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많이 나아진듯 하지만 여전히 대원군은 쇄국 정치로 나라를 망친 인물로 알려져 있죠
왜 인지 모르지만 그와 더불어 개화정책을 편 명성황후랑 대비되기도 하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죠. 그러나 이러한 평은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흔히들 정조가 오래살았으면 이라는 가정을 많이 하는데, 대원군과 정조의 정치방향은 상당히
비슷하고 많은 부분에서 정조보다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여져요. 특히 호포법은 대단한 거 였죠.
양반이 늘어나고 삼정의 문란등으로 나라의 살림이 어려워졌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던 양반에게
최초로 세금을 부여한것은 대단한 겁니다. 삼정의 문란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왕들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으려 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고 (개혁군주라고 물리는 영조나 정조까지도)
그 외에도 비변사 폐지, 서원 철폐등 많은 부분에서 그의 리더십과 뚝심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많은 정치인 중에 개혁적인 법안을 이렇게 뚝심있게 밀어부친 인물이 있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왜 그런걸까요? 바로 그 시대의 한계라고
보여집니다. 정조나 대원군 실학까지도 모두 성리학에 기초한 사상이었습니다. 무려 500년이상 그들을 지배한
성리학을 버린다는것은 거의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대원군이나 정조 모두 그들이 원하던 정치상은 세종시대 였습니다.
성리학이 실용적인 것과 어울려 (초기 훈구파) 역동적인 조선을 꿈꾸었죠. 그러나 이미 그러한 사상으로는 서양에
맞써 싸울수 없었습니다. 청국의 등장으로 성리학 적 우월감이 더욱더 강해진 조선에게 역성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있어야 했죠. 성리학에 기반한 보수가 아닌 어느정도 외부에 대한 정보도 있는 개혁적인 지도가 나타나 내전에 준하는
싸움을 거치후 뚝심있게 개혁을 밀어부쳤어야 한다고 봅니다.
처음엔 제너럴 셔먼호를 바탕으로 증기선을 만들어 보려고도 하고 기본적으로 서양인들의 통상 요구는 거부할지언정 죽이진 않았고 돌려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 서양 상인들 중 오페르트(독일인?)이 대원군 부모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난 후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