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도 뼈가 안 부러졌군요.”
루테가의 영지 아랫마을에서 가장 저명하다고 불리는 의사는 에스켈의 이야기를 듣고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뒤늦은 불꽃의 갑옷으로 고정을 시켜놓은 채였지만, 부어올랐던 팔이 걱정스러웠던 라이얀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의사를 찾아갈 것을 제의했다. 에스켈 또한 부은 팔이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라이얀이 선물을 고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의사를 찾았고, 그 의사의 후덕한 인상에 에스켈은 자신의 여행길의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술술 내뱉고 있었다.
“그렇죠? 정말 못된 말이라니까요. 꼬리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정말 예쁘지만.”
“경은 머리카락에 페티쉬가 있으십니까?”
“아, 아뇨. 저는 그 아래쪽에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를 더 좋아합니다.”
에스켈의 말에 의사는 자신들이 어느 샌가부터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거기에 대해 지적을 하는 대신 허허 웃어넘기는 것을 택했다. 에스켈은 의사의 웃음에 저 또한 따라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넘기곤 몸을 일으켰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팔의 붓기는 오늘밤이나 내일이면 가라앉을 정도로 심하지 않다는 모양이었다. 에스켈은 그 말을 듣고는 말발굽을 막은 자신의 강인한 팔에 대한 자화자찬을 늘어놓았지만, 스스로의 생각에도 말발굽이 날아오자 놀라 지레 자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볼일이 있어서.”
에스켈은 잘가라는 듯 손을 흔드는 의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의원의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아직 눈부셨고,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이라 짐작한 라이얀이 준 은전은 아직도 주머니에서 달각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준비물이 있다고 말하고 받은 돈이 남았을 때처럼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라이얀은 의원에서 대로로 통하는 좁은 길을 걸었다.
“라이얀은 선물을 준비한댔으니까, 한두시간 정도는 걸리겠지. 그 사이에 짧게 술이나 마실까.”
에스켈은 입맛을 다시며 은전은 만지작대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술은 마시고 나면 술냄새가 남게 되니, 라이얀에게 추궁이라도 당하면 귀찮아질게 뻔했다. 경비대장을 하던 때에 같이 농땡이를 피우던 동료가 짧은 시간에 술냄새를 숨기고 들어가는 것도 보았지만, 그 기술을 익힐 필요를 못 느꼈던 에스켈은 그것을 배워놓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기술이 얼마나 쓸모 있던 것이었는지,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지나고 나서야 필요함을 에스켈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차츰 깨달아가고 있었다.
“..잔말 말고 가진 돈 다 내놓으라니까.”
생각을 하다 원래 가려던 길을 지나친 것을 깨달은 에스켈이 고개를 들자, 누군가를 협박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켈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 움찔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게 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에스켈의 앞으로 서너 발짝쯤 앞에, 안경을 쓴 서생같은 인상의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무리가 보였던 것이다.
‘오우.. 어딜 가나 뒷골목은 살벌하구만.’
에스켈은 몸을 움츠리고 몸을 돌려 온 길로 되돌아가려했지만, 뒤늦은 불꽃의 크기는 에스켈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좁은 골목길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등 뒤에 대각선으로 매고 있던 검의 끝과 손잡이가 양 벽에 부딪히며 텅, 하고 제법 큰 소리를 울려 퍼지게 했다.
“와.. 벽이.. 안이 비었나보네.”
에스켈은 미처 다 돌리지 못한 몸의 오른 편으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억지웃음을 지으며 소리가 난 벽을 손등으로 툭툭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골목의 공기에, 에스켈은 입가를 최대한 올려 웃으며 불량배가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아.. 일.. 보세요? 전 마침 돌아가던 참이라.”
에스켈의 말에 불량배들은 에스켈의 등 뒤에 매어진 검과 에스켈을 번갈아 보다, 오히려 에스켈이 대체 왜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척 봐도 보통은 아닌 크기의 검과, 그 독특한 형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들에게나 주어진다는 그 마구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어..”
검이 끼인 것인지 검을 끼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꿈틀대는 에스켈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불량배들의 뒤에서 막대기처럼 서있던 남자가 문 듯 입을 열자, 불량배들은 서둘러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어이.. 쓸데없는..”
“잠시만요.”
남자는 자신의 긴 팔을 뻗어 자신을 협박하려는 불량배의 입을 틀어막고는 에스켈 쪽을 유심히 바라보다, 기어코 굳어있는 불량배들을 자력으로 뚫고 나와 에스켈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량배들은 에스켈의 검을 본 순간부터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던지 남자가 에스켈 쪽으로 다가가자마자 서둘러 골목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에스켈은 원숭이무리에 돌맹이를 던진 것 같이 도망치는 불량배들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멀대같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오.. 이건.. 흔히보는 F급이나 C급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로군요.. 적어도 B.. 아니, A급은 될까.. 게다가 구조를 파악하기 힘든 이 기괴한 모양, 느껴지는 마력, 그리고 그.. 앗 뜨거!”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손으로 치솟는 화염에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물러났다가, 붉게 달아오른 손을 쓸어 만지며 뒤늦은 불꽃을 더욱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마법이군요..? 굉장해! 놀라워! 게다가 그 과정에서 사용자의 마력을 사용한 게 아닌, 자연마력을 끌어와 사용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대체 이 마구의 이름은 뭡니까!”
손이 데일 것이란 것을 알기에 함부로 만지지는 못한 채 공기 위로 어루만지는 듯이 손을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에, 에스켈은 무슨 변태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어쩌면 이 시선이 라이얀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아닐까, 하며 다시금 혐오의 눈빛을 남자에게 쏘아 보냈다.
“아, 아, 굉장해, 분해할 수 있다면 분해해보고 싶군요! 하지만 이 귀한 마구를 뜯어볼 수는 없겠죠, 아니, 그 이전에 저같은 게 뜯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기밀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도도 해보지 못 할테죠! 아아, 오싹거립니다! 그런 애태우는 부분이 더 좋아요!”
“저어기..”
에스켈은 몸을 배배꼬며 외치는 남자의 모습에 검의 위와 아래를 잡아 세워 골목의 벽에서 검이 닿지 않게 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그저 혐오의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끝낼게 아니라 진즉에 도망쳐야할 수준의 변태임을 그제야 조금 눈치를 챈 것이었다.
“아, 아.. 그렇게 가리지 마세요! 제게 더 보여 달란 말입니다! 저는 그 삐죽빼죽한 그 가시를 더욱더 보고 싶어요! 마력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당신의 흉한 몸뚱이가 아니라 말입니다!”
“아, 말이 심한 변태로군.”
에스켈은 자신의 턱을 쓸어 만지며 중얼거리곤 검을 붙잡고는 고개를 뒤로 빼 옆쪽의 샛길이 비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곤 곧이라도 달려들 듯 그 긴 몸을 숙이고 좀비처럼 걸어오기 시작한 남자를 피해 몸을 홱, 돌리곤 빈 골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 아앗! 잠시 만요!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에스켈 T 딜라이트!”
에스켈은 성실하게 그의 요청에 답하며 골목을 빠져 달려갔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남자가 체력이 약한 듯 얼마 달려오지 못하고 무릎을 붙잡고 혀를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에스켈은 지체없이 내달려서 그대로 자신의 여관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벌컥 문을 열며 들어오는 에스켈의 모습에 그사이 선물을 사온 것인지 포장을 하며 침대 위에 앉아있던 라이얀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지만, 에스켈은 뒤늦은 불꽃을 풀어 문 가에 내려놓으며 안심한 듯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져 누웠다.
“에스켈님, 귀족의 품위를..”
“그게 문제가 아니야! 라이얀!”
“당신은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요.”
라이얀은 소리를 지르기도 귀찮은 지 혀를 가볍게 차며 선물을 마저 포장하기 시작했다. 에스켈은 이렇게 주인에게 무관심한 가신이 어디 있나 싶은 얼굴로 라이얀을 바라보다, 이내 라이얀을 더욱 귀찮게 하기로 마음먹은 듯 몸을 일으켰다.
“그.게.문.제.가.아.니.야.라.이.얀.”
“쓸데없는 강조는 그만두세요. 품위가 떨어집니다.”
라이얀은 포장지로 네모난 상자를 싸서 각을 잡으며 말했다. 에스켈은 그 모습에 라이얀의 옆으로 와 라이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다시금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게-문-제-”
“쓸데없이 말을 늘이는 것도 그만두세요. 없던 품위가 더 떨어집니다.”
에스켈의 입술을 손으로 잡아채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라이얀이 말하자, 에스켈은 우부븝, 하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붉게 달아오른 입가를 쓸어만지며 눈물이 찔끔 난 눈으로 라이얀을 올려다보았다.
“야아! 오다가 변태를 만났다니까!”
“아아- 그러십니까.”
라이얀은 어이없는 소릴 한다는 듯 에스켈에게 헛웃음을 지으며 포장지를 리본으로 감쌌다. 에스켈은 그 반응에 욱한 듯이 라이얀이 싸고 있던 선물에 손을 뻗어 빼앗으려 했지만, 라이얀은 옆쪽에 놓인 작대기로 에스켈의 손등을 빠르게 후려쳤다.
“아얏!”
에스켈이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감싸 쥐며 물러나자, 라이얀은 유려한 솜씨로 리본을 마무리하고, 선물을 자신의 침대 맡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막대기는 대체 왜 있는 건데!”
손등을 쓸어 만지며 에스켈이 버럭 소리치자, 라이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치며 말했다.
“물론 에스켈님을 때리려고 있는 거죠.”
“와! 이젠 대놓고 말하는 구만!”
에스켈이 경계하듯 라이얀의 침대를 넘어가 라이얀과 거리를 벌리며 근접 격투술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서자, 라이얀은 에스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드라이어드의 수갑.”
“아직 있었나!”
예의 잡초덩굴이 에스켈의 손목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양손을 봉쇄하자, 에스켈은 당황하면서도 자세를 풀지 않고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라이얀은 에스켈의 눈이 뒤늦은 불꽃을 향하는 것을 보곤, 포기하라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에스켈에게 다가갔다.
“제가 언제 해제했던가요.”
라이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침대에 놓인 작대기를 집어 들었다. 에스켈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라이얀의 가차 없는 체벌에 그대로 노출될 뿐임을 깨닫고는 뒤늦은 불꽃과 변명, 그리고 사과의 말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생각하다, 애초의 원인을 떠올리곤 급히 입을 열었다.
“그냥 변태가 아니라, 뒤늦은 불꽃을 상대로 한 변태야!”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십니까. 그건 무기물이라고요.”
라이얀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에 에스켈은 다급히 묶인 자신의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있다니까? 내가 병원을 다녀온 다음에, 남은 돈이 좀 있어서 술이나 한잔 할까, 아니. 그건 라이얀에게 들키니까 안 되지, 하고 그럼 노름장을 찾아볼까, 하고 골목을 걷는데..”
“오호.. 술은 안 되지만 노름장은 된다.. 왜 제가 그런 곳의 냄새는 못 맡을 꺼라 생각하셨는지..”
에스켈의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한 서두에, 라이얀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어쩌면 주인은 바보 같음을 가장해 자신을 엿 먹이는 것이 취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라이얀이 물음을 던지자, 에스켈은 하하, 하고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노름장에는 담배냄새정도만 나잖아. 그 정도쯤은 처리할 수 있다고.”
“아아.. 그렇습니까. 일단 좀 맞을까요.”
라이얀이 다시금 막대기를 들어 올리자, 에스켈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결과적으론 안 갔으니까 세이프잖아!”
“전 아웃인데요.”
라이얀이 에스켈의 머리를 막대기로 탁, 내리치자, 에스켈은 그 화끈한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슨 말로 훈계를 해야 할지 말을 고르며 막대기로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는 라이얀을 올려다보며, 에스켈은 화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만지며 절로 공손해진 허리를 다시 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거든..”
“아, 그랬습니까. 제가 더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에스켈님.”
“물론이지!”
말투만 공손한 시종에게 에스켈은 괜스레 더욱 어깨를 펴며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그런 골목이면 한둘쯤 있잖아? 불량배라던가?”
“아, 네. 모험소설의 작가들이 분량은 확보하고 싶고 그렇다고 아이디어는 없을 때 흔히 사용하는 소재 아닙니까.”
라이얀의 어쩐지 신랄하기까지 한 말투에 에스켈은 괜히 자신이 그런 흔한 모험소설의 작가라도 된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하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불량배들이 내가 나가려는 골목의 한편에서 키가 멀대 같이 큰 남자를 둘러싸고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겠어? 나 에스켈 T 딜라이트, 기사된 자로 그런 불의는 못 참지! 벽을 탕, 치면서 뒤돌아 뒤늦은 불꽃을 보이며 말했지! 볼일 들 보시라고!”
에스켈은 흥분된 목소리로 뒤늦은 불꽃을 꺼내서 휘두르기라도 하듯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것은 마치 에스켈이 기사된 도리로 불의를 못 참고 불한당들을 물리쳤다는 듯한 말로 느껴졌기에, 라이얀은 에스켈의 말을 얼핏 듣고는 에스켈이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가, 곧 이어 이야기를 곱씹어보고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에스켈님다운 행동이군요.”
에스켈은 라이얀의 침착한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이제 가려는데, 이게 양 벽에 꽉 끼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야. 이를 어째, 하고 낑낑대는데, 불한당들이 그게 불쌍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 다들 사라져버리곤, 어느새 그 멀대같이 큰 남자가 다가오대? 그런데..”
“호오.. 그래서 감사인사라도 받으셨다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그렇게 장황하게 하실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지?”
라이얀은 계속해서 말하려는 에스켈의 말을 잘라먹고는 관심을 잃었다는 듯이 자신의 침대에 앉으려는 에스켈을 옆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에스켈은 라이얀에게 밀려 비틀대며 라이얀을 불만스레 바라보다, 침대의 모서리에 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부터 끝까지 들으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있어? 잠자코 들어보라고, 좀.”
에스켈은 그렇게 말하며 뒤늦은 불꽃을 불러, 날아오는 그 것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채 무릎 위에 놓으며 말했다.
“그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 걸보고는 막,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변태처럼 품평을 해대다가, 가져가려는 것처럼 손으로 만지고 핥고.. 아니, 핥지는 않았나. 여하튼 그랬다니까? 왜, 예전에 있었잖아? 마구 사냥꾼 같은 놈들. 그녀석도 그런 놈 아닐까?”
에스켈은 뒤늦은 불꽃을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라이얀은 선물의 포장이 잘 되었는지 검수하듯 이리저리 살펴보다, 뭘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이 어이없이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에스켈님, A급 마구의 소유자이자, 딜라이트가의 차남, 그리고 기사이신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기사라면 자기 물건정도는 스스로 지키실 줄 아셔야지요.”
“기사라고 해도, A급 마구라고 해도, 기습에는 약하다고. 이름을 물어보길래 이름도 말하고 왔는걸. 찾아오면 어떡하지?”
고민스레 뒤늦은 불꽃을 쓸어 만지며 에스켈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라이얀은 선물의 포장이 완벽하다고 판단했는지 선물을 내려놓고는, 책상으로 가 가문명과 에스켈의 이름을 기입한 카드를 적으려다 문 듯 행동을 멈추며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름을 물어보길래, 이름을 가르쳐 줬다고. 갑자기 찾아오면 인사는 어떻게 해야하지?”
에스켈의 말에 라이얀은 머리 끝이 저릿해지는 두통을 느끼며 책상을 짚었다.
‘저 자식은 정말 백치인가.’
라이얀은 에스켈의 그 멍청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아파오는 머리를 푹 숙였다. 에스켈에 대한 오만가지 욕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일단은 그는 자신의 주인이고, 동시에 자신은 그의 교육담당이었다. 근 10여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를 보필하며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의 뒤처리-를 계속해왔던 라이얀이었기에,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라이얀은 자신을 쫓아오는 에스켈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여행가방으로 가 안에서 흰색의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당분, 당분으로 이 짜증을 해소하는 거야..’
라이얀은 짜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주머니의 입구를 끌러내었다. 에스켈은 그런 라이얀을 빤히 보다가, 라이얀의 옆으로 슬쩍 다가오며 주머니 안을 바라보았다.
“아직 남았어? 어제 너 잘 때 출출해서 좀 꺼내 먹었는데.”
“제 간식주머니를 멋대로 뒤지셨다고요?”
라이얀은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에스켈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머니의 안은 까먹고 남은 과자나 초콜릿의 잔해가 잔뜩 남아있을 뿐이었다. 라이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스켈과 주머니 안을 번갈아 보다가, 곧 주머니의 바닥부분을 잡아 주머니를 거꾸로 털어내었다. 하지만 나풀나풀 떨어지는 그 많은 빈껍데기들에서는 어디도 내용물이 든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고.. 고작 이틀이라고요? 이 주머니가 빵빵할 정도로 사놓고, 저는 손도 못 댔었단 말입니다?”
라이얀은 허망한 얼굴로 쌓여진 껍데기들의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켈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곤 하나도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랬구나.”
미안함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에스켈의 말에, 라이얀은 에스켈을 멍하니 올려보다,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당분으로 당장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머리끝까지 차오른 이 풀릴 길 없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가. 라이얀은 눈앞의 악마-라이얀-와, 쌓여진 간식-이라는 이름의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이내 명쾌한 해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샐리맨더의 한숨!”
에스켈은 이내 화려한 폭음과 함께 창문 밖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