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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게임중독법 이야기: 생각보다 오래된 중독유발 물질의 역사 (4) 2013/11/27 AM 01:43
게임, 좋아하세요?

누군가 저렇게 묻는다면, 저는 대답할 겁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라고 말이죠. 쓸데없이 덧붙인다면, 지금까지 게임을 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별다른 일이 없다면 죽는 날까지(!?) 게임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하면, 좋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볼지도 모르죠. 이른바 '게이머'라는 딱지가, 한국 사회에서 결코 반짝이는 칭호였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분하지만, 이곳에서 그동안 게임은 저열한 문화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휴, 그래도 나름대로 견디면서 꾸역꾸역 해왔습니다. 쓸데없는 기계에 돈을 낭비하고, 더 쓸데없는 소프트를 결제하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컨트롤러를 움켜쥐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왔습니다. 어쨌건 이런저런 눈총을 견디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하다하다 이제 국가가 저에게 새로운 명칭을 하사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내요. '게임중독자'라고 말이죠. 네, 그래서 저도 이른바 '게임중독법'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뉴스도 많고 훌륭한 분석도 이미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조금, 아니 꽤 옛날로 빙 둘러갈까 해요. 그러니까, 조선시대입니다. 역시 좀 깁니다.

<<전등신화>>는 놀라우리만큼 저속하고 외설적인 책인데도 교서관이 재료를 사사로이 지급하여 각판(刻版)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들은 모두 이를 마음 아파합니다. 그 판본을 제거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반 여염 사이에서는 다투어 서로 인쇄하여 보고 있으며 그 내용에는 남녀의 음행(淫行)과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괴상하고 신기한 말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는 괴상하고 탄망(誕妄)함이 이와 같은데도 인출(印出)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선조 2년 6월 20일

무려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인용한 대목은 성리학자 기대승의 말입니다. 왕, 그러니까 선조가 "삼국지연의랑 정사랑 좀 다르던데?"라고 말하자 거기 대답한 것입니다. 꽤나 돌직구죠. 풀어 요약하자면, '전하, 삼국지연의는 무식한 놈들이 쓰고 인쇄한 것이므로 읽지 마소서. (계속 읽으면 너님도 무식함 인증임)', 이정도가 되겠죠.

비난을 위해 저속, 외설, 음행, 괴상 등등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 삼국지연의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전등신화>>는 상당한 고전입니다. 즉 저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백과사전에서 검색해보면,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이야기가 많으며, 문체도 화려하다"라고 하네요. 아무튼 중국과 한국 고전문학사에서 중요한 책이라고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볼까요. 지금 누군가 공원 벤치에 앉아 '삼국지'를 읽고 있는데 가서 "읽지 마세요. 그건 유해도서입니다. 괴상한 소설이라구요"라고 지적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무식한 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겁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이야기가 조금 지루해집니다만, 조금만 참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도 가능한 짧게 대강 말할게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읽고 있는 소설은, 사실 역사가 짧은 예술입니다. (숫자 외우는 걸 잘 못하니까) 대충 말하자면,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시, 서, 화, 그러니까 시와 서예와 그림에 비교하면 확실히 풋내기 예술이죠. 시와 그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어왔고, 뭐 대충 그렇습니다.

한글의 창제와 보급과 발맞추어 한글소설도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대소설 시대'의 개막! 홍길동전, 숙영낭자전, 완월회맹연, 창선감의록, 최척전, 전우치전, 구운몽, 조웅전, 유충렬전, 숙향전 등등이 대유행! 아마 얼마전에 수능을 봤다면 어느 정도 익숙할 목록입니다만. 아무튼 당시 여성들이 패물을 팔고 집문서를 팔고 빚을 얻어서 소설을 사들였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중고 춘향전 팝니다. 네고 가능) 놀랍죠? 저런 따분한 책들을 그렇게 열렬하게 보다니요. 우리 조상들은 그랬다고 합니다. 역시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듭니다.

지금부터 소설의 폭력성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더 짧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종로의 담배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패사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가장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고서는 담배 써는 칼로 패사 읽는 사람을 찔러 죽였다.

이덕무, <<아정유고>>

여기서 '패사'는 소설의 옛 표현입니다. 상당히 디테일한 기록이죠? 엽기적인 사건입니다. 현장은 종로의 담배 가게, 흉기는 현장에 비치되어 있는 담배 써는 칼이고, 피의자는 입에 거품을 문 채 피해자를... 아 끔찍해라. 사건의 원인은 소설인 것 같네요. 소설은 역시 위험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설을 소리내서 읽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필요할 것 같네요.

농담입니다.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하지만 그런 규제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잖아요? 소설을 듣다가 사람을 죽였다고 소설 때문이라고 한다는 게. 아이가 호롱불 밑에서 소설을 보고 있는데 불을 꺼버린 다음에, 아이가 화를 내는군, 역시 소설은 폭력적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잖아요? 반복합니다.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하지만 그런 짓거리를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깨어있으라, 게임이 세상을 멸망시킬지니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에는 심각한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은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소설에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의무를 방기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나아가 몸과 마음이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저속, 외설, 음행, 괴상 등등을 들고 일어섭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들이죠. 왜냐하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단어니까요. 이 소설은 저속하고, 저 영화는 외설적이며, 그 웹툰은 음란하고. 자, 이제 하나 더 추가하면 되겠네요. 이 게임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사람들이 게임에 미쳤다, 이 세상이 미치려고 한다, 막아야 한다, 라고.

그래서 저는 묻고 싶습니다.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자살하나요? 웹툰 때문에 범죄율이 올라갑니까? 영화 때문에 세상이 타락했나요? 음, 그럴 뻔 했는데 막았노라, 아니면 여전히 막기 위해 힘들게 애쓰고 있노라,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또 물을 겁니다. 소설은? 소설 때문에 세상이 미쳤나요? 소설 때문에 나라가 몰락했나요? 조선의 사대부들이 소설 읽기를 금하지 않아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까?

정말로, 무엇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쁜 곳으로 만드는 걸까요?

우리의 중독, 당신들의 중독

게임중독법을 비판하면서 많은 분들이 만화와 영화에 대한 규제를 언급합니다. 거기 더해, 훨씬 전부터 소설을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는 걸 지적해 봤습니다. 자, 이 세상에는, 언제나 항상 반드시, 새로운 매체, 새로운 놀이, 새로운 장르, 새로운 예술, 그러니까 새로운 즐거움이 등장할 때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왜 화를 내는 걸까요? 우리는 단지 즐겁고 싶을 뿐인데, 왜 그렇게 못마땅한 걸까요? 사람들이 편히 쉬면서 함께 웃으며 즐거워 하는 걸 애를 쓰고 막으려는 걸까요?

아마도 그들은 규제에 중독된 걸지도 모릅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스팀 라이브러리를 늘릴 것이다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언제나 매체에 대한 규제는 있어 왔다. 둘째, 그러한 규제 가운데 성공한 것은 없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죠. 지금 소설은 어떤가요? 아쉽게도, 인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아 보이네요. 도서관에는 소설이 많이 있고, 서점에도 그렇고, 종류도 많아졌습니다. 심각한 것에서 가벼운 것까지, 신과 죽음에 관한 것에서 게임(!?)에 관한 것까지. 더 놀라운 것은,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 어디서나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있고 교수가 있고. 직업 소설가를 저질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긴긴 세월이 지났고, 소설이 승리했습니다.

언젠가 게임도 그렇게 될 날이 올까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예언자가 아니라 그저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렇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희망입니다. 슬픈 건. 당분간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 아니, 제 주변에서 좋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 것 같다는 것.

어쩔 수 없나요? 그래도 일단은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을 기다려 볼까요?

* 중간의 인용은 이상택 외, <<한국 고전소설의 세계>>, 돌베개, 에서 재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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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라이브러리는 나의 소중한 월급을 먹고 자랍니다.....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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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프라이데이 -> 할리데이로 이어지는 세일 폭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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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출판이 금지되어 있고 마광수 교수는 아직도 전공수업은 못한다고 하더군요.
게임이 갈 길은 한참 멀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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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설에도 검열과 규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군요. 휴, 정말 갈 길이 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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