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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18 (0) 2017/07/20 PM 08:57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 가문과 키이 토쿠가와(紀伊徳川) 가문의 닌쟈(忍者) 집단, 그 수면 아래서의 공방전

~ 오니와반(御庭番)이라는 것은, 제 8대 쇼군(将軍)이 된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에도(江戸)로 들어올 때에 당시까지의 이가구미(伊賀組), 코가구미(甲賀組), 네고로구미(根来組)를 교대로, 바쿠후(幕府)의 온미츠 임무(隠密任務)를 시켜왔던 닌쟈 집단(忍者集団)이다. 요시무네 시대 이전에 오니와반이 등장하는 시대극이 있으면 그것은 시대 고증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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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쿠가와 쇼군 가문의 상속에 관해서 말하자면, 제 4대 쇼군인 이에츠나(家綱) 시절부터 말썽이 계속되었다. 이에츠나에게 후계자가 될 만한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에츠나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바로 아래 동생인 츠나시게(綱重)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차기 쇼군은 츠나시게의 남겨진 자식인 츠나토요(綱豊: 훗날의 이에노부)가 될지, 아니면 이에츠나의 막내 동생인 츠나요시(綱吉)가 될지... 라는 선택지가 생겼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계승권 순번을 말하자면 츠나토요가 될테지만, 이 때, 츠나토요는 열아홉살이고, 츠나요시는 서른다섯살이었다.

 아직은 토쿠가와 바쿠후의 토대가 확실하게 확립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시기였기에, 표면적으로는 어린 츠나토요가 짊어지기엔 힘들다 여겨졌다. 이에츠나가 재임하고 있던 동안에만 30여 가문의 다이묘(大名)가 개역(改易)당해 있었다. 그 전인 이에미츠(家光) 시절에도 50여개 가문이, 2대 쇼군인 히데타다(秀忠) 시절에는 40여 가문의 다이묘들의 개역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츠나요시가 제 5대 쇼군이 되었는데, 이 츠나요시도 아들복이 없어서(토쿠마츠라는 아들이 태어났으나, 다섯살 때에 요절해버렸다), 츠나요시가 데릴사위인 토쿠가와 츠나노리(徳川綱教: 토쿠가와 고산케 서열 2위인 키이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를 양자로 삼아서 쇼군 후계자로 만들고자 획책하면서 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소동이 발발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이건 도리에 어긋난다!」라며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 고산케(御三家) 서열 3위인 미토 토쿠가와(水戸徳川) 가문의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 미토 코몬의 모델이 된 인물 / 역자주)이다. 츠나노리를 제 6대 쇼군으로 삼겠다는 안(案)으로 진행되는 듯 했지만, 이런저런 중에 츠나노리의 정실(正室)이자 츠나요시가 아끼던 딸인 츠루히메(鶴姫)가 스물여덟살 때에 자식을 보지 못 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아 츠나요시의 안은 기각.

 이미 츠나요시에게 있어서 선택의 여지는 없어지게 되어, 조카인 츠나토요를 후계자로 지명, 츠나토요는 에도 성(江戸城) 니시노마루(西ノ丸)로 들어가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했다. 츠나요시는 이에노부를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츠나요시와 생전의 츠나시게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으로(츠나요시와 츠나시게는 이복형제였다), 형에 대한 미움이 조카에게 까지 이어 간 것이다. 

 이에노부도 츠나요시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은 것을 전혀 은혜라 여기지 않았으며, 츠나요시가 죽기 직전에「쇼루이아와레미령(生類憐れみの令)은 금후에도 계속 유지해다오」라는 유언에「받들겠사옵니다」라고 답해놓고는, 츠나요시가 죽자마자 즉시 폐지, 게다가「아와레미령」을 저촉하여 처벌받은 이들을 전원 무죄방면, 관계자 숙청에 관해서는 모두 스스로 확인해 가며 사면장(赦免状)을 쓰는 철저함을 보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이에노부에게 후계자가 없었다. 이에노부의 후계자인 이에츠구(家継)가 태어난 것은 츠나요시가 죽은지 반년정도 지나서이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계(家継)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에노부가 죽은 뒤에 불과 다섯살 나이에 제 7대 쇼군이 된 이에츠구는 여덟살 때에 세상을 떠났고, 이로인해 키이 토쿠가와 가문 출신인 요시무네가 제 8대 쇼군이 된다. 

 그래서 고산케 서열 1위인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 가문과 서열 2위인 키이 토쿠가와(紀伊徳川) 가문은「차기 쇼군은 우리 가문을 통해서!」라며 수면 아래에서 격렬한 공방전을 펼치게 된다. 이 공방전에 투입된 닌쟈 집단이 키이 토쿠가와 가문의 경우는 훗날 오니와반이 되는 쿠스리코메야쿠(薬込役: 주군 가까이에서 대기하면서 주군의 텟포에 탄약을 넣어주는 임무를 맡는다)이고,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경우는 오도이시타 도신(御土居下同心)이었다. 

 오도이시타 도신에는 히사미치(久道), 바바(馬場), 오오미(大海), 모리시마(森島), 이리에(入江), 카토(加藤), 이시구로(石黒), 이치오카(市岡), 히로타(広田), 오카모토(岡本), 야마모토(山本), 이토(伊藤), 마키노(牧野), 스와(諏訪), 나카가와(中川), 안도(安藤)라는 열여섯 가문이 있는데, 모두 쟁쟁한 닌쟈였다.

 또, 오니와반은 요시무네가 쇼군직에 취임한 쿄호(享保) 원년(1716) 시점에서는 다섯명, 그 후인 쿄호 3년에는 열한명, 쿄호 14년에는 한명이 추가되는데, 여기까지를 당초의 오니와반이라 보고 "오니와반 17가(御庭番十七家)"라 부르는 게 통례가 되어 있다. 이 열일곱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카와무라 야고자에몬(川村弥五左衛門), 미야지 로쿠에몬(宮地六右衛門), 야부타 죠하치(薮田定八), 아케라 카시에몬(明楽樫右衛門), 니시무라 쇼자에몬(西村庄左衛門), 바바 타키에몬(馬場滝右衛門), 나카무라 만고로(中村万五郎), 노지리 시치로베에(野尻七郎兵衛), 무라가키 킷페이(村垣吉平), 후루사카 요키치(古坂与吉), 타카하시 요에몬(高橋与右衛門), 쿠라치 분자에몬(倉地文左衛門), 카지노 타자에몬(梶野太左衛門), 와타다 마고이치(和多田孫市), 하야시 소시치로(林惣七郎), 요시카와 야스노에몬(吉川安之右衛門: 야스노죠)으로, 이 열여섯명은 전원이 키이 토쿠가와 가문의 쿠스리코메야쿠에서 채용했다. 

 남은 열일곱번째가 쿄호 14년에 오니와반이 된 카와무라 신로쿠(川村新六)로, 이 카와무라 신로쿠만은 쿠스리코메야쿠 출신이 아니라, 쿠치노모노(口之者: 주군의 말 고삐를 잡아주는 자)였다.  

 그 후에 오니와반은 최종적으로 스무개 가문까지 늘어났는데, 오도이시타 도신이 한 가문 늘어나면 오니와반도 한 가문 늘어나는 "1대1 대응"식의 증원이 행해졌다.

 확실히 오니와반과 오도이시타 도신은 대항하고 있었던 데다, 요시무네가 쇼군직에 취임할 때까지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이나 키이 토쿠가와 가문에서도, 당주의 수상한 급사(急死)가 이어지고 있었다. 진상은 불명확하지만, 오니와반과 오도이시타 도신이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을 쇼군직에 앉혀야 한다는 암살 전쟁을 전개했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재미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관점에서 쓴 시대극은 수없이 많다.

 요시무네와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항쟁은,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무네하루(宗春)가 될 무렵에 최고조에 달했는데,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츠케가로(付家老)인 타케노코시 마사타케(竹腰正武)가 배신하여 요시무네와 내통, 무네하루가 실각하고 무네카츠(宗勝)가 차기 당주가 되면서 종언을 맞이한다. 통상적이라면, 무네카츠가 무네하루의 양자가 되어 상속했어야 했을테지만, 그러한 수속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이 당주 교체가 이상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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