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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49 (0) 2017/09/26 PM 01:16

제 03장 -말(言葉)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에도(江戸)에는 씨 없는 밀감이 들어 온 적이 없었다

~ 오늘날 가을에 토쿄(東京) 근교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감이 또렷한 자주빛이나 노랗게 열매를 맺고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게중에는, 틀림 없이 감이라 생각하고 가까이 가봤더니 밀감이었다는 사례도 적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이게 에도시대(江戸時代)에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에도시대는 오늘날보다 추웠던 데다, 에도는 밀감 재배 북방 한계선보다도 좀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밀감 재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현대인의 감각으로 밀감이라 하면 씨 없는 운슈 밀감(温州蜜柑)을 떠올리게 될테지만, 에도시대에는 씨가 있는 키슈 밀감(紀州蜜柑)을 대표적이라 여겼다.

 운슈 밀감은 에도시대에는 아마쿠사 제도(天草諸島)의 섬들과 함께 히고(肥後) 아마쿠사 군(天草郡)의 일부가 되었던 나가시마(長島: 현재의 카고시마 현 나가시마 쵸)에서 재배되고 있었는데,「씨가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는 가문 단절(御家断絶)과 연결지어 생각했던지라, 이 시대에는 이런 과일을 기피하여 재배가 보급되지 못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의 감귤류에 대한 기록인『난카이호후(南海包譜)』(1818년 발간)에 따르면, 운슈 밀감의 존재 자체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본격적인 운슈 밀감 재배가 시작된 것은 사츠마(薩摩) 사람이 적극적으로 전국으로 나오게 된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인 데다, 급격하게 증식된 것은 메이지시대 말기부터 타이쇼시대(大正時代) 초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운슈 밀감의 경제 재배(재배하고 판매하여 이익이 나오는 분기점)의 북방 한계선은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에 있는 사가미 강(相模川)이라 여겨지는데, 에도시대 밀감의 주류였던 키슈 밀감(별명으로는 코미칸, 혼미칸, 마미칸, 코간미칸)도 마찬가지인지라, 기온이 쌀쌀했던 에도에서는 수확할 수 없었다.

「씨가 없는 과일 운운」하는 미신이 희박해진 메이지 중기 무렵에, 키슈 밀감은 재배 유통량에서 운슈 밀감에게 뒤쳐지게 되는데, 키이노쿠니야 몬자에몬(紀伊国屋文左衛門)이 키슈에서 에도로 반입하여 대박을 노린 게 씨앗이 있었던 키슈 밀감이다.

 밀감은 에도 근교에서는 재배할 수 없고, 일일이 육로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비쌌다. 여기에 눈을 돌린 몬자에몬은 빚을 내면서까지 밀감을 사들였고, 대형 선박에 실어서 에도로 반입하여 팔아치웠다.

 비싸더라도 신기한 게 있으면 돈을 내는 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밀감은 불티나게 팔렸고, 이로 인해 몬자에몬은 큰 부자가 된 데다, 에도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시대극에서 밀감을 먹는 장면이 있다친다면, 씨앗이 없는 운슈 밀감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주머니 속에 남은 밀감 씨앗이 잔뜩 만져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듯「에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식품이나 식품이 아닌 것을 막론하고 다수 있다.

 먼저, 잘 못 된 시대극에서 자주 나오는 게 배추 절임. 배추는 고대부터 중국에 있었는데,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던 시절부터 일본에 들어왔지만, 재배에는 모조리 실패했다.

 재배를 겨우 성공한 것은, 청일 전쟁에 종군한 병사가 가지고 온 것이라, 이는 즉, 시대극에 배추가 나오면 안 된다. 양파는 에도시대 때부터 있었지만,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메이지 4년(1871) 이후이기 때문에 이것도 시대극에 나오면 잘 못 된 것이다. 

 유채 나물(菜の花お浸し)이 나와도 안 된다. 무로마치시대에 유채꽃 씨앗으로부터 기름을 짜내는 방식이 개발된 이후는 오로지 기름의 원료로서만 재배되었다.

 무로마치시대보다 이전에도 유채꽃을 먹은 관습이 있긴 했지만, 센고쿠시대(戦国時代) 이후에는 산지에서만 먹는 정도인지라, 본격적인 식용으로서 사용하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부터이다.

 코마츠나(小松菜)는 에도시대 초기에, 에도가와(江戸川) 근교의 코마츠가와(小松川) 부근의 농가가 순무를 품종 개량해서 만들어낸 것으로, 제 8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의 매사냥 때에 헌상된 것으로 유명해지면서 확산되었다. 코마츠나라는 명칭도 그때 명명되었다.

 때문에, 요시무네 시대보다 전시대를 무대로 하는 시대극에 코마츠나를 등장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시대극에서「이것 참 맛있을 것 같구나」라며 감을 베어무는 장면을 이따금 보게 되는데, 이것도 NG. 단감은 후유(富有: 1854~1860년 사이에 미노에서 발견되었는데,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메이지시대 후반이다)와 지로(次郎: 지로는 1844~1848년 사이에 토토우미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메이지시대 후반)가 대표적인 품종인데, 이 이전 시대와 이 이외의 장소가 무대가 된다면, 감을 베어무는 장면은 있을 수 없다. 

 덧붙이자면, 젠지마루(禅寺丸)라는 감일 경우는 괜찮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단감인지라 먹어보기 전에는 단감인지 떫은 감인지 알 수 없다. 말캉말캉하니 말랑거려 보여서 잘 익은 것 처럼 보이기에 떫은 감에 당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일단 한 입만 살짝 베어물어서 떫은 감인지를 확인한 다음에 두 입째부터 크게 입을 벌리고 와작 하고 먹으면 OK다.

 고구마가 아오키 콘요(青木昆陽) 이전에는 보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꽤 유명한 사실이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모르는 게 감자(馬鈴薯)다. 

 감자의 전래는 센고쿠시대에서 늦어도 에도시대 초기에 걸친 기간에 이뤄졌는데, 토란이나 고구마와 비교하면 맛이 떨어졌기 때문에 식용으로는 보급되지 않고 오로지 꽃을 피우는 데에만 이용한 관상용 식물이었다. 

 식용 작물로서 알려지게 된 것은 기근 대책으로 제 8대 쇼군인 요시무네가 오니와반(御庭番)을 통해 전국에서 구황작물(救荒作物)을 채취하게 한 이후이다. 그것도, 당초에는 고구마 쪽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에 감자는 각광을 받지 못한 음지의 존재였다. 

 감자까지 중점적으로 재배가 이뤄지게 된 것은, 막말(幕末)에 타카노 나가히데(高野長英)가 텐포 대기근(天保の大飢饉)의 대책회로서 세운 쇼시카이(尚歯会: 와타나베 카잔, 에가와 타로자에몬 히데타츠, 카와지 토시아키라 이외에, 시볼트에게서 공부를 배운 타루타키쥬쿠의 졸업생이 중심이 된 두뇌집단)에서 감자의 장점에 대해 역설(力説)한 이후부터이다. 

 다음은 음식물 이외에「에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눈을 돌려 보자. 

 TV나 영화로 만들어진 시대극의 한여름 장면이 되면 BGM처럼「매미 울음소리」가 들어가는데, 대체로 여기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는 말매미(クマゼミ)의 울음소리이다.

 시대극은 대체로 쿄토(京都)에서 촬영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말매미는 남방계에서 서식하는 매미로 동절기에 추운 지방에서는 살지 않는다.

 에도시대에는 하코네(箱根) 서쪽까지가 말매미의 생식영역이라 에도에는 없었다(현재는 토쿄에서도 이따금 울음소리가 들려오지만).

 엄밀하게 시대 고증을 하고자 한다면, 에도가 무대인 시대극에서는 매미 울음소리는 유지매미(油蝉)나 참매미(ミンミンゼミ) 울음소리로 해줬으면 한다.

 그러고 보면 모포(毛布)가 나오는 시대극은 본 적은 없는데(모포는 1899년 이후가 되어서야 등장한다), 의외로 잘 못 된 용어가「이불(掛け布団)」이다. 이불은 에도시대 후기에 칸사이지방(関西地方)에서 시작되었다가 메이지시대 초기에 들어서야 겨우 토쿄로 전해진다. 

 그 이전의 에도에서는 카이마키(搔巻: 솜을 둔 잠옷)였다. 카이마키는 솜옷의 일종으로, 소매가 붙어있어 팔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조로 된 침구(寝具)이다. 

Kaimaki2.jpg

[카이마키. 드라마나 영화로 자주 만들어진『오싱』을 통해 본 분들도 많을 것이다] 

 

 소매에 팔을 넣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보온성이 풍부해지기 때문에, 주로 동일본에서 상당히 나중 시대까지(태평양 전쟁 전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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