 카토 고(加藤剛)가 주연한 작품으로 3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방영되었는데, 실존한 오오오카 에치젠의 재임 기간도, 19년 반(1717~1736)이라는 이례적일 정도로 긴 기간이었다.
선정(善政)을 배푸는 능리(能吏)였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기를 얻어, 그를 주인공으로 한『오오오카 에치젠』이라는 작품도 쓰여지게 되었지만, 이 작품의 내용은 거의 엉터리다.
중국(中国)에서의 고사(故事)를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건인 것 처럼 각색한다거나, 다른 마치부교나 히츠케토조쿠아라타메(火付盗賊改)가 한 일을, 오오오카 에치젠의 공으로 왜곡시킨다거나 하며 완전히 작가 마음대로인데, 오오오카 에치젠이 실제로 처리한 일은「시라코야 오쿠마 사건(白子屋お熊事件)」 단 하나뿐이다.
마치부교쇼(町奉行所)는 오늘날로 치자면, 경시청과 토쿄 지검, 토쿄 소방청, 국토 교통성 칸토 지방 정비국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 같은 기관이었다.
그런고로, 오오오카 에치젠이 가장 크게 자신의 수완을 발휘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시대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오오오카 재판(大岡裁き)」이 아니라, 소방과 치안 행정 단 두가지 분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소방 방면에 대해 다뤄보자.
「화재(火事)와 싸움(喧嘩)은 에도의 꽃」이라 야유받을 만큼 에도에서는 화재가 잦았는데, 최대의 원인은 서민들의 집 지붕이 카와라부키(瓦葺き기와 지붕)가 아니라, 코케라부키(杮葺き: 널판 지붕)이나 토치부키(栩葺き: 상수리 나무로 지은 지붕), 카야부키(茅葺き: 초가 지붕), 와라부키(藁葺き: 짚 지붕)이었다는 것이다.
카와라부키는 사치스럽다 하여 무사 계급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법으로 금지시킨 게 원인이다.
이 때문에, 일단 화재가 일어나서 불씨가 바람에 날리거나 하면, 즉시 연소(延焼)가 일어나 광범위하게 불길이 확산되어 손을 쓰지 못 할 정도의 대화재가 되었다.
예를 들어 메이레키(明暦) 3년(1657)에 일어난「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에서는 에도 성(江戸城)의 천수각(天守閣)까지 불이 번져 소실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결국 재건되지 않은 채로 끝났다.
런던 대화재, 로마 대화재와 더불어「세계 3대 대화재」중 하나로 꼽힐 정도인지라, 에도의 태반이 허허벌판이 되었고, 불에 타 죽은 사람이 10만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어찌됐든 아무런 도시계획 없이 주택이 밀집해서 만들어진 게 원인이라, 이후에는 여기저기에 연소를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히요케치(火除地: 소방용으로 만든 공터)나 히로코지(広小路: 노폭이 넓은 가로)가 만들어졌다(때문에 1657년 이전에 히로코지가 있었던 것 처럼 쓴 시대극이 있으면, 커다란 시대 고증 오류이다).
덧붙이자면, 이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의 에도 복구 공사를 위해 전국각지로부터 목재상, 목수, 비계공(鳶職) 등의 직인(職人)들이 대거 에도로 몰려왔다.
이를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니우리야(煮売屋)」라 불리우는 외식 산업이 발달한다. 생선 조림(煮魚), 콩자반(煮豆), 야채 조림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조리한 반찬을 판매하는 장사로, 메이레키 대화재 이전에 이러한 장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메이레키 3년 이전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니우리야가 장사를 하고있는 것 처럼 묘사되어 있다면 시대 고증 오류이다.
처음에는 오늘날의 라멘집처럼 포장마차 형태 방식이었다가, 점점 점포를 갖추고 고정된 장소에서 영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는데, 이는 딱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시절이 되면서 부터이다.
포장마차 방식인 니우리야는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불을 서투르게 사용했다가는 화재 발생의 원인이 되기 쉬웠다. 그래서 몇번이나 니우리야의 야간영업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냥 금지령을 내리는 것 만으로는 효과가 낮아, 오오오카 에치젠이 점포를 갖추도록 지도를 하곤 했다.
외식산업을 위한 점포가 요시무네 시대가 되면서 일거에 늘어난 이유는, 화재 발생을 두려워 한 오오오카 에치젠의 지도에 의한 것으로, 예를 들어 선대 쇼군(将軍)인 츠나요시(綱吉) 시절인 겐로쿠시대(元禄時代)에 술집(飲み屋)에 들어가 음식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오는 시대극이 있으면, 이 역시 시대 고증 오류다(이러한 장면은 사실 상당히 많이 나온다).
거기다 오오오카 에치젠은 서민의 카와라부키 금지법을 철회하여 점차 초목 지붕을 카와라부키로, 판벽(板壁)을 회반죽을 바른 벽으로 변경하도록 하였고, 또, 도조즈쿠리(土蔵造り: 흙벽으로 만드는 건축 방식) 건물을 늘리라 권장하였다.
그런데, 이게 그다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초목 지붕과 비교해서 카와라부키는 무거웠는데, 이를 지탱하는 기둥을 상당히 두껍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소실된 가옥을 처음부터 다시 짓는 거라면 몰라도, 개축을 할 때에 기둥을 강화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기 때문으로, 오늘날에 있어서, 이미 세워진 건물의 내진 공사(耐震工事)가 아무리 정부가 말하고 권장하고 보조금까지 내주어도, 느릿느릿 진행되지 않는 상황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래서 오오오카 에치젠은 이러한 정책과 병행하여, 마치비케시(町火消: 마을마다 있는 소방 담당자들)의 충원을 도모했다. 쿄호(享保) 5년(1720), 스미다 강(隅田川)에서 서쪽을 담당하는 이로하(いろは) 마흔일곱 팀과, 동쪽의 혼죠 후카가와(本所深川)를 담당하는 열여섯 팀의 마치비케시를 두었다.
이들을 다 합한 수는 모두 1만 431명으로, 오늘날의 토쿄 도(東京都)의 소방서 인원수가 약 2만여명이니, 에도의 스미비키센 내부의 면적을 염두해 두고 비교하면 당시와 현대는 크게 인원수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요컨데, 현대의 소방 체제는 오오오카 에치젠에 의해서 기반이 닦였다... 고 표현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오오오카 에치젠이 손 댄, 현재의 국토 교통성 칸토지방 정비국 비슷한 치수 행정(治水行政)에 관해 살펴 보자.
요시무네가 쇼군자리에 취임했을 당시의 바쿠후(幕府)의 재정은 어려웠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수입(연공)을 늘리는 수 밖에 없었다.
「쿄호 개혁(享保の改革)」에 관한 해설서를 읽어 보면, 연공(年貢)에 대해서 켄미호(検見法)에서 죠멘호(定免法)로 교체하는 것으로 인해 수입이 늘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크나큰 오류이다. 단위 면적당 연공에 관해서는, 오히려 미묘하게 감소했다(만약 늘어났다면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백성 봉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연공 수입이 늘어난 이유는, 치수 공사로 강의 범람에 의한 전답의 홍수 피해가 줄어들었던 데다, 신덴 개발(新田開発)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등용된 이가, 미누마(見沼) 간척이나 타마 강(多摩川) 개수 공사를 맡았던 이자와 야소베에(伊澤弥惣兵衛)나, 아라카와(荒川)나 사카와 강(酒匂川)의 개수 공사를 맡았던 타나카 큐구(田中丘隅) 같은 백성이다.
원래의 신분이 무엇이든간에 쓸모있는 인재는 적극적으로 등용시켜 하타모토(旗本)로 내세우는 인사정책은, 요시무네와 오오오카 에치젠의 합의에 의해서 점차 추진되었다.
구황작물(救荒作物)로 유명한 감자(甘藷: 이 경우 고구마를 가르킨다 / 역자주)를 아오키 콘요(青木昆陽)에게 시작(試作)하게 한다거나(콘요도 최종적으로는 백성 신분에서 하타모토로까지 승진했다), 조선(朝鮮)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인삼(人参)의 국산화를 추진한 것도 요시무네 → 오오오카 에치젠 라인의 농업 정책에 의한다.
요시무네의 치세 동안에는, 쿄호 17년(1732)에 냉해(冷害)에다 메뚜기 때의 대발생으로 대기근이 일어났다. 사이고쿠(西国)에서는 쌀 수확이 1/3 이하로 떨어져,『徳川実紀(토쿠가와짓키)』에 따르면, 100만명에 가까운 아사자가 나왔다고 말할 정도의 대기근으로,「에도시대의 4대 기근」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까지의, 요시무네와 오오오카 에치젠에 의한 적극적인 신덴 개발이나 구황작물의 개발 보급이 없었고, 이에미츠(家光)부터 츠나요시(綱吉)에 걸친 시대에 만연해 있던 방만 정치(放漫政治)가 계속되었더라면, 이 쿄호의 대기근 시점에서 바쿠후가 전복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