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케로l템페라 MYPI

칸케로l템페라
접속 : 315   Lv. 8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1 명
  • 전체 : 511 명
  • Mypi Ver. 0.3.1 β
소설 같은 걸 가끔 올리고 합니다.
[여름이야기(가제)] 3 (0) 2018/11/27 PM 03:18

잘도 뼈가 안 부러졌군요.”

 

루테가의 영지 아랫마을에서 가장 저명하다고 불리는 의사는 에스켈의 이야기를 듣고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뒤늦은 불꽃의 갑옷으로 고정을 시켜놓은 채였지만, 부어올랐던 팔이 걱정스러웠던 라이얀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의사를 찾아갈 것을 제의했다. 에스켈 또한 부은 팔이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라이얀이 선물을 고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의사를 찾았고, 그 의사의 후덕한 인상에 에스켈은 자신의 여행길의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술술 내뱉고 있었다.

 

그렇죠? 정말 못된 말이라니까요. 꼬리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정말 예쁘지만.”

 

경은 머리카락에 페티쉬가 있으십니까?”

 

, 아뇨. 저는 그 아래쪽에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를 더 좋아합니다.”

 

에스켈의 말에 의사는 자신들이 어느 샌가부터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거기에 대해 지적을 하는 대신 허허 웃어넘기는 것을 택했다. 에스켈은 의사의 웃음에 저 또한 따라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넘기곤 몸을 일으켰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팔의 붓기는 오늘밤이나 내일이면 가라앉을 정도로 심하지 않다는 모양이었다. 에스켈은 그 말을 듣고는 말발굽을 막은 자신의 강인한 팔에 대한 자화자찬을 늘어놓았지만, 스스로의 생각에도 말발굽이 날아오자 놀라 지레 자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볼일이 있어서.”

 

에스켈은 잘가라는 듯 손을 흔드는 의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의원의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아직 눈부셨고,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이라 짐작한 라이얀이 준 은전은 아직도 주머니에서 달각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준비물이 있다고 말하고 받은 돈이 남았을 때처럼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라이얀은 의원에서 대로로 통하는 좁은 길을 걸었다.

 

라이얀은 선물을 준비한댔으니까, 한두시간 정도는 걸리겠지. 그 사이에 짧게 술이나 마실까.”

 

에스켈은 입맛을 다시며 은전은 만지작대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술은 마시고 나면 술냄새가 남게 되니, 라이얀에게 추궁이라도 당하면 귀찮아질게 뻔했다. 경비대장을 하던 때에 같이 농땡이를 피우던 동료가 짧은 시간에 술냄새를 숨기고 들어가는 것도 보았지만, 그 기술을 익힐 필요를 못 느꼈던 에스켈은 그것을 배워놓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기술이 얼마나 쓸모 있던 것이었는지,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지나고 나서야 필요함을 에스켈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차츰 깨달아가고 있었다.

 

“..잔말 말고 가진 돈 다 내놓으라니까.”

 

생각을 하다 원래 가려던 길을 지나친 것을 깨달은 에스켈이 고개를 들자, 누군가를 협박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켈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 움찔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게 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에스켈의 앞으로 서너 발짝쯤 앞에, 안경을 쓴 서생같은 인상의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무리가 보였던 것이다.

 

오우.. 어딜 가나 뒷골목은 살벌하구만.’

 

에스켈은 몸을 움츠리고 몸을 돌려 온 길로 되돌아가려했지만, 뒤늦은 불꽃의 크기는 에스켈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좁은 골목길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등 뒤에 대각선으로 매고 있던 검의 끝과 손잡이가 양 벽에 부딪히며 텅, 하고 제법 큰 소리를 울려 퍼지게 했다.

 

.. 벽이.. 안이 비었나보네.”

 

에스켈은 미처 다 돌리지 못한 몸의 오른 편으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억지웃음을 지으며 소리가 난 벽을 손등으로 툭툭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골목의 공기에, 에스켈은 입가를 최대한 올려 웃으며 불량배가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 .. 보세요? 전 마침 돌아가던 참이라.”

 

에스켈의 말에 불량배들은 에스켈의 등 뒤에 매어진 검과 에스켈을 번갈아 보다, 오히려 에스켈이 대체 왜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척 봐도 보통은 아닌 크기의 검과, 그 독특한 형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들에게나 주어진다는 그 마구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어..”

 

검이 끼인 것인지 검을 끼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꿈틀대는 에스켈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불량배들의 뒤에서 막대기처럼 서있던 남자가 문 듯 입을 열자, 불량배들은 서둘러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어이.. 쓸데없는..”

 

잠시만요.”

 

남자는 자신의 긴 팔을 뻗어 자신을 협박하려는 불량배의 입을 틀어막고는 에스켈 쪽을 유심히 바라보다, 기어코 굳어있는 불량배들을 자력으로 뚫고 나와 에스켈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량배들은 에스켈의 검을 본 순간부터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던지 남자가 에스켈 쪽으로 다가가자마자 서둘러 골목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에스켈은 원숭이무리에 돌맹이를 던진 것 같이 도망치는 불량배들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멀대같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오.. 이건.. 흔히보는 F급이나 C급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로군요.. 적어도 B.. 아니, A급은 될까.. 게다가 구조를 파악하기 힘든 이 기괴한 모양, 느껴지는 마력, 그리고 그.. 앗 뜨거!”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손으로 치솟는 화염에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물러났다가, 붉게 달아오른 손을 쓸어 만지며 뒤늦은 불꽃을 더욱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마법이군요..? 굉장해! 놀라워! 게다가 그 과정에서 사용자의 마력을 사용한 게 아닌, 자연마력을 끌어와 사용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대체 이 마구의 이름은 뭡니까!”

 

손이 데일 것이란 것을 알기에 함부로 만지지는 못한 채 공기 위로 어루만지는 듯이 손을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에, 에스켈은 무슨 변태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어쩌면 이 시선이 라이얀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아닐까, 하며 다시금 혐오의 눈빛을 남자에게 쏘아 보냈다.

 

, , 굉장해, 분해할 수 있다면 분해해보고 싶군요! 하지만 이 귀한 마구를 뜯어볼 수는 없겠죠, 아니, 그 이전에 저같은 게 뜯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기밀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도도 해보지 못 할테죠! 아아, 오싹거립니다! 그런 애태우는 부분이 더 좋아요!”

 

저어기..”

 

에스켈은 몸을 배배꼬며 외치는 남자의 모습에 검의 위와 아래를 잡아 세워 골목의 벽에서 검이 닿지 않게 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그저 혐오의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끝낼게 아니라 진즉에 도망쳐야할 수준의 변태임을 그제야 조금 눈치를 챈 것이었다.

 

, .. 그렇게 가리지 마세요! 제게 더 보여 달란 말입니다! 저는 그 삐죽빼죽한 그 가시를 더욱더 보고 싶어요! 마력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당신의 흉한 몸뚱이가 아니라 말입니다!”

 

, 말이 심한 변태로군.”

 

에스켈은 자신의 턱을 쓸어 만지며 중얼거리곤 검을 붙잡고는 고개를 뒤로 빼 옆쪽의 샛길이 비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곤 곧이라도 달려들 듯 그 긴 몸을 숙이고 좀비처럼 걸어오기 시작한 남자를 피해 몸을 홱, 돌리곤 빈 골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아앗! 잠시 만요!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에스켈 T 딜라이트!”

 

에스켈은 성실하게 그의 요청에 답하며 골목을 빠져 달려갔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남자가 체력이 약한 듯 얼마 달려오지 못하고 무릎을 붙잡고 혀를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에스켈은 지체없이 내달려서 그대로 자신의 여관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벌컥 문을 열며 들어오는 에스켈의 모습에 그사이 선물을 사온 것인지 포장을 하며 침대 위에 앉아있던 라이얀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지만, 에스켈은 뒤늦은 불꽃을 풀어 문 가에 내려놓으며 안심한 듯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져 누웠다.

 

에스켈님, 귀족의 품위를..”

 

그게 문제가 아니야! 라이얀!”

 

당신은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요.”

 

라이얀은 소리를 지르기도 귀찮은 지 혀를 가볍게 차며 선물을 마저 포장하기 시작했다. 에스켈은 이렇게 주인에게 무관심한 가신이 어디 있나 싶은 얼굴로 라이얀을 바라보다, 이내 라이얀을 더욱 귀찮게 하기로 마음먹은 듯 몸을 일으켰다.

 

...........”

 

쓸데없는 강조는 그만두세요. 품위가 떨어집니다.”

 

라이얀은 포장지로 네모난 상자를 싸서 각을 잡으며 말했다. 에스켈은 그 모습에 라이얀의 옆으로 와 라이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다시금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쓸데없이 말을 늘이는 것도 그만두세요. 없던 품위가 더 떨어집니다.”

 

에스켈의 입술을 손으로 잡아채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라이얀이 말하자, 에스켈은 우부븝, 하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붉게 달아오른 입가를 쓸어만지며 눈물이 찔끔 난 눈으로 라이얀을 올려다보았다.

 

야아! 오다가 변태를 만났다니까!”

 

아아- 그러십니까.”

 

라이얀은 어이없는 소릴 한다는 듯 에스켈에게 헛웃음을 지으며 포장지를 리본으로 감쌌다. 에스켈은 그 반응에 욱한 듯이 라이얀이 싸고 있던 선물에 손을 뻗어 빼앗으려 했지만, 라이얀은 옆쪽에 놓인 작대기로 에스켈의 손등을 빠르게 후려쳤다.

 

아얏!”

 

에스켈이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감싸 쥐며 물러나자, 라이얀은 유려한 솜씨로 리본을 마무리하고, 선물을 자신의 침대 맡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막대기는 대체 왜 있는 건데!”

 

손등을 쓸어 만지며 에스켈이 버럭 소리치자, 라이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치며 말했다.

 

물론 에스켈님을 때리려고 있는 거죠.”

 

! 이젠 대놓고 말하는 구만!”

 

에스켈이 경계하듯 라이얀의 침대를 넘어가 라이얀과 거리를 벌리며 근접 격투술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서자, 라이얀은 에스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드라이어드의 수갑.”

 

아직 있었나!”

 

예의 잡초덩굴이 에스켈의 손목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양손을 봉쇄하자, 에스켈은 당황하면서도 자세를 풀지 않고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라이얀은 에스켈의 눈이 뒤늦은 불꽃을 향하는 것을 보곤, 포기하라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에스켈에게 다가갔다.

 

제가 언제 해제했던가요.”

 

라이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침대에 놓인 작대기를 집어 들었다. 에스켈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라이얀의 가차 없는 체벌에 그대로 노출될 뿐임을 깨닫고는 뒤늦은 불꽃과 변명, 그리고 사과의 말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생각하다, 애초의 원인을 떠올리곤 급히 입을 열었다.

 

그냥 변태가 아니라, 뒤늦은 불꽃을 상대로 한 변태야!”

 

,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십니까. 그건 무기물이라고요.”

 

라이얀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에 에스켈은 다급히 묶인 자신의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있다니까? 내가 병원을 다녀온 다음에, 남은 돈이 좀 있어서 술이나 한잔 할까, 아니. 그건 라이얀에게 들키니까 안 되지, 하고 그럼 노름장을 찾아볼까, 하고 골목을 걷는데..”

 

오호.. 술은 안 되지만 노름장은 된다.. 왜 제가 그런 곳의 냄새는 못 맡을 꺼라 생각하셨는지..”

 

에스켈의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한 서두에, 라이얀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어쩌면 주인은 바보 같음을 가장해 자신을 엿 먹이는 것이 취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라이얀이 물음을 던지자, 에스켈은 하하, 하고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노름장에는 담배냄새정도만 나잖아. 그 정도쯤은 처리할 수 있다고.”

 

아아.. 그렇습니까. 일단 좀 맞을까요.”

 

라이얀이 다시금 막대기를 들어 올리자, 에스켈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결과적으론 안 갔으니까 세이프잖아!”

 

전 아웃인데요.”

 

라이얀이 에스켈의 머리를 막대기로 탁, 내리치자, 에스켈은 그 화끈한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슨 말로 훈계를 해야 할지 말을 고르며 막대기로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는 라이얀을 올려다보며, 에스켈은 화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만지며 절로 공손해진 허리를 다시 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거든..”

 

, 그랬습니까. 제가 더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에스켈님.”

 

물론이지!”

 

말투만 공손한 시종에게 에스켈은 괜스레 더욱 어깨를 펴며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그런 골목이면 한둘쯤 있잖아? 불량배라던가?”

 

, . 모험소설의 작가들이 분량은 확보하고 싶고 그렇다고 아이디어는 없을 때 흔히 사용하는 소재 아닙니까.”

 

라이얀의 어쩐지 신랄하기까지 한 말투에 에스켈은 괜히 자신이 그런 흔한 모험소설의 작가라도 된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하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불량배들이 내가 나가려는 골목의 한편에서 키가 멀대 같이 큰 남자를 둘러싸고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겠어? 나 에스켈 T 딜라이트, 기사된 자로 그런 불의는 못 참지! 벽을 탕, 치면서 뒤돌아 뒤늦은 불꽃을 보이며 말했지! 볼일 들 보시라고!”

 

에스켈은 흥분된 목소리로 뒤늦은 불꽃을 꺼내서 휘두르기라도 하듯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것은 마치 에스켈이 기사된 도리로 불의를 못 참고 불한당들을 물리쳤다는 듯한 말로 느껴졌기에, 라이얀은 에스켈의 말을 얼핏 듣고는 에스켈이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가, 곧 이어 이야기를 곱씹어보고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에스켈님다운 행동이군요.”

 

에스켈은 라이얀의 침착한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이제 가려는데, 이게 양 벽에 꽉 끼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야. 이를 어째, 하고 낑낑대는데, 불한당들이 그게 불쌍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 다들 사라져버리곤, 어느새 그 멀대같이 큰 남자가 다가오대? 그런데..”

 

호오.. 그래서 감사인사라도 받으셨다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그렇게 장황하게 하실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지?”

 

라이얀은 계속해서 말하려는 에스켈의 말을 잘라먹고는 관심을 잃었다는 듯이 자신의 침대에 앉으려는 에스켈을 옆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에스켈은 라이얀에게 밀려 비틀대며 라이얀을 불만스레 바라보다, 침대의 모서리에 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부터 끝까지 들으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있어? 잠자코 들어보라고, .”

 

에스켈은 그렇게 말하며 뒤늦은 불꽃을 불러, 날아오는 그 것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채 무릎 위에 놓으며 말했다.

 

그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 걸보고는 막,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변태처럼 품평을 해대다가, 가져가려는 것처럼 손으로 만지고 핥고.. 아니, 핥지는 않았나. 여하튼 그랬다니까? , 예전에 있었잖아? 마구 사냥꾼 같은 놈들. 그녀석도 그런 놈 아닐까?”

 

에스켈은 뒤늦은 불꽃을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라이얀은 선물의 포장이 잘 되었는지 검수하듯 이리저리 살펴보다, 뭘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이 어이없이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에스켈님, A급 마구의 소유자이자, 딜라이트가의 차남, 그리고 기사이신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기사라면 자기 물건정도는 스스로 지키실 줄 아셔야지요.”

 

기사라고 해도, A급 마구라고 해도, 기습에는 약하다고. 이름을 물어보길래 이름도 말하고 왔는걸. 찾아오면 어떡하지?”

 

고민스레 뒤늦은 불꽃을 쓸어 만지며 에스켈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라이얀은 선물의 포장이 완벽하다고 판단했는지 선물을 내려놓고는, 책상으로 가 가문명과 에스켈의 이름을 기입한 카드를 적으려다 문 듯 행동을 멈추며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름을 물어보길래, 이름을 가르쳐 줬다고. 갑자기 찾아오면 인사는 어떻게 해야하지?”

 

에스켈의 말에 라이얀은 머리 끝이 저릿해지는 두통을 느끼며 책상을 짚었다.

 

저 자식은 정말 백치인가.’

 

라이얀은 에스켈의 그 멍청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아파오는 머리를 푹 숙였다. 에스켈에 대한 오만가지 욕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일단은 그는 자신의 주인이고, 동시에 자신은 그의 교육담당이었다. 10여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를 보필하며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의 뒤처리-를 계속해왔던 라이얀이었기에,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라이얀은 자신을 쫓아오는 에스켈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여행가방으로 가 안에서 흰색의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당분, 당분으로 이 짜증을 해소하는 거야..’

 

라이얀은 짜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주머니의 입구를 끌러내었다. 에스켈은 그런 라이얀을 빤히 보다가, 라이얀의 옆으로 슬쩍 다가오며 주머니 안을 바라보았다.

 

아직 남았어? 어제 너 잘 때 출출해서 좀 꺼내 먹었는데.”

 

제 간식주머니를 멋대로 뒤지셨다고요?”

 

라이얀은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에스켈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머니의 안은 까먹고 남은 과자나 초콜릿의 잔해가 잔뜩 남아있을 뿐이었다. 라이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스켈과 주머니 안을 번갈아 보다가, 곧 주머니의 바닥부분을 잡아 주머니를 거꾸로 털어내었다. 하지만 나풀나풀 떨어지는 그 많은 빈껍데기들에서는 어디도 내용물이 든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 고작 이틀이라고요? 이 주머니가 빵빵할 정도로 사놓고, 저는 손도 못 댔었단 말입니다?”

 

라이얀은 허망한 얼굴로 쌓여진 껍데기들의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켈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곤 하나도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랬구나.”

 

미안함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에스켈의 말에, 라이얀은 에스켈을 멍하니 올려보다,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당분으로 당장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머리끝까지 차오른 이 풀릴 길 없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가. 라이얀은 눈앞의 악마-라이얀-, 쌓여진 간식-이라는 이름의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이내 명쾌한 해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샐리맨더의 한숨!”

 

에스켈은 이내 화려한 폭음과 함께 창문 밖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신고

 
[여름이야기(가제)] 2 (0) 2018/11/27 PM 03:18

에스켈에게는 오래 전 아버지에게서 받은 마구(魔具)가 있었다. ‘뒤늦은 불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것은 마구의 강함을 정하는 5단계의 기준에서 당당히 A등급의 판정을 받은 물건으로, 등급이 높을수록 희귀한 마구의 세계에서도 매우 희귀한 물건이었다.

여러 개의 파편이 달라붙은 듯한 대검의 모습을 한 그것은 그대로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모습은 주인이 시동어인 뒤늦은 불꽃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나타난다. 하나의 세검과 가벼운 무장의 몸 전체를 가리는 가시 갑옷의 형태로 주인의 모습을 뒤덮은 형태로 변화한 뒤늦은 불꽃, 그 이름대로 주인의 행동의 궤적을 따라 한 발짝 늦은 불꽃을 뿜어내며 주인의 신체능력을 향상시키고, 몸을 보호한다.

이 물건은 본디 딜라이트가의 보물이 아니었고 모스가의 가보로 전해지던 물건이었다. 뛰어난 무장의 핏줄로 불리던 명문이었던 모스가였지만, 전쟁이 없는 시대와 융퉁성없는 가산의 운용으로 가문은 서서히 몰락해갔고, 라이얀이 태어날 무렵에는 귀족의 이름을 가진 빈민에 가까운 형편이었다. 이를 비관한 부친은 자살, 모친은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의 어려움에 어린 모스를 딜라이트가에 팔다시피 맡겼고, 딜라이트가의 당주, 로널드는 아이를 맡아주고, 귀족으로써 금전적인 모자람 없는 생활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모스가의 가보인 뒤늦은 불꽃을 양도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이 이어져온 경위를 알고 있음에도, 에스켈 T 딜라이트는 오늘도 스스럼없이 라이얀의 앞에서 그 물건을 사용하고 있었다.

 

뒤늦은 불꽃!”

 

그것도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노움의 장난!”

 

그를 도발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어푹!”

 

땅을 기는 에벌레처럼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에스켈을 말을 타고 쫓아오며, 라이얀은 오늘도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시가 잔뜩 돋아난 형태의 갑옷의 덩어리가 바닥을 기는 것은 얼핏 보면 거대한 돈벌레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하였기에, 라이얀의 표정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에스켈은 주인을 보는 눈이 주인을 보는 눈 같지 않다는 것이 영 불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입을 열어 자신에게 미칠 해악을 더욱 늘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았다는 것이 10년 전에 비하면 발전한 점이었다.

 

대체 왜 저만 보면 도망치려는 겁니까. 아침부터 성가시게 굴지 좀 마십시오. 수행원을 떼어놓고 가려는 주인이 대체 세상천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있네..”

 

에스켈은 겨우 편한 자세로 몸을 돌리고 누워 뒤늦은 불꽃을 해제시켰다. 그의 몸을 둘러싼 가시의 파편들이 그의 오른손에 들린 세검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여들어 하나의 대검이 되는 것을 빤히 지켜보다가, 모스는 말에서 내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안되겠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당분간 이 것은 제가 관리하도록 하죠.”

 

, .. , 잠시만? 모스군.”

 

늘 부르시던 것처럼 라이얀이라고 부르시죠, 에스켈님.”

 

라이얀은 차갑게 말하며 대검을 등 뒤로 빗겨 매었다. 에스켈은 갑작스런 압수사태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다, 몸을 꿈틀대며 마법의 범위 밖으로 미끄러지듯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의 품위!”

 

말에 오르기 위해 등자에 발을 걸던 모스는 뱀이 기어오는 듯한 기묘한 소리에 에스켈을 향해 눈을 돌렸다가 그 아연실색할 모습에 기함을 하며 외쳤다.

 

기사의 품위는 곧 검이라고!”

 

울 듯한 얼굴로 외치며 기어오는 에스켈의 모습이 모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말안장에 머리를 꾸욱 누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예전부터 에스켈은 그랬다.

 

딜라이트가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여섯 대공가 중 하나이면서도 저주에 걸린 듯 구성원의 운명은 기이했다. 대부분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고, 에스켈의 어머니와 그의 위의 형제 둘 또한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덕분에 에스켈의 아버지 로널드와 그의 형인 펠릭스는 죽은 가족들의 대신이라도 되듯 에스켈을 애지중지 키워왔던 것이다. 그 덕분에 에스켈 T 딜라이트는 손이 많이가는 응석받이로 훌륭히 성장했고, 라이얀이 에스켈의 시종이 된 이후에는 라이얀이 그 모든 응석의 뒤처리를 감당해왔던 것이었다.

 

그런.. 비굴.. 아니, 추한 모습을 보여도 검은 압수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압수에요!”

 

라이얀은 에스켈의 교육담당이기도 했기에, 로널드가 보면 안색이 파리해질 정도의 추태를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는 머리와 위를 부여잡으며, 라이얀은 그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의 추태를 벌이며 마법의 범위를 빠져나온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에스켈은 마법 덕에 옷에 먼지 한톨 묻지 않은 것이 신기한 지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라이얀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곤 자신의 형이나 아버지에게 하듯 애교를 담은 목소리로 눈을 찡긋, 하며 라이얀에게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모스군-”

 

그 토할 것 같은 목소리도 자중해 주십시오, 에스켈님.”

 

라이얀은 파리해진 얼굴로 입을 가린 채 뒤로 물러나 이런 애교를 허허 웃으며 받아주는 딜라이트가의 남성들을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 애교가 자신한테 먹히지 않는 것을 모른 채 10여년 가까기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에스켈의 징그러운 모습을 계속 봐주기는 힘들었기에, 라이얀은 서둘러 말 위에 올랐다.

 

에스켈님, 이런 길바닥에서 낭비할 시간은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검만 돌려주며..”

 

공기 정령의 화살.”

 

결국엔 참지 못한 라이얀이 에스켈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영창을 하며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무형의 화살이 맺히듯 형성되어 에스켈에게 날아들었다.

 

와악!”

 

에스켈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자, 애초에 그의 몸을 향해 조준되었던 마법이 그대로 에스켈의 머리에 직격했다. ,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에스켈은 긴 비명을 지르며 땅을 나뒹굴었고, 이윽고 죽은 듯이 축 늘어졌다. 라이얀은 그 일련의 상황을 처음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점차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감정의 방향을 조정해, 이내 침착한(차거운) 얼굴로 에스켈을 내려 보았다.

 

에스켈님, 에스켈님은 혹시 장래 직업을 공갈협박범으로 잡고 있으신 건지?”

 

라이얀의 차가운 목소리에 에스켈은 살짝 몸을 움찔, 떨었지만 여전히 땅 위에 드러누운 그대로 였다. 라이얀은 그런 에스켈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차고는 발의 배를 가볍게 차며 고삐를 쥐었다.

 

먼저 갑니다.”

 

라이얀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쓴 마법의 유래에 있었다. 본디 공기정령의 화살이란 마법은 마법사의 탑에서 말 안 듣는 제자를 어떻게든 체벌은 하고 싶지만 마법사의 체면에 물리공격이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한 마법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마법이었다.

마력을 얼마나 싣는가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 되는 이 마법은 그 은밀성과 높은 마력효용성에 이제 와서는 마법사들의 기본적인 공격수단으로 쓰이지만, 라이얀이 사용한 것은 분필을 던져 맞추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라이얀이 침착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에스켈의 질릴 줄 모르는 발연기의 퍼레이드 덕분이었다. 머리가 맞는 순간에서부터 몇초 늦게 시작된 비명이나, 쓸데없이 장렬한 비명과 헤드뱅잉, 그리고 트레뷸셋에 맞기라도 한 듯한 긴 비행거리를 지닌 몸 던지기까지. 마지막의 꿈틀거림에 와서는 방금 전의 벌레 같았던 에스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라, 라이얀은 속으로 걱정한 자신의 바보 같음을 한탄할 지경이었다.

 

, 라이얀, 라이얀! 같이 가자고!”

 

“2(1=성인 한 사람이 시야가 닿는 곳까지의 길이, 상인들이 편한대로 쓰던 것이 이제는 도량법의 기준으로 자리 잡혔다.) 정도 뒤에서 봅시다.”

 

아 잠깐 기다리라니까!”

 

따라붙는 다급한 에스켈의 발소리에 라이얀은 오히려 말을 재촉하듯 고삐를 흔들며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에스켈도 일단은 서임을 받을 기사이니 만큼 어느정도의 각력이 단련되어 있기는 했고, 라이얀 또한 겉으로는 냉정한 척했지만 어느 정도는 봐주며 말을 몰아준 덕에, 에스켈은 금세 라이얀을 쫓아와 말꼬리를 붙잡았다.

 

라이얀~ 미안해..”

 

사과의 말을 하며 말꼬리를 잡아당기는 에스켈의 목소리에 라이얀은 이제 슬슬 조금 풀어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가, 에스켈의 손이 닿아있는 곳을 보고 다시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의 주인이 여러 가지 상황에 있어 문외한에 가깝다곤 해도, 기사 서임을 받은-그 서임이 비록 아버지의 주선과 뇌물에 있었다해도-한사람의 기사였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일이 잦은 기사들에 있어, ‘말의 뒤라는 위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말의 꼬리를 잡아당기는 행위는 말에게 있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 것인지에 대한 것은 기본 상식과 같은 것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지할 줄이야.’

 

경악에 가까운 라이얀의 표정이 지어진 것과, 말의 뒷발굽이 뻗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에스켈의 몸은 과장 하나 없이 붕 떠서 날아갔고, 라이얀은 걱정을 먼저 할지 환멸을 먼저 할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나가떨어진 에스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말발굽에 차여 날아간 주인의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어린애나 할 법한 그 어리석은 행위에 라이얀의 머릿속은 이 멍청이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에스켈님은 마구간에만 가면 유독 말꼬리에 집착하셨지. 그때에야 사용인들이 잘 막아주었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마구간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흙투성이가 되곤 하셨었어. 정말 별 수 없는 바보라니까..’

 

라이얀은 후후.. 하고 작게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하다, 곧 들려온 에스켈의 작은 신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에스켈님!”

 

아야야야..”

 

한심한 목소리를 내며 팔을 부여잡고 일어나는 에스켈의 모습에 라이얀은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에스켈을 부축하듯 붙잡아주었다.

 

기사라는 사람이 말 뒤가 위험한 것도 모르십니까! 말꼬리를 그렇게 잡아당기면 말이 화를 낸다는 것도 아셨어야죠!”

 

걱정과 염려, 그리고 동시에 약간의 분노가 깃든 라이얀의 목소리에, 에스켈은 말발굽에 채인 것인지 부어오른 팔을 매만지며 하하, 하고 작게 웃고는 이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하지만 말꼬리는 보면 만지고 싶잖아!”

 

알면 하지 말라고요!”

 

에스켈의 의기양양한, 반성 없는 목소리에 라이얀은 기어코 에스켈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거세게 후려치며 외쳤다. 그 탓에 고개가 앞으로 크게 숙여진 에스켈은 균형을 잃고 앞쪽으로 넘어질 뻔하다, 겨우 자세를 다시 잡으며 일어나 라이얀을 돌아보며 외쳤다.

 

포니테일이 뭐가 나빠! 포니테일을 했을 때 보이는 그 유려한 목선이 나는 좋다고!”

 

말궁둥이 어디에 목선이 있단 거야!”

 

라이얀은 다시금 에스켈의 머리를 수도로 내려치곤 뒤늦은 불꽃을 던지듯 에스켈에게 건네었다.

 

이걸로 일단은 다친 부분만 감싸두세요!”

 

에스켈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눈물을 찔끔 흘리다 이내 다시 돌아온 뒤늦은 불꽃을 보고는 그것은 일부만 전개해 팔을 감싸며 버럭 소리쳤다.

 

고맙다!”

 

소리는 그만 치고!”

 

라이얀은 다시금 에스켈의 머리에 타격을 가하려다, 그가 자신의 주인임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며 손을 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되돌려드린 대신, 앞으로 이런 바보 같은 짓도, 상황도 더는 겪고 싶지 않으니, 제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라이얀은 그렇게 말하며 길가의 길게 자란 잡초 몇 개를 뜯어내어 고리처럼 엮어선 에스켈의 양 손목에 묶었다. 그리곤 에스켈의 양 손목을 잡고는 몇 마디의 영창을 중얼거렸다.

 

드라이어드의 수갑.”

 

라이얀의 마력이 에스켈의 손목을 감은 잡초 고리에 스며들자, 잡초는 덩굴처럼 굵고 튼튼하게 자라나더니, 이내 에스켈의 양 손목에 길게 이어진 수갑처럼 변화했다. 에스켈은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 과정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이 지금 당한 처사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한 눈으로 라이얀을 바라보았다.

 

라이얀.. 이게 뭐하는 짓이야..?”

 

, 보시다시피, 더 이상 에스켈님의 만행들을 참아드릴 생각이 없기에, 에스켈님을 구속한 것뿐입니다. , 얼른 말에 타시죠. 이 길바닥에서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은 건지 정말. 내일 중에는 루셔가에 도착해야한다는 자각이 없으신 겁니까?”

 

라이얀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투덜대며 에스켈의 수갑을 잡아끌었다. 에스켈은 어벙벙한 얼굴로 라이얀의 손길을 따라 말에 끌어올려졌고, 후송당하는 죄인 같은 모습으로 라이얀의 등 뒤에 매달려 루셔가로 가는 마지막 여로에 올랐다.

신고

 
[여름이야기(가제)] 1 (0) 2018/11/27 PM 03:13

친애하는 내 동생, 에스켈,

계절이 벌써 여름으로 변해가, 초목이 무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야.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버지의 강요를 못 이겨 네가 변방의 경비대장으로 발령을 간지도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간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장난꾸러기인 모양이더구나. 아버지께서 그곳으로 당장 내려가신 다는 것을 말리느라 진땀 뺐단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말씀을 드리고 있으니 이 곳의 문제는 걱정 말거라. 아버지께서도 실은 너를 매우 아끼시고 있다는 걸 네가 잘 알고, 네 스스로의 일은 잘 처신하리라 믿는다.

그건 그렇고, 요즘 수도에서는 네가 없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단다..

(중략)

..근황에 대한 보고는 이정도만 해두고, 이번에 편지를 보낸 이유는 근방의 유지, 루셔 백작 영애의 생일파티에 관한 건 때문이란다. 최근에는 일이 바빠 아버지도 나도 그런 곳까지 내려갈 여력이 안 되어서, 미안한 얘기지만 네가 딜라이트가의 대표로 인사를 드리고 와줬으면 고맙겠다.

강제할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께서는 이 것으로 네 능력을 보고, 자칫하면 지원을 끊어버리겠다 으름장을 놓으셨단다. 비단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해도 루셔가에는 이전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고, 너도 안면을 익혀둬 나쁠 일은 없다고 나 또한 생각한단다. 그리 크지 않은 파티라곤 해도 사교계에 얼굴을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 부디 무례를 끼치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오렴.

그럼 내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다. 편지가 길어졌으니 이만 줄이마. 다음에는 언제 한번 수도로 올라와 식사도 하고 얼굴도 봤으면 좋겠구나. 가까운 시일 내에 말이야.

 

p.s.

1. , 참고로 루셔가 영애의 생일은 귀부인의 달, 스물하고 엿새째란다. 이 편지가 귀부인의 달 스무 번째 날 적혔으니, 편지가 도착할 즈음이면 사나흘정도의 시간이 있겠구나.

2. 루셔가에는 멋진 호수가 있다더구나. 네가 꼭 보고 형에게 말해주렴.

3. 그리고 그곳에는 민물고기가 맛있다더구나. 파티를 한다면 반드시 테이블에 올라오겠지. 먹는 것을 좋아하는 너이기에, 이런 정보도 귀하다 여겨 여기에 첨한다. 이제 정말 끝이 야. 형의 말이 길다고 너무 싫어하진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너를 아끼는 형, 펠릭스 W 딜라이트가.

라일락이 지는 계절의 초입에서.

 

, 이런..”

 

서너쪽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다 읽고난 에스켈은 작게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쩌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편지를 매만지던 에스켈은 편지를 다시금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수도의 소식이나, 꾹꾹 눌러쓴 정성어린 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야 반가웠지만, 형의 편지에 적힌 요청은 반가운 얘기가 아니었다.

 

아아.. 루셔가라..”

 

에스켈은 작게 한숨을 쉬며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달력을 집어 들었다. 펠릭스의 편지에 의하면 편지가 보내진 것이 20, 그리고 도착한 것이 전날이었던 24일 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켈이 괜한 변덕으로 경비대장을 때려치운 탓에 편지의 배송이 늦어졌고, 결과적으로 삼일도 채 남지 않은 오늘이 돼서야 편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에스켈은 여러 가지 후회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머리카락들을 쥐었다.

 

며칠만 더 늦게 때려치울걸..”

 

에스켈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이내 은화주머니를 뒤적여 여행 경비를 확인했다. 절걱거리는 은화들이 손 안에서 촤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묵직한 은화주머니는 ‘(낙하산이었던 경비대장이었지만)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라고, 아버님께 잘 말해 달라는 말과 함께 상관에게 받은 뇌물 섞인 금품이었다.

평범한 모험가가 혼자서 여행을 하기에는 1년도 충분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귀족의 파티에 참여하려면 그에 걸맞은 격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파티에서 입을 격식 있는 옷과 늘씬한 말, 그리고 얼굴도 모를 백작영애의 취향에 걸맞을 법한 화려한 선물을 산다 치면, 그 다음의 여행지는 노발대발하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뿐이었다.

에스켈에게 이런 식의 귀환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긴 도주여행을 준비하며 (평민 모험가의 기분도 느낄 겸) 차근차근 모아온 돈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에스켈에게 조금 서글픈 기분을 안겨주었다.

 

잘 가라, 내 귀여운 반짝이들아.’

 

에스켈은 부러 소리가 나게끔 동전들을 손사이로 미끄러뜨리다가, 돈주머니를 꽉 조여 매곤 허리에 걸었다. , 선물, 말과 남은 기간 생각하면 루셔가로 향하는 여행은 절약하면서도 서둘러야만 했다.

 

일단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켈이 짐 가방을 챙겨들고 자신의 여관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에스켈님?”

 

열리는 문 틈으로 뱀처럼 휘감겨 들어온 손과 목소리에, 에스켈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도로 잡아당기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문은 단단히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에스켈은 문은 포기한 채 황급히 문고리를 놓고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 라이얀, 창문 값은 자네가 내..”

 

“-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켈님.”

 

목덜미를 낚아챈 손길과 동시에 차가운 목소리가 목 뒤를 간질이듯 가깝게 붙어 들려오자, 에스켈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누르고, 억지 웃음을 지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하.. 그렇겠지..?”

 

에스켈의 목덜미를 잡아 챈 자는 금발의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낸 푸른 눈의 청년으로, 이름은 라이얀 D 모스. 에스켈의 최측근이며 그의 시종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가의 장손으로 팔리듯 딜라이트가에 들어온 그는 10여년이 넘는 긴 시간을 에스켈과 함께 해온 절친한 친우이며, 동시에 에스켈의 전담 감시자이기도 했다. 덕분에 에스켈이 사고를 칠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혼내 키는 것은 그의 주 책무이기도 했다. , 지금의 에스켈이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가명까지 써가면서 숙소에서 가장 먼 여관을 잡았는데..’

 

그를 피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찬바람을 마시며 한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데에 대한 서글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지그시 감는 에스켈의 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놓으며, 라이얀은 테이블에 있는 의자를 발로 끌어와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곤 흥분을 가라앉히듯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며 심호흡을 한 라이얀은 친애하는 주인을 대하는 친절한 시종의 모습으로 에스켈에게 미소를 지었다. 다분히 안심을 시키려는 미소였지만 에스켈의 눈에는 그것이 요놈을 어떻게 요리해줄까 고민하는 쉐프의 모습으로 보였고, 라이얀은 그 걱정을 종식시킬 생각이 없는 듯 지체 없이 품속의 새하얀 종이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끄집어냈다.

 

이 쪽지, 기억하시지요. 직접 쓰셨으니까요?”

 

아아.. 그 추천서..를 왜 자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눅이 들어 라이얀을 바라보는 모습에는 주인 되는 자의 위엄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라이얀은 그 모습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추천서라 불린 그 종이를 펼쳐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시장님, 경비대장 에스켈 T 딜라이트입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군요. 어제 시장에 갔는데 좋은 경비대장감이 있기에 이렇게 추천해드립니다. 좋은 날 되십시오, 이만.”

 

냉랭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목소리는 감정을 죽이려는 낌새가 느껴졌지만, 오랜 시간 그를 알아온 에스켈이 아니더라도 모습의 표정에 드러난 깊은 짜증은 가릴 수가 없었다. 라이얀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듯이 몇 번이고 그 추천서를 훑어보고는 그것을 꾸깃꾸깃 뭉쳐 방바닥에 내던졌다.

 

왕립학교 초등부가, 아니 유아부가 적어도 이보단 나을 겁니다!”

 

, 그 정도까지는 아니..”

 

“-지 않다고요!”

 

라이얀이 내던진 추천서였던 종이덩이를 발로 짓밟으며 외치자, 에스켈은 찔끔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 어느새 자신이 창문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순간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만큼 창문이 가깝다면 아무리 라이얀이 반응이 좋다고 해도 자신을 잡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에스켈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슬금슬금 창문 쪽으로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 너무하네, 라이얀! , 나는 상처받았다고?”

 

다 보입니다, 에스켈님.”

 

라이얀은 뻔히 보이는 연극 투의 말투와 어색한 표정, 행동에 에스켈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에스켈은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라이얀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행동을 이어가며 창문에 손을 짚었다.

 

, 나는! 상처받았다고오!”

 

그리곤 크게 외치며 창문을 어깨로 들이박아 창문을 깨부수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에스켈을 보며, 라이얀은 편지를 읽고 난 직후처럼 깊은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니까.. 보인다고 했는데.. 창문은 왜 깨냐고..”

 

라이얀은 짜증을 눌러 담듯이 중얼거리며 손을 창문을 향해 뻗고는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노움의 장난.”

 

라이얀의 영창과 동시에 창밖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얀은 천천히 창문가로 걸어가 깨진 창문을 팔꿈치로 마저 치워내곤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연신 몸을 꿈틀대며 일으키려는 에스켈이 보였다.

 

, 우왓, 뭐야, 뭔데 이건!”

 

라이얀은 마구를 전개한 건지 그사이 전신에 경갑을 두른 형태로 바뀐 에스켈을 내려 보다, 천천히 창가에서 멀어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에스켈은 자신의 마구 뒤늦은 불꽃의 힘을 빌어 몸을 일으키려 이리저리 애쓰다가, 움직임의 뒤에 이어지는 뒤늦은 불꽃에 자꾸만 몸이 데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추하시군요, 에스켈님.”

 

차가운 목소리로 라이얀은 기름통이 엎어진 땅 위를 구르듯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있는 에스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스켈은 그제야 이 기묘한 현상의 원인이 라이얀이란 것을 깨달은 건지 자신의 전신을 뒤덮은 경갑을 해제하며 포기한 듯 땅 위에 드러누웠다. 작게 숨을 헐떡이는 에스켈의 몸 위로 파편처럼 나뉜 경갑이 모여들어 대검이 되어 떨어지자, 라이얀은 작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노움의 장난, 땅 위에 노움들이 기름을 뿌린 듯이 미끄러워지는 하급의 마법입니다, 에스켈님.”

 

.. 설명.. 참 고맙다..”

 

에스켈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짓누르는 마구를 옆으로 밀어 떨어뜨리곤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금 미끄러져 바닥에 코를 박았다. ,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코를 쥔 에스켈은 왜 아직도 마법을 해제 안한 거냐는 듯이 원망의 눈초리를 라이얀에게 보냈다. 라이얀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창문 값은 에스켈님의 월급으로 내세요.”

 

한참을 물끄러미 대검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얀이 여전히 시선을 거기에 둔 채 입을 열었다. 에스켈은 코피는 나지 않는지 코를 매만지며 확인하다, 라이얀의 말에 고개를 살짝 뒤로 꺾어들며 말했다.

 

.. 얼만데?”

 

은화 하나정도 라던데요.”

 

돌아온 라이얀의 답에 에스켈은 무슨 창문이 그리 비싸냐며 항의를 하려다가, 자신이 귀족 도련님이라 그런 시세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턱을 쓸어 만지며 수긍했다. 에스켈의 생각에, 귀족이란 이런 사사로운 것에 언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었고, 이럴 때 시원스레 지갑을 여는 것이 귀족의 품위라는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것이 멋진 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고, 귀족의 품위란 그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지만 비뚤어진 교육관을 지닌 아버지와 그를 싸고도는 형의 사이에서 자란 에스켈의 가정교육 수준은 불행히도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한 편이었다.

 

좋아, 까짓것, 내면 되지.”

 

에스켈은 최대한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화주머니를 열려다 다시금 옆으로 미끄러져 넘어지곤, 다시 코를 쥐며 라이얀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얀.. 이거..”

 

, 그거요. 시간제한이 있는 마법이라 못 풉니다만.”

 

라이얀은 코를 쥐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스켈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 추천서나 창문을 깨고 도망치려한 보복으로 이런 마법을 건 것이리라, 그리 짐작하며 에스켈은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라이얀에게 승리감을 덧붙여줄 뿐이었다. 조금 얄미울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라이얀을 분한 듯 올려다보다, 에스켈은 허리춤의 은화주머니를 라이얀에게 밀듯이 던지고는 다시금 바닥에 납죽 엎드려버렸다.

 

그걸로 볶든 지지든 마음대로 해!”

 

, 그럼 이걸로 볶든 지지든.. .”

 

라이얀은 은화주머니를 집어 올리며 그 묵직함에 제법 놀란 듯 작게 탄성을 지르곤 자신의 허리춤에 은화주머니를 갈무리 했다. 그리곤 여관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라이얀을 보며 에스켈은 자신의 손을 떠나간 빛나는 짤랑이들에게 애도를 표하다, 순간 품 속에 갈무리한 편지를 떠올리며 라이얀에게 손을 뻗었다.

 

, ! 잠시만! 라이얀! 라이얀!”

 

? 아직도 미련이 남으셨습니까? 에스켈님, 창문 값을 지불하고 난 뒤 남은 돈은 금전 감각이 없는 에스켈님을 대신해 제가 관리할테니..”

 

에스켈의 절박한 목소리에 라이얀은 안심하라는 듯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에스켈의 부름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기에, 에스켈은 이리저리 미끄러지면서도 손사레를 치며 편지를 품속에서 꺼내 라이얀에게 내밀었다.

 

, , 아니라.. , 이 마법 짜증나!”

 

에스켈님, 귀족으로의 체면을 생각해서 짜증이 나더라도 속이 끓는구나. 정도로 말씀하셔야죠.”

 

그게 왜 귀족의 체면이랑 상관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보라고!”

 

지적하듯 말하는 라이얀에게 에스켈이 답답하단 듯이 편지를 내밀자, 라이얀은 의아한 눈으로 에스켈의 손끝을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와 편지를 받아들었다.

 

이 편지는.. 딜라이트가의 인장이군요.”

 

편지를 봉했던 밀랍을 보며 중얼거린 라이얀은 잠시 편지를 봉투째로 앞뒤로 살펴보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명문가인 딜라이트가로 오는 편지 중에는 간혹 가문을 질투해 편지류 안에 독을 숨겨 암살을 꾀하는 사례도 있었기에, 사역인으로써 몸에 익은 습관 중 하나였다.

 

펠릭스님의 필체는 확실하군요. 그리고.. .. 흠흠.. 그렇습니까.”

 

라이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필적 검사라도 하듯 꼼꼼히 편지를 살펴보곤, 이내 납득했다는 듯 편지를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26일까지는 루셔가에 도착해야한다..”

 

, 그러니까 그 돈은 다 쓰면 안 돼.”

 

? 잠시만요. 오늘이 분명.. 24일 아니었습니까?”

 

라이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에스켈에게 묻자, 에스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 그러니까 그 돈은 다 쓰면 안 된다고.”

 

아니, 그 전에.. 루셔가면.. 말로 3일은 달려야 하는 곳 아닙니까!”

 

좋은 말이면 이틀 안엔 가.”

 

에스켈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라이얀은 기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에스켈을 바라보았다.

 

그건 말을 쉬지 않고 달렸을 때겠지요! 말을 죽일 셈입니까? 좋은 말이라도 이틀 내에는 무리에요!”

 

현실을 좀 아시죠, 이 답답이야! 라이얀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되삼키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가 천천히 손을 풀어내었다.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지,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지는 지난 10여년을 함께하며 잘 알게 되었기에, 굳이 그를 질책하며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말을 빌리도록 하죠.. 길 도중에 작은 마을이나.. 역참이 있는지도 확인해보죠. 밥 먹을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달리면.. 어떻게든 되겠죠..”

 

라이얀은 화를 내보내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해제했다. 라이얀이 마법을 해제한 것은 눈치 채지 못한 듯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에스켈의 모습에 라이얀은 거짓말을 둘러대지 않아도 좋은 주인의 멍청함에 감사하며 역참으로 발을 옮겼다.

신고

 
현재페이지1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