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 말 거란군이 서경 (평양) 공략에 실패하고 개경 (개성)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현종 (992 ~1031) 은 서둘러 몽진길을 서두르게 됩니다. 그렇게 최종목적지 인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 를
만났던 나주로 피난을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현종은 즉위이전 김치양 (?~1009) 과 천추태후 (964~1029)에 의해
암살당할 위험에 시달렸듯 이번엔 전국 각지에 들끓던 도적들과 지방세력인 호족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개경 (개성) 에서 피난을 시작하고 얼마안가 적성현 (경기도 파주 . 목종이 이곳에서 귀양을 갔다 피살당한곳이기도 합니다. )
에서 부터 현종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파주 에서 단조역 (말을 쉬거나 바꿔 갈아타는 역) 에 군졸인 건영이란 자가 그곳에 인원을 선동해
파주에 도착하여 임시행궁을 꾸린 현종일행을 습격하나 지채문 (? ~1026)에 의해 격퇴당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파주에서 부터 도적들의 급습을 받은 이후 창화현 (경기도 양주 ) 에서 다시한번 호족의 첫번째 위협을 받게됩니다.
현종의 어가가 양주에 다다랐을때 그곳의 아전을 맡던 호족이 그의 사병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현종을 보더니 자신을 아느냐 라며
건방을 떨었는데 괜히 휘말리기 싫었던 현종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버리자 열받은 그는 하공진 ( ? ~1012) 이 군사를 이끌고
현종의 피난기를 수행하는 채충순 (?~1036) , 김응인 (?~?) , 이정충 , 국근 등을
하공진을 대신하여 잡으러 왔다 라며 소리치는 바람에 수행원들이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났으며
그날밤 임시행궁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난입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이 괴한들이
그 양주 호족의 사병들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왕의 행렬이 가져온 말과 기물을 까지 훔치는 짓까지 저지르고 말았죠 지채문과 남은 인원이
공격하여 그들을 격퇴하였지만 남아있던 인원은 지채문 을 따르는 경비인원과
현종과 왕후 그리고 시녀 둘과 내관 (승지)인 양협과 충필 만이 남아있었고 이에
지채문은 남은 일행을 양주에 있는 사찰인 도봉사 (서울시 도봉산 도봉구 소재 ) 로 피신시켰는데
여기서 흩어진 수행원들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주호족이 외친 헛소문이 사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현종에게 직접 자신이 하공진을 찾아가서
사실여부를 묻고 오겠다고하자 겁에 질린 현종이 하공진을 만나는걸 반대하여 어렵자 지채문은 현종에게
자신이 임금을 저버리고 언행을 다르게 간다면 결단코 하늘이 자신에게 벌을 내릴것이라 말하며 현종을 안심시켰고
그렇게 현종은 하공진을 만나 사실여부를 묻고 오라는 허락을 내립니다.
이때 하공진 ( ? ~ 1012) 은 지난 동여진 부족 문제로 귀양을 갔다 2차 거란의 침공당시 통주 (평안북도 선천군) 에서 대패이후
인력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군을 지휘코자 그를 사면하였는데 사면된 이후 하공진은
서둘러 왕을 호위하고자 왕이 있던 양주로 가던도중 호부원외랑 고원기와
패잔병 20명을 수습하고 왕에게 향하던 길이였습니다.
한편 지채문은 양주호족이 퍼트린 헛소문에 겁에 질려 도망갔던 국근을 만났는데
이때 국근은 호족의 군사들에게 다 털리 빈털터리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와 합류하여
양주로 오던 하공진을 목숨을 걸고 만나 그와의 대화를 통해 사실무근임을 알게된 지채문은
지난밤 행궁을 급습하고 헛소문을 퍼트린 양주호족과 그 군사들을 박살내고 그들이 훔친 말과 안장을 되찾아 돌아옵니다.
이때 하공진 은 스스로 남아 현종이 피난가는 시간을 벌기위해 거짓항복으로 가는 사신이 되어 양주를 벗어나기도 전에
거란군이 들이닥쳤고 하공진은 성종 (야율융서) 를 만나 항복교섭을 벌이게되었는데
이에 성종 (야율융서)은 하공진을 인질로 남게하고 현종에게 자신을 직접 만나 친조하라는 명을 고영기 및 일부 사신들에게
내려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현종일행은 아직 양주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였고
이 사실에 두려워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인원들 마저 도망가버리니
남은 인원은 지채문 휘하 호위군사 와 일부 시녀 및 승지 신하로는 채충순.김응인.유종.주조.충숙.장연우 뿐이였습니다.
그렇게 어가행렬은 광주를 거쳐 수원에 도착했는데 이때 왕을 수행하던 유종 과 김응인 이
원정왕후 (?~1018) 를 사가인 선주 (경북 구미)
로 보내야 한다 왕에게 직언하였지만 왕은 반대하였고 이후
공주에 도착하였을때 왕후들을 사가 로 보냈다고합니다.
그런대 왕을 수행하던 유종과 김응인이 거짓말로 수원사람들에게 남아있던 말과
안장을 팔아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유인 즉슨 수원이 유종의
고향이라 거짓말로 왕명을 조작해서 판것이엿는데
이것이 들킬것을 두려워했던 두사람은 어가가 천안에 도착하자
식량을 구하겠다며 나선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지채문은 어가가 직산에 이르렀을때 현종에 두려옴을 해소시키고자
말을 탄체 논에 있던 기러기들을 향해 달려가니
놀란 기러기 때가 날아 도망가자 말을 탄체 몸을 제쳐 활을 쏴 그중 한마리를 쏴서 왕에게 헌상하며 말하길
이렇게 활을 잘쏘는 신하가 있는데 도적이 있는들 무슨 걱정이 있겠사옵니까 ?
라며 현종을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가 일행은 공주에 도착했을때 그나마 공주의 절도사 김은부 (?~ 1017)가 현종을
따듯하게 맞이한 유일한 인물이였습니다 그 고마움을 알았던 현종은 이후 김은부의 세딸을 왕후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주를 떠나 전주에 도착하여 절도자 전용겸이 현종을 맞이하였으나
박섬 ( ? ~?) 이란 신하가 전주에서 머물러선 안된다며
현종에게 서둘러 전주를 떠나야 한다 주장했는데 당시 전주는 고려가 삼국통일을 하기
이전 후백제 의 수도 였던곳이니 이곳에 머물러선 안된다고 한것입니다
이에 현종은 전주에서 행궁을 잡는대신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에서 행궁을 잡게됩니다.
박섬의 말대로 전주 절도사 조용겸은 현종을 인질삼아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 위해
현종을 잡으러 그의 수하인 이재.최즙.유승건 에게 군사를
주어 현종을 잡으러 이서면으로 보내였으나 사전에 눈치챈 지채문 에 의해 저지당하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 무리인 유승건이 도망치면서 지채문은 전주로 가서
조용겸과 이재를 포박하고 그들에게 엄히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후
조용겸은 왕의 대마공주의 어마를 끌고 가는것으로 처벌을 받고 전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 여파로 현종은 전주에서 나주로 다시 내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나주 에 도착한 현종은 그곳에서 나주 사람들의 따듯한 환영을 받아 그나마 지친몸을 쉴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주에 도착하기 전 익산에서 군사들의 불만이 있자 불만들을 달래는등
여러모로 험난한 피난길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아니였던것이 .. 거란에서 보낸 사신이 나주에 도착하였을때 한 야경꾼이
그걸보고 거란군이 처들어온줄 알고 기겁하고 달아날 뻔했던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의 사신은 곧 압록강의 언강이 녹아 퇴각하기 어렵다 판단한 거란의 성종 (야율융서) 이
고려에서 보낸 화친조약 을 맺기위서 온 것이였고 그렇게 조약을 맺은뒤 2차 침공은 끝을 맺게되었습니다.