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序章) 上◇
~ 짜증 섞인 듯한 발소리가 방안을 오고 간다. 하야세 타카시(早瀬隆司)는 다시 한번 시계를 바라본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다. 하야세는 진즉에 불이 꺼져버린 파이프를 몇번이나 고쳐 물었다.
그 모습은 통합군 제독이 아니라, 딸을 기다리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제야 겨우 미사(未沙)가 나타났다.
「늦었...」
... 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 말꼬리는 목구멍 속에서 멈춰 버렸다.
현관에는 후리소데(振袖: 겨드랑 밑을 꿰매지 않은 긴 소매 옷) 차림의 미사가 서있었다. 이날을 위해 특별히 제작하게 한 후리소데는 아주 잘 어울렸다. 긴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올렸고, 뺨에는 연하게 연지도 바른 채 였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아버지」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후리소데로 가리자, 옷깃에서 하얀 목덜미가 드러난다.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너무 예뻐서 놀라긴 했지만...」
제독은 그렇게 말하며 미사에게 의자를 내민다. 그리고, 자신도 반대편에 있는 자리에 앉는다. 오랜만에 부녀 두 사람만의 식사임에도, 두 사람 모두 요리에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다.
조용히 시간이 흘러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부녀간의 정감(情感)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대면한 것은 대체 몇년만인걸까.
「너도 이제 다 컸구나」
아버지가 말문을 연다.
「그런 모습을 엄마에게도 보여주시지 그러셨어요」
미사의 마음 속에, 작은 앙금이 생겼다.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든다.
「자, 식사가 식어버리기 전에 먹자구나」
「모처럼 입은 후리소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
일어서려 하는 그녀를 그는 말린다.
「괜찮다. 더러워지면 씻으면 돼. 그냥 앉거라」
부친에게 그런 말을 듣자 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 앉는다.
「이건 오늘을 위해 남겨 두었지」
부친은 와인 마개를 빼고 미사의 와인 잔에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미사야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성인식을 올린 것도 축하한다」
「감사해요, 아버지」
와인 잔끼리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부친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미사도 한 모금 마셔본다. 와인의 독특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시큼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맛있어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전체로 퍼져간다.
「너도 와인의 맛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약간은요. 하지만 오랜만에 마신거라 맛있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잠깐 미소지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화가 활기를 띠는 일도 없이, 두 사람은 묵묵히 요리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부드러운 공기가 흐르고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무리하게 대화를 하려 해도,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화제라 해봤자 군(軍)에 관한 것들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현재의 対젠트라디전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기 마련,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의 의견은 부딪힐 게 뻔했다.
그렇기에 분위기는 조금씩 서먹해져 갔다. 미사의 손은 자연스레 와인 잔 쪽으로 뻗어간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눈 아래나 귓불이 약간 빨게졌다.
누군가 툭 하고 어깨를 두르린다. 돌아보니 클로디아가 서있었다.
「클로디아, 여기엔 어쩐 일로?」
「무슨 소릴 하는거야? 너 생일 파티잖아」
여전히 여우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미사에게, 클로디아는 커다란 꽃다발을 건낸다.
「생일 축하해. 너도 이제 스무살. 명실공히 아줌마(원문은 オバン. 젊은 세대가 자신보다 손위 여자를 아줌마 취급하며 부르는 말)가 되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축하하네 하야세군」
「글로벌 함장님... 그리고 모두...」
「생일 축하드려요」
거기에는 마크로스의 주요 면면들이 모여있었다. 글로벌 함장, 브릿지 오퍼레이터 삼인방, 맥스도 밀리아도 함께 있었다.
「하야세 중위, 이쪽이 제 아내 밀리아입니다」
맥스가 밀리아를 소개한다.
「당신들처럼, 지구인과 젠트라디인도 사이 좋아질거예요. 당신들은 그 교두보가 될거예요」
「미사 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미사는 돌아본다. 그곳에 그가 있다. 조금 상기된 뺨. 뛰어오기라도 한건지 거친 숨소리. 미사 안에서 "어떤 추억"이 떠오른다.
「늦어서 미안해요」
이치죠 히카루(一条輝)는 그렇게 말하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답네요」
미사는 마음과 달리 살짝 핀잔을 주고만다. 아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닌데...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기쁜데...
「그 후리소데 아주 잘 어울려요」
그래, 그렇게 잘 어울려?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어서 기뻐... 하지만, 그것은 마음 속에서의 말일 뿐. 입으로도 표정으로도 내비치지 않는다.
「아, 맞다. 이거」
히카루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를 꺼냈다.
「별거 아니지만」
「그게 뭐예요?」
미사는 손을 내밀며 그것을 받으려 했다. 그 순간...
「미사야 괜찮은게냐」
어깨가 흔들려 정신을 차리고보니 부친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여기는?」
미사는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본다. 클로디아가 준 꽃다발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히카루도 없었다. 모두 꿈... 덧없는 백일몽... 건드리려 하는 순간에 무너지고만다.
「괜찮은게냐, 얼굴이 창백하구나」
「괜찮아요, 조금 취한 것 뿐인걸요」
「너무 무리한 듯 하구나. 의무실에 가겠느냐」
「정말 괜찮아요」
「그러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부친은 여전히 걱정하는 듯 했다. 미사는 조금씩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들자, 와인 잔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꿈 속에서 히카루가 건내주려 했던 상자와 같았다. 미사는 상자를 쥐었다.
「총사령부 안에서는 겨우 이정도 밖에 네게 선물해줄게 없더구나」
「네... 괜찮아요. 아버지께 선물을 받다니, 몇년만인지... 열어봐도 되요?」
「괜찮지 그럼」
상자 속에는 립스틱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여자다워졌으면... 하는, 부친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선물이었다. 그녀는 그 립스틱을 손으로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부친의 마음과 함께 전해졌다.
「감사해요. 내일부터 잘 쓸게요」
「그말은 뭐냐. 그걸 보여줄 상대가 있다는게냐?」
일순간, 그 질문의 진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아버지와 딸의 사이에 질문이 놓여졌다. 결국 그것은 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사에게 있어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하늘 위에 있는 남자와 하늘 저편에 있는 남자 사이를...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와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그러냐」
제독은 유감스러운 듯 어깨를 떨구었다.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이 애비를 안심시켜다오」
「그러게요. 하지만 전 이상(理想)이 높은걸요...」
미사 안에서 마음이 공회전하며 의미 없는 말들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그 질문에 멈춰있다.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 죽음으로 헤어진 자와 살아서 이별한 자 사이에서,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구에게 보여주려 연지를 바르고 이를 검게 칠하는걸까...
누구에게 보여주려 연지를 바르고 이를 검게 칠하는걸까....
미사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하나의 의지(意志)가 어둠 속에서 결정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